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역사도 100년을 넘어섰다.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도 드물지 않게 들려온다. 덩달아 영화산업 규모도 커지면서 작품에 투입되는 예산 또한 증가했다. 과거 해외영화에서나 볼 법했던 SF 장르나 수려한 화면 구성을 뽐내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눈을 즐겁게 해준 영화의 크레딧이 오르면 관객들은 후련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선다. 그런데, 모두가 떠날 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다.
쓰레기를 모아보면 어느새 태산처럼
* 이 글은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2020년 11월 발표한 보고서 『지속가능한 영화제작을 위한 환경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단편영화 제작과정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단편영화 촬영장이다. 장비 작동을 위한 충전 지선이 널려 있다. 마당에 놓인 탁자도 모두 소품으로 구비된 것이다. ⓒ《왕호왕사》 제작부
20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열 명 남짓의 학생들이 모여 열심히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연출부 A씨는 배우 오디션 준비로 바쁘다. 시나리오 열 부를 인쇄하고, 물과 간단한 간식을 구매했다. 오디션이 끝나고 남은 시나리오는 딱히 쓸 곳이 없어 폐기했고, 남은 물과 간식은 따로 보관했다.
미술부 B씨는 소품 목록을 만들었다. 촬영 장소를 꾸밀 기본적인 배경 소품은 중고 거래를 하거나 지인들을 통해 구해보려 애썼다. 미처 구하지 못한 소품은 기성품을 구매해 해결했지만, 중요한 의미가 담긴 소품은 이곳저곳에서 재료를 모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의상은 배우 소장품을 활용하거나 스태프 내에서 구해보고, 구하지 못한 것은 구매했다.
본격적인 촬영 날이 밝았다. 연출부 A씨는 모든 스태프에게 일일 촬영 계획표와 스토리보드 등 인쇄물을 배부했다. 장면 사이 연속성 유지를 위해 소품이나 인물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형광 테이프를 붙이고 떼다 보니 한 통을 다 써버렸다.
제작부 C씨는 아침부터 인원 집결지와 촬영 장소를 차량으로 오가며 스태프와 장비 이동을 도왔다. 촬영 장소에는 일회용 물병과 간식을 비치하고, 쓰레기 처리용 봉투도 마련했다. 촬영장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 식사는 일회용 도시락으로 준비했다. 식사 후에는 분리수거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처리했지만, 일반 쓰레기도 꽤 많이 나왔다. 도중에 지인이 선물한 커피가 촬영장으로 배달됐다. 촬영 시간이 넉넉지 않아 커피는 반도 채 마시지 못하고 버려야만 했다.
촬영부 D씨는 카메라, 조명부터 모니터, 팔로우포커스 등 모든 장비의 배터리를 관리하느라 바쁘다. 멀티탭과 릴선을 몇 개나 구해다 긴 촬영 시간 내내 카메라 등 촬영 기기의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번갈아 가며 충전했다. 음향 장비를 위한 AA 배터리도 하루에 스무 개씩은 준비했다. 촬영장 한 편에서는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조명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쓰는 전기만큼이나 발열이 심해 조명 주변은 후끈하게 덥다.
촬영이 끝나고 미술부 B씨는 뒤처리가 고민이다. 촬영장으로 대여한 오피스텔 방에 곰팡이가 핀 모습을 연출하려 얼룩을 칠한 벽지를 처분할 방도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의상과 소품도 문제다. 대여한 것들은 반납하면 되지만, 구매하고 만든 것들은 마땅히 둘 데도 가져갈 사람도 없어 처치 곤란이다. 의상 몇 벌은 중고 거래로 처리했으나 연출 소품은 팔기 어렵다. 촬영부 D씨는 충전기를 모두 수거했다. 차량에 장비를 모두 실어 촬영 장비 대여점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한 편의 영화 제작을 마쳤다.
영화와 환경의 불편한 공존

2019년 영화 《봉오동 전투》는 개봉을 앞두고 촬영 당시 생태보전지역인 동강 변의 환경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작사는 ‘자연환경법 제15조(생태·경관보전지역에서의 행위제한 등)’ 위배에 따른 과태료와 법적 처분을 받았다. 당시 문제를 제기했던 환경단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김금호 사무처장은 “생태 보전 지역 내 촬영 자체는 가능하지만, 양생 동식물을 해칠 수 있어 금지 행위인 화약류 사용이나 폭음 발생 등이 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사무처장은 정선군청이 지역 홍보 차원에서 촬영을 유치했지만, 생태보전지역에서의 촬영 유의점을 사전에 안내하거나 현장 관리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을 행정적 아쉬움으로 언급했다. 《봉오동 전투》는 이후 해당 지역 촬영분을 모두 삭제하고 재촬영했지만, 개봉 직전까지 생태계 파괴에 관한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2022년 개봉한 《탑건: 매버릭》은 제작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탄소를 배출했다. 공중 액션 장면을 위해 전투기 F-18의 실제 비행 모습을 찍었고, 안전을 위해 촬영 전 배우들이 비행 훈련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2019년 브라운대학교의
「미국 국방성 연료 소비 연구」에 따르면, 《탑건: 매버릭》 촬영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전투기 F-35A는 한 번의 비행만으로 27.8톤의 탄소를 배출한다. 이는 단거리용 비행기가 서울에서 제주까지 8~9회 왕복했을 때의 탄소 배출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실감 나는 촬영으로 호평을 받은 《탑건: 매버릭》의 이면엔 씁쓸한 오염이 있었다.
