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서 무던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모나도 걱정은 없던 학창시절 나와 친구의 모습이다. 졸업과 입학, 다시 졸업과 입학, 그리고 졸업. 어른이 되기까지 우리는 몇 번씩 익숙한 세계와 작별하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 한다. 끝과 시작이 주는 불안과 설렘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익숙한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기도 한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이 되고 다시 마주한 두 친구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생각해보니 참 달랐고, 그래도 좋아했던, 이제는 더 달라진 너와 나 사이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에서 셋으로
청주여자고등학교 기숙사에는 유정, 김민영, 최수산나의 ‘삼행시 클럽’이 있다. 삼행시 형식의 시나 수필을 짓고 공유하는 세 친구의 우정 공동체 삼행시 클럽은 수능을 100일 앞두고 ‘학생과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해체를 선언한다. 숙연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민영은 변화를 다짐하는 삼행시를 읊는다.
“김 씨가 너무 많다. 그래서 김 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이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했다.”
“민영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민영의 삼행시를 끝으로 세 친구는 잠시만 멀어지기로 약속한다.
약속이 무색하게도 수능이 끝나고 세 친구는 뿔뿔이 흩어진다. 수산나는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고, 민영은 대구대에 진학한다. 정희는 대학에 가지 않고 청주에 남는다. 화상 회의를 이용해 삼행시 클럽을 이어가지만, 우정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수산나는 유학 생활과 짝사랑의 고충을 털어놓지만, 민영은 집중하기는커녕 바쁘다는 핑계로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서운함을 느낀 수산나는 미국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임을 떠난다. 정희는 변해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 남은 정희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테니스장 관리인 일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테니스장 사장의 아들인 정일을 만난다. 중년으로 가득한 테니스장에서 두 사람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테니스장 사장은 경영난을 이유로 정희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정일을 고용한다. 정희는 새 친구와 직장을 잃고 다시 혼자가 된다.
그때 방학을 맞아 서울에 있는 친오빠의 빈집에 머무르게 된 민영이 정희를 초대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단 생각에 들뜬 정희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민영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고, 민영의 문자 한 통만이 도착한다. ‘미안. 나 좀 늦어.’ 정희는 하염없이 민영을 기다린다.

잘 있다 가. 안녕.
뒤늦게 도착한 민영은 정희의 지나치게 커다란 여행 가방을 보고 차갑게 묻는다. “하룻밤만 자고 간다면서?” 그 말을 들은 정희는 여행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인다. 햇반, 보드게임, 배드민턴 라켓, 크림치즈, 퍼즐…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어 멀뚱멀뚱한 민영에게 정희는 종이 한 장을 내민다. ‘김민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의 종이에는 고등학교 시절 정희와 민영이 언젠가 해보자고 말했던 일들이 적혀 있다. 정희는 민영을 위해 둘만의 과거를 청주에서 서울까지 옮겨 나른 것이다.
민영은 그런 정희가 답답하다. 대학은커녕 ‘촌구석’에 남아 아무 의미 없어보이는 일만 하는 정희에게 ‘좀 괜찮은’ 일을 하는 건 어떠냐고 다그친다. 민영은 자신의 계획들을 읊어준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의 서울 집을 물려받는 것이다. 두 계획 모두 이번 학기에 우수한 성적을 받아야만 이뤄질 수 있다. 마침 학기 성적이 발표됐다는 소식을 들은 민영은 가슴을 졸이며 성적을 확인한다.
‘일반미생물학: B0.’ 학점을 확인한 민영은 경악한다. 급하게 교수에게 학점 정정을 요구하는 메일을 쓰고, 친구들과 학생 커뮤니티에 학점을 올릴 방법을 묻는다. 학점에 정신이 팔린 민영에게 정희는 뒷전이다. 정희는 어차피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김민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하며 머리를 식히자고 말하지만, 민영은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 달라진 민영을 보며, 정희는 서러움을 참지 못한다. 정희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성적은 공부한 만큼 나온다고. 몇 마디 말로 바뀌어선 안 된다고. 너와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고.
정신을 차린 민영은 뒤늦게나마 정희와 시간을 보내지만 그것도 잠시뿐. 교수에게 학점 정정을 거절당하자 민영은 다시 불안과 걱정에 휩쓸리고, 결국 교수와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한다. 민영은 정희가 씻는 동안 ‘차마 얼굴 보고 말하기 무서워서 몰래 간다. 미안해’라는 메모를 남기고 대구로 향한다. 정희는 민영의 공간에서마저 다시 혼자가 된다.
정희는 복수하는 심정으로 민영이 고등학교 때부터 써온 비밀 일기장과 CD를 훔쳐본다. 일기장에는 고등학교 시절에 적힌 정희와 자신이 다른 점이 많아서 가끔 이해할 수 없다는 푸념이, CD 속에는 아이돌 오디션에 지원한 모습이 담겨있다. 민영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만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지만 금방 다시 혼자가 되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희는 민영의 일기장과 CD를 보며, 서로가 너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모두 통하는 내 분신과도 같던 친구, 김민영. 그러나 둘 은 오래전부터 달랐다. 오히려 스무 살이 되고서야 외로운 어른이 됐다는 공통점이 생겼다.
다음날, 정희는 민영의 ▲경제력 ▲패션과 감각 ▲사회성 ▲인간관계 ▲베풂 ▲마음과 행동에 대한 성적이 담긴 ‘김민영의 성적표’와, 햇반으로 만든 경단을 남긴 채 민영의 집을 떠난다. 정희마저 떠나 텅 빈 집으로 돌아온 민영은 정희가 남긴 성적표 속 마지막 문단을 읽는다. “앞으로 뭘 하든 그때의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잘 있다 가. 안녕.”
너의 이름이 남긴 건
영화 속 민영은 계속 정면을 바라본다. 말을 건넬 때도, 말을 들을 때도 정희에게 시선을 보내는 일이 드물다. 자연스레 정희는 민영의 정면에 서기 어렵다. 민영의 정면에는 카메라가 있고, 민영의 삶을 감시하는 수많은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영은 계속 정면을 의식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정희는 그렇게 멀어져가는 민영이 뒤돌아보기만을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정희는 작별인사 같은 성적표를 남기고 ‘김민영’이란 이름을 가져간다. 구청 그림 대회에 작품을 두 점 제출하기 위해서다. ‘김민영’의 이름으로 제출한 그림은 입상한다. 그림 속엔 깊은 숲에서 약초를 캐는 외딴 여자가 있다. 그림 속 풍경이 실제 장면으로 전환되며, 관객은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민영이다. 정희의 그림 속 민영은 더 이상 정면을 의식하지 않는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정면을 볼 때, 관객은 그 앞에 정희가 서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영화는 둘의 재회를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난다. 정희와 민영의 시선은 끝내 마주치지 못한다.
어느 순간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를 밀쳐내거나 이별을 통보해서가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그렇게 멀어지는 관계 속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끔은 정희처럼, 또 가끔은 민영처럼 행동하는 우리. 이미 멀어진 관계를 다시 되돌릴 순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달랐던 그때의 ‘너’도 사실은 ‘나’와 같았음을 이해한다면, 언제라도 서로를 다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