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차별금지법 24조’는 ‘문화예술 활동에서의 차별금지’를 규정한다. 장애를 이유로 문화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을 것, 이 전제에서 출발한 배리어프리는 문화공간에서의 장벽을 허물어왔다. 영화, 공연, 전시 분야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지우고자 노력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배리어프리 영화는 시·청각장애인뿐 아니라, 어린이, 노인, 외국인 등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해설’과 화자 및 대사, 음악, 소리 정보를 전달하는 ‘배리어프리 자막’으로 구성된다. 2012년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KOBAFF)는 우리나라에서 배리어프리 영화 제작, 배급, 상영을 선도하는 기관이다. KOBAFF 김수정 대표는 배리어프리 영화 제작이 일종의 ‘감각 번역’이라고 말한다. 시청각 예술인 영화를 시각 및 청각장애인들도 향유할 수 있도록 다른 감각 언어로 옮기는 작업은 무엇보다 영화매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김 대표는 “과거에도 장애인단체가 제작한 한글 자막영화가 있긴 했지만, 영화인들이 직접 번역 작업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KOBAFF의 설립 배경을 전했다.


![[크기변환]사진3.jpg](https://www.snujn.moukri.com/wp-content/uploads/2025/08/6b16a45c8a44e799684ce065924bb801.jpg)
이른바 영화의 ‘감각 번역’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점들은 무엇일까. 김수정 대표는 “차단된 감각에서 느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영화를 즐길 수 있게끔, 기계적 번역을 넘어 어떻게 장애인 관객들이 즐기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할지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음성해설의 내용, 내레이션의 위치, 사운드 믹싱의 방식 등 전 과정에서의 사소한 선택들이 감상을 크게 좌우하기에, 창작자의 의도와 관객들의 즐거움을 모두 살리는 번역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김수정 대표는 배리어프리 영화가 예외적 경험이 아닌 ‘디폴트 옵션’이 되기를 바란다. 김 대표는 “일본과 미국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엄격히 적용해 OTT 개봉영화에 자막과 음성해설을 사실상 의무화했다”며 “배리어프리 옵션을 극장과 기업의 자율성에 맡기는 것을 넘어 배리어프리에 대한 제도적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KOBAFF가 설립된 2012년으로부터 약 10년, 김 대표는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각종 영화제에서 교류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배리어프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이 고양되고 있다. 천천히 조금씩, 배리어프리 영화와 KOBAFF는 나아가고 있다.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2010년대 말부터 공연·예술계의 배리어프리를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아르코예술극장) 역시 이에 발맞춰 배리어프리 지원을 도입하고 확충해 왔다. 하지만 아르코예술극장은 1981년에 비장애인만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오래된 시설이자,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개보수에 제약이 따라 배리어프리 지원 도입이 쉽지 않았다. 극장운영팀의 이유진 PD는 시설 보존과 배리어프리 시설 확충 간 타협점을 끊임없이 고민해왔다고 전했다.

2019년 아르코예술극장이 배리어프리 지원 도입을 결정한 후, 운영팀은 가장 먼저 휠체어 경사로의 울퉁불퉁한 자갈부터 갈아냈다. 기존 건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휠체어 이용객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외에도 입구에 음성해설을 지원하는 촉지도를 설치하고, 입구부터 매표소까지 점자블록을 부착하는 등 시각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시설을 추가했다.


의 계단과 휠체어램프. 휠체어램프의 자갈을 갈아 매끄럽게 만들었다.


의 촉지도와 점자 보도블록
배리어프리 공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인 관객들의 안전이다. 아르코예술극장은 지하 공연장에 보행 약자를 위한 대피 보조 기구를 비치했다.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안내 직원들이 보조 기구에 관객을 태우고 양쪽에서 짊어져 1층까지 이동한다. 황수희 하우스 매니저는 “실습을 통해 관람객들을 비상 상황에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도록 안내원들을 훈련한다”고 설명했다. 이동부터 안전까지 여러 방면에 걸친 세심한 노력 끝에 오늘날 아르코예술극장은 대학로의 대표적 배리어프리 극장으로 꼽히고 있다.