영화산업 환경오염은 특정 영화 한두 편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0년 〈가디언즈(Guardians)〉는 ‘영화 한 편을 제작할 때 평균적으로 500톤의 탄소를 방출하는데, 이는 180대의 차량이 한 해 동안 배출하는 탄소량과 동일하다’고 보도했다. ‘BFI(영국영화협회)’가 2021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예산 7,000만 달러 이상의 영화 한 편을 제작할 때 평균적으로 약 2,840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제작 규모가 커지면 환경에 끼치는 영향도 커진다. 한국 영화산업 규모의 성장과 함께 불어날 환경오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와 환경이 자꾸만 어긋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매체적 특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강은주 책임연구원은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 콘텐츠 산업은 눈에 보이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화면을 구성해야 한다”며, 이러한 특성이 환경 문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소규모 영화 작업에 참여해 온 이지원 씨는 뮤지컬 극단의 소품 디자이너로 활동한 경험과 비교해 “공연예술보다 영화에서 소품의 중요성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소품은 화면을 채울 뿐 아니라 오브제로서 특정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직접 구매하거나 제작하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화면을 빛냈던 소품과 의상들은 촬영 종료 후 짐 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한 작품만을 위해 제작된 소품이 많은 영화산업의 특성상 판매하기도 어려워 소장이나 폐기 말고는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제작 예산의 대부분을 제작진의 사비로 충당하는 독립영화의 경우 제작비 절감을 위해 최대한 소품과 의상을 재사용하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다수의 독립·단편영화 PD를 맡았던 최현건 씨는 “소품 보관이나 중고 거래가 오히려 추가적인 인력 소모만 발생시켜 제작진에게 부담을 가중한다”며 제작 현장에서 폐기 외의 처분 방식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촬영 프레임 밖에서도 환경오염의 위험이 도사린다. 제작 현장에서는 위생 문제와 관리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일회용 생수를 구비하고, 간식도 소포장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잦다. 새로운 유형의 쓰레기도 등장했다. 강은주 연구원은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필요 이상으로 낭비되는 자원으로 최근 많아진 간식차, 커피차 등을 꼽았다”고 설명했다. 최현건 씨는 이와 관련해 “응원차 오는 선물이라 반갑지만, 동시에 두 세트가 오거나 (먹을) 시간이 넉넉지 않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며 본인의 경험을 공유했다.
쓰레기 발생만이 문제가 아니다. 대규모 전력을 소모하는 촬영 장비, 특수효과로 인한 주변 환경 훼손, 잦은 이동으로 인한 탄소 배출 역시 영화산업의 대표적인 환경오염원이다. 강은주 연구원은 이에 “영화는 수백에서 수천 명이 함께,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제작하기에, 폐기물 발생, 에너지 소비, 환경과 인간에 대한 영향 등 다층적 문제가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영화산업의 노동집약적 성격이 쓰레기를 대거 양성하고 환경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영진위가 2020년 발간한 『지속가능한 영화제작을 위한 환경 가이드라인』 보고서에 따르면 현장 이해관계자의 절반 이상이 영화제작 과정 중 환경적으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으로 ‘폐기물 처리’를 꼽았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은 소품에서부터 시작해 포장용지, 일회용품, 음식물 쓰레기 등 종류도 다양하고, 화학물질이나 배터리 등 주의를 기울여야 할 종류도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쓰레기 문제부터 보이지 않는 탄소 배출과 자원 낭비까지. 역설적이게도 열정적인 영화제작 과정에서 함께 발생하는 환경 문제는 늘어만 간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만족감과 예술적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와 양립하는 환경 문제를 떠올리면 난처해질 뿐이다.
울타리 없는 한국 영화산업

미국, 프랑스 등 영화산업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영화산업 내부에 환경단체를 설립하거나 주요 제작사가 모여 친환경 제작 가이드라인을 발간한 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관리 기관이나 정책이 따로 없고, 영화제작 환경을 살핀 연구나 통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국책
건설·토목 사업도 멸종위기야생생물의 산란·포란기에는 공사를 중단하는 등 정책 시행에 있어서 환경 고려는 필수적임에도 영화산업은 여전히 친환경의 사각지대다.
