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호 청연(서어서문 졸업) blueuten@gmail.com
기후위기를 알고 나서 관련 활동에 열심이다. 녹색당 기후정의위원회와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주로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어떻게 기후운동을 넓힐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이다.”
– 리베카 솔닛
나는 ‘기후 악당’ 서울대를 졸업했다. 규모만큼 엄청난 온실가스 배출, 곧 탄소 배출량을 자랑하는 학교. 서울대는 기후 위기 문제에 있어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서울대는 기후 위기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올해 8월의 침수. 강남이 잠긴 115년 만의 폭우로, 중앙도서관 책 10만 권이 훼손됐다. 인문대와 사범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연구데이터가 소실됐고 전교 피해액은 20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얼마 전 있었던 총장선거에서, 그리고 침수 이후의 대응에서도 기후 위기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왜일까? (보다 상세한 내용은 서울대저널 기사 ‘기후재난 시대, 서울대의 과제는?’ 참조.)
고백하자면 나 역시, 20대가 끝나가는 2019년까지 부끄럽게도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다든지 생태 감수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기후 변화는 내게 너무 먼 문제였다. ‘지구온난화로 지구가 뜨거워진대.’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죽어가고, 섬나라 투발루가 물에 잠긴대.’ 그래서 뭐? 안타까운 일은 맞지만, 엄밀히 말해 ‘내 문제’는 아니었다. 더 급한 일들이 내 일상과 세상에는 많았다. 기후 변화는 빨라야 50년~100년 뒤, 혹은 SF영화에서 나타나는 일로 느껴졌다.
생각이 바뀐 것은 한 기후 위기(어느새 변화는 위기가 되었다. 이제는 기후 붕괴나 기후 재앙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강의를 듣고서였다.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IPCC 특별보고서, 킬링 곡선과 하키스틱 그래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기후 위기의 원인이 인간의 과도한 탄소배출에 있다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외침은 부정하기 어려웠고, 그 속력의 상승 폭은 너무나 가팔랐다. 지구 온도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안으로 막을 것을 권하며, 2℃가 넘게 오르면 산호초의 99%, 동식물의 3분의 1 이상이 멸종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은 참혹했다. 2022년 현재, 유엔에 따르면 이대로 가면 세기말에 지구온도는 2.5℃~2.7℃ 상승한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직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우리가.)
막막함과 무력감도 있었지만, 그런 ‘기후 우울’보다 큰 감정은 분노였다. ‘왜 언론도, 학교도 내게 이런 걸 알려주지 않았지? 사회는 왜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안 쓰는 플러그 뽑기, 일회용품 줄이기, 텀블러와 장바구니 사용으로는 부족했다. 이런 캠페인들은 언행일치 차원에서도 중요하며, 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내게는 일상의 실천을 말하면서 동시에 기후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인 석탄화력발전소를, 신공항을 계속 짓는 일이 정말 이상하게 보였다. 이 좁은 국토에 석탄발전소 60기에 신공항 10개는 좀 심하지 않나? 2022년에….