이유진 PD는 공연계 배리어프리 확대의 주된 동력이 극장과 극단들의 협력이라고 말한다. 아르코예술극장을 비롯해 국내의 여러 극장은 접근성 강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다른 극장 및 극단들과 공유하고, 배리어프리 극을 제작하는 극단들에 공간과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이 PD는 “점차 여러 지역의 극장 간 유기적 결합방식이 마련된다면, 배리어프리 공연들도 더 확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99아트컴퍼니 기획공연 「침묵」의 프로그램북. 아르코예술극장이 배리어프리를
지원했다.
배리어프리 연극 「견고딕-걸」
지난 2월 17일부터 24일까지, 극단 작은방의 연극 「견고딕-걸」이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견고딕-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도록 기획된 배리어프리 극이다. 「견고딕-걸」의 이보람 기획은 작품에 대해 “배리어프리에 관심이 많은 신재훈 연출자가 참여한 국립극장의 「틴에이지 딕」, 전통예술 「오셀로와 이아고」 등에 이은 또 다른 배리어프리 극”이라 설명했다.
「견고딕-걸」은 개방형 자막해설과 폐쇄형 음성해설을 제공했다. 새로운 시도로 도입된 개방형 자막해설은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기존 배리어프리 극의 자막과 달리, 「견고딕-걸」의 개방형 자막해설은 배우들의 움직임, 소리, 감정에 따라 글꼴과 크기까지 변주되는 자막을 제공했다. 이는 단순히 청각장애인 관객들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극의 내용과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음성해설은 전문성을 갖춘 음성해설 각본가가 작성한다. 음성해설 각본가는 리허설 단계부터 참여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창작자의 의도를 고려해 극의 각 장면에 가장 적절한 해설을 작성한다. 구지수 음성해설 각본가는 “「견고딕-걸」의 경우 특이하게 배우들이 안무나 상황을 직접 해설해주는 부분이 있어서, 지문과 배우들의 해설을 비교하며 음성해설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폐쇄형 음성해설을 위한 FM 수신기
실시간 음성해설은 공연 당일 무대 뒤편 음성해설 부스에서 이뤄진다. 음성해설자는 부스 스크린을 통해 공연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며 배우들의 움직임과 무대 구성을 해설한다. 「견고딕-걸」의 음성해설을 맡은 윤진성 배우는 “다른 배우들의 호흡, 장면 전환에 익숙하다 보니 음성해설을 배우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견고딕-걸」의 프로그램북. 점자와 묵자(점자가 아닌 먹으로 쓰인 글씨)가 함께 쓰였다.
배리어프리 극 상연은 기존 극에 비해 품이 많이 든다. 이유진 PD는 “체감상 1.5~1.8개의 작품을 만드는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공연계의 노력은 계속된다. 「견고딕-걸」의 권지현 접근성 매니저는 “창작자들의 인식이 많이 좋아졌고 많은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극장과 창작자들의 지속적 노력으로 공연장의 경계선은 조금씩 지워지는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은 전시 공간 배리어프리 지원에 힘써온 국내의 대표적 박물관으로,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든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중박 입구의 배리어프리 스마트 전시관 서비스
국중박은 국내 최초로 청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수어통역 및 전시해설을 도입했다. 국중박 수어통역 및 전시해설은 예약 신청과 현장 신청이 모두 가능하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수어해설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국중박의 배리어프리를 담당하는 최환 학예연구관은 “일대일로 이뤄지는 수어통역의 특성이 관람객과 박물관 간의 유대감을 형성해 장애인 관람객들이 박물관을 계속 찾게 한다”며 박물관 수어통역·전시해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중박은 시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촉각 전시품도 배치하고 있다. 최환 학예연구관은 “주요 유물에 대한 촉각 전시품을 전시실마다 마련해 유물을 만져보며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국중박은 촉지도, ‘사유의 방’ 전시실의 점자 안내서, 저시력 관람객을 위한 대활자 책자 등의 보조자료를 비치하는 등 전시 공간의 배리어프리 강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사유의 방’의 점자 안내서는 다양한 언어 책자 사이에 놓여 있다.

▲저시력 관람객을 위한 대활자 책자
국중박은 특별전에서도 접근성 강화 시도를 이어갔다. 작년 10월 25일부터 올해 3월 15일까지 열린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의 일부 전시품은 촉각전시품으로 제작됐다. 관람객들은 촉각명화로 제작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루돌프 2세 등 합스부르크 왕가 인물들의 초상화를 손으로 만지는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특별전의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한 설은경 학예연구사는 “어떻게 하면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최대한 같은 전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비장애인 관람객들에게 촉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전시 공간 배리어프리 인식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설 학예연구사는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진지하게 촉각명화를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며 촉각전시품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촉각명화
‘손으로 보는 그림’인 촉각명화는 2016년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에 의해 국내에 도입됐다. 국중박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사용된 촉각명화 역시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작품이다. 촉각명화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한 촉각교재제작팀의 이인애 팀장은 “시각장애인 학생들의 미술 교과 지원을 위해 하나둘 입체 그림을 만든 것이 문화 시설 전시품 제작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촉각명화 제작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먼저 전체적인 윤곽과 원근감을 고려해 회화작품의 구성을 단순화한다. 다음으로 그림 속 사물의 고유한 질감을 살리는 재질을 선택해 작품을 3차원으로 구현하고, 마지막으로 작품이 쉽게 닳지 않도록 후처리를 통해 내구성을 강화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의 촉각명화



촉각명화가 기존 회화와 같은 미학적 체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이인애 팀장은 동일할 경험을 제공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촉각명화의 미학적 가능성에는 긍정적 견해를 내비쳤다. 이 팀장은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는 말이 있듯, 만져보는 그 자체로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찾고 에너지를 얻는다면 미학적 체험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촉각명화이다.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 갤러리 한쪽 벽은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촉각명화가 차지하고 있다. 선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추상화를 어떻게 촉각명화로 제작한 것일까. 이 팀장은 “각 색이 연상시키는 느낌을 찾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붉은색은 고무장갑으로, 노란색은 점자보도블록과 개나리 조화들로, 푸른색은 물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비즈로 표현됐다. 색의 고유한 느낌을 직관적으로 경험하게 한 몬드리안의 의도를 각 색과 연관된 질감으로 재치 있게 살렸다.


이인애 팀장은 “‘문턱 없는’ 환경은 결국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좋은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팀장은 “궁극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배려’라는 말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리어프리가 아닌가 싶다”며 “모두가 동등하게 아름다움을 즐기고 논할 사회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문화 공간에서의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선이 지워질 그 날까지, 베리어프리를 꿈꾸는 이들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