앞선 《봉오동 전투》의 사례는 제작사와 지자체 모두 환경 관련 규제에 대해 숙지가 부족한 영화산업의 현황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우다. 역사적 건축물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드라마, 영화 촬영이 잦은 영국 서리(Surrey) 주의 경우, 지역 영화 사무소를 운영하며 촬영 장소 관련 법규와 유의 사항이 담긴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지역 산업 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환경 문제 발생도 사전에 철저히 예방하고 있다. 국내 영화산업 관리 정책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일회성 소모 후 폐기될 여지가 큰 소품 영역의 경우 공공차원의 관리가 필수적이다. 강은주 연구원은 “해외의 경우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에서 상업 영화에 사용됐던 세트나 소품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제작한 의상과 소품은 지역 필름 아카데미에 기증하거나 경매하도록 권장한다”고 설명했다. 영진위 독립예술영화지원팀 담당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소품 처리 관련 가이드라인이 따로 없다.” 동일한 담당자는 “기관(영진위) 차원에서 운영하는 소품실 또한 없고, 부산에 지어질 종합촬영소에도 소품 보관실 마련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2019년 남양주종합촬영소 폐지 이후 대여·재사용 목적의 국내 소품 관리 기관은 전무하다. 촬영소 폐지로 입주 기업 서울영화장식센터에서 보관하던 무려 40만 점의 소품이 갈 길을 잃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일부 기업이 수거했지만 대부분 폐기됐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영자원)’ 산하 영화박물관이 의상, 소품, 영화 기자재 등 총 1,666점(23년 1월 31일 기준)의 박물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나,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박물관은 “필름 아카이빙을 목적으로 운영”돼 소품 재사용이나 대여와는 거리가 멀다. 각 영화 크루나 제작사가 소품 보관실을 마련해 일부 소품이나 의상 등을 모아두는 경우도 있지만, 효율과 비용 면에서 한계가 있다. 기관이나 위원회 차원의 관리가 없는 상황에서 소품 처분 방법은 온전히 제작사의 선택에 달려있다.
영화산업 이해관계자의 환경 인식 또한 미흡하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친환경 영화제 가이드라인」을 배포하며 영화로부터 파생된 행사에도 환경적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할 때 발생하는 환경 문제까지 인식이 가닿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자의 영화산업 쓰레기 문제 관련 문의에 영화제 운영팀은 “따로 조사하고 있지는 않은 항목”이라 답변했다. 그나마 영진위에서 2020년 발간한 『지속가능한 영화제작을 위한 환경 가이드라인』에 대한 인지도마저 높지 않은 상황이다.
영화와 환경은 함께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만 하는 영화, 무엇이든 덜어내야만 하는 환경. 둘은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
제한된 예산 안에서 제작을 진행하는 영화산업에 환경적 움직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공공 차원의 예산 증대와 인력 확충이 필수적이다. 개별 제작자에 영화 제작과 환경 보호 모든 부담을 떠넘길 수는 없다. 최현건 씨는 “제작자는 예산과 인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산업에 환경적 움직임을 제안하기 위해선 충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지원 씨는 “영화 제작자로서의 환경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공감”하면서도, “학생영화의 경우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환경 용품이나 하이브리드 차 이용 등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지속가능한 영화제작을 위한 환경 가이드라인』에서 지속 가능한 영화 제작 방안으로 인식 개선, 담당 인력 보충, 환경영화 인증 마크 제도 등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참여한 강은주 연구원은 “공적 권위를 이용한 규제만으로는 이해관계자에게 동의와 참여를 요청하기 어렵고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며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방안에 더해 “기관 차원의 환경 인식 교육이나 가이드 제공, 제작비 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강 연구원은 “정부, 공공기관, 제작사, 개인이 연결된 협력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합적 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해외 영화산업처럼 지역별 협력체계 구축이나 지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외 대형 제작사를 시작으로 지속가능한 영화제작의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2019년부터, CJ ENM은 2021년부터 매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보고서를 발표했다. 넷플릭스는 자체적으로 탄소 발자국을 추산해 2021년 한 해에만 약 1,500만 톤을 배출했음을 밝혔고,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절반으로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CJ ENM은 2021년 개관한 CJ ENM 스튜디오 센터의 설계 단계부터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국가 차원의 움직임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2022년 말 영진위는 부산의 영상 관련 기관 5개와 ‘영화·영상 제작환경 친환경 활동 업무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각 기관 녹색 사무 환경 조성 ▲녹색 제품 정보 제공 ▲친환경 교육과 캠페인 추진 ▲네트워크 형성 등에 적극 협력이다. 영진위 관계자는 “협약에 참여한 기관과의 논의를 거쳐 세부 사항을 발전시킬 예정”이라 말했다. 어렵사리 첫 발걸음을 뗀 셈이다.
누군가 단상에서 환경 보호를 외치는 경우를 매체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환경 문제는 비단 예술 바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영화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줄줄이 올라가고 영화관에 남겨진 검은 화면, 그 뒤에는 버리고 처분하고 폐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내려놓고 환경에 전념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모두가 환경에 빚을 지고 사는 현대 사회에서 영화도 그 책임을 함께해야만 한다는 부름이다. 이제는 응답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