어린이에게 어린이를 돌려주세요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2020)
사진 설명 시작.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 표지 사진이다. 연노랑색 배경에, 사진 상단 중앙에는 금색 글씨로 제목
▲ⓒ예스24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점점 줄어드네요.” 이 말을 단순히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줄었다’거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공간이 부족하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도 될까.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어 나가다 보면 그런 고민조차도 철저히 어른의 시각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작가는 어린이 독서 교실에서의 일화들을 통해 ‘어린이는 마땅히 이해해줘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 자체를 경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이해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며, 어른이 어린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명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무서울 땐 함께 있어 달라 청하기도, 어려운 일을 끝까지 시도하다 적당한 대상을 찾아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어린이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틈을 주지 않고 번번이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어른이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어린이’가 될 수 있는 순간도 자신의 입맛대로 좌우한다. 대개 어린이는 4, 5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아이를 칭하는 말이지만, 이 나이대의 아이들마저 어른의 의사에 따라 어린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떼어졌다 한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애들은 이런 거 못 해’라며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가로막고, 도움을 청하면 ‘너 이제 어린이 아니고 형이잖아’라며 의젓한 모습을 요구한다. 어른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어린이에게 할 수 있는 것,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정해주려 한다.

  어린이가 어른들의 생각대로 남용되는 단어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어른들은 어린이의 수많은 정체성 중 ‘미숙한 존재’라는 특성만 떼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헬스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헬린이’, 주식 투자에 갓 뛰어든 사람은 ‘주린이’로 부르는 등 어느 분야에서든 어린이와 결합해 초보자를 뜻하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를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만 보는 어른들의 언어가 점점 어린이들이 설 곳을 좁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는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어른이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사회에서 어린이의 위치가 정해진다. 최근 불거진 노키즈존 문제와 같이 아이들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이 줄었다’는 고민 또한 어린이를 걱정 없이 놀기만 하면 되는 존재로 보는,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을 어른의 시각만으로 한정하려는 시도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어린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정작 어린이는 그 자리에 없다. 이야깃거리를 고르는 이도, 결정권을 갖는 이도 항상 어른이다.

  우리는 어린이란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 있을까? 어린이가 어른이 이해해줘야 할, 서투르며 챙겨야 할 약자라는 것은 어른의 시각이다. 세상은 어른만의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어린이가 온전히 어린이일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이래야 한다”는 어른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어린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어른으로부터, 어린이에게 어린이를 돌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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