그러던 중에 ‘그린뉴딜’과 녹색 전환이라는 선택지를 알게 되었다. 사회 각 부문의 전면적인 구조적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접근법이었다. 이거면 어떻게 좀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기후 운동에, 기후 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활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두산 신사옥 로고 스프레이 직접행동, P4G정상회의장 앞 단식농성
3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처럼 멸종할래?” 피켓에 공룡 옷 입고 장관님 만나고, 석탄발전소 수출 안된다고 기업 로고에 스프레이 뿌리고(친환경 수성 스프레이로 뿌리고 바로 세척했지만, 해당 기업에서 민사소송을 걸었다), 신공항 반대하며 민주당사 올라가고, 신규 석탄발전소 10기 새로 짓는 것 철회하라며 2주간 단식도 하고, 기업 행사장에 들어가 장관 인사말을 가로채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퍼포먼스와 직접행동의 방식을 택했지만, 정말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냈다. 전 세계 상황의 변화, 코로나19와 산불, 폭우와 같은 기후재난 등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1년 전만 해도 불가능하다던 2050년 탄소중립* 선언이 정부로부터 나왔다. 나아가 2022년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는 3만 5천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모였다. 기후는 물론 환경 단일 의제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탄소중립: 늘어나는 탄소배출량만큼 감축량도 늘려서, 플러스 마이너스 도합 0의 중립 상태로 만들자는 개념. 현재 배출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감축에 큰 무게를 두는 개념으로, 이것으로도 부족하고 아예 탄소배출량 자체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실패도 많았다. 석탄발전소를 막지 못했고, 신공항을 중단시키지 못했으며, 한국형 그린뉴딜과 탄소중립의 내용은 많이 부족했다. 정부 기구 탄소중립위원회를 두고 운동 내부에서 갈라져 싸우기도 했고, 선거 국면에서는 ‘기후 대선’과 ‘기후 지선’을 외쳤으나 영향력은 적었다. 우리는 내부와 외부에서 정치를 만드는 데 실패했고, 사회 운동을 조직하고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해내야 한다. 아쉬웠던 부분은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하면서 계속 생각하는 말이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별로 안 유명한 말이다. “나이가 들어 돌아봤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면 당연하게도,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시간이나 다른 자원들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선순위도 매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끼고 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뭘 해야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면 지금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그린뉴딜이나 녹색 전환처럼 행동에 기반한 희망을 주는 비전과 로드맵이 없었다면, 나는 우울감이나 무력감에 빠졌거나 회피 전략을 택하고 외면했을지 모른다. 혹은 줍깅(플로깅)이나 비건 지향만 실천하면서 거짓 희망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로는 기후 위기 앞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답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안다.

그래서 직장동료와 함께 대학간담회 자리를 만들었다. ‘기후 위기 시대 대학의 역할’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졸업한 학교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기후 악당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대학생과 청년들만큼 기후 위기 대응에서 중요한 계층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와 권력은 많지 않지만, 알 만큼 알고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자원은 있으니까. 그렇게 변화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주요 플레이어들을 불렀다. 총학생회, 대학원 총학생회, 교수와 관련 전문가, 누구보다 중요한 당사자인 학생들까지. 사실 대학간담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학내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줬던 환경동아리연합회의 의장단을 만난 것이다. 특히 현 의장님은 예전 우연한 기회에 기후 악당 서울대를 욕하는 나의 강연을 듣고 영향을 받아 연합회의 의장직까지 맡게 되셨다고 했다. 이렇게 가해와 피해에 대한 증언은 계속 연결되고 힘을 얻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예술가 이랑은 다큐멘터리 <더 코브>의 주인공 릭 오배리에 감명을 받아 노래 ‘삐이삐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청년 시절 세계 최초로 돌고래 조련을 해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돌고래 착취와 학살로 충격을 받아 돌고래 해방 운동에 앞장선 인간 동물이다. 릭은 크나큰 가해를 저질렀지만, 피해자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다시 나섰다. 대한민국도, 서울대도, 나 자신도 그렇게 가해자에서 바뀔 수 있다. 우리 자신도 피해자의 일원이고, 위험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면 더욱 그렇다.

이랑은 돌고래 울음소리에서 따온 ‘삐이삐이’ 가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 부르지 않으면 노래가 없는 것처럼 /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아닌지 몰라 / 해파리보다 일찍 사라지니까 / 그렇다고 죽어있을 수만은 없잖아 /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도 아니게 되니까.’
우리는 금방 사라지고, 사회 속에서 별것 아닌 미약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도 아니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곧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곳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고 알아가고 행동하는 것. 우리가 기후위기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발버둥이 아닐까 싶다. 같이 걸어가고, 노래를 만들고, 계속 만나고 함께 춤추자고 이랑은 말한다. 서울대에 있고, 있었던 구성원에게도 같은 초대를 전한다. 다 같이 삐이삐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