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가 새 코너를 선보입니다. <미련(美練)>, 아름다울 미, 익힐 련. 한자 뜻 그대로 기자들이 익힌 아름다움을 독자와 나눈다는 의미이자, 다른 코너에 싣지 못한 문화 콘텐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짧게 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177호에서는 두 명의 기자가 두 편의 연극을, 두 명의 PD가 한 편의 영화, 그리고 하나의 전시를 소개했습니다.

©「미궁의 설계자」 공식 포스터
연극 「미궁의 설계자」
2023.02.17-2023.02.26, 아르코 대학로 예술극장
윤성은 기자(yseliz0419@snu.ac.kr)
인간의 고통을 위해 설계된 건물이 있다. 국가폭력의 역사가 선명히 새겨진 남영동 대공분실, 건축가 김수근의 건물이다. 「미궁의 설계자」는 다양한 기법과 장치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무대 위에 구현한다. 끌려온 대학생 ‘송경수’의 존엄이, 그 생애의 찬란함이 갇힌 검은 벽돌 건물을.
폭력은 어떻게 그 자체로 공간이 되는가? 무너진 것도 부서진 것도 아닌, 그저 견고히 서 있을 뿐인 건물은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가? 나선형 계단, 좁은 창문, 목욕을 할 수 없는 욕조, 문고리가 없는 문이 있는 방을 치밀하게 설계한 건축가에게 선연한 단죄의 말들을 건넨다.

©《애프터썬》 공식 포스터
영화 《애프터썬》
샬롯 웰스, 2022
박시연 PD(shiyeonkpark@snu.ac.kr)
어른이 되는 것은 무뎌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대부분의 유년기 영화는 ‘무뎌진 기억’에 저항하며 과거를 그대로 재현해 날카로운 감정들을 끄집어낸다. 이 회고적 환상은 무뎌지기 전의 자아, 즉 과거의 ‘나’와의 조우이다. 《애프터썬》은 이 도식을 전복한다. 주인공 소피는 어릴 때 아버지와 떠났던 여행을 회상한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과거의 무딘 시간이, 날카롭고 어두운 감정들로 얼룩진 현재의 기억과 대비를 이룬다. 차분히 가라앉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소피가 발견하는 것은 ‘나’가 아닌 타인, 아버지의 시선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어른 소피는 깨달은 듯하다. 기억의 편린들 속 불가해한 존재로 남아 있던 당신이, 한때는 끝없는 시간 속에서 나를 사랑했었음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공식 포스터
전시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2022.11.01-2023.03.19,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정서원 PD(julianajsw@snu.ac.kr)
의궤(儀軌)는 조선왕조의 정신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자 독창적 기록물이다. 특히 국왕이 열람할 용도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인 ‘외규장각 의궤’는 그 격과 의미가 남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는 의궤의 본질적 가치에 주목한다. 특별전은 의궤의 가치를 ‘예(禮)’에서 찾는다. 의궤는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가치인 예의 가장 모범이 되는 왕실의 세부 의례를 기록한 서적으로 조선의 정신을 대변한다. 아름다운 도색과 상세한 기록 그 이상의 가치가 상실의 시기를 넘어 새롭게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오펀스」 공식 포스터
연극 「오펀스」
2022.11.29-2023.02.26, 아트원씨어터 1관
박선윤 기자(pullman03@snu.ac.kr)
“누군가 힘내라고 격려 해준 적 있니?” 어머니가 죽은 후, 형 ‘트릿’은 동생 ‘필립’을 집 안에 가둬 보호하고 자신은 각종 범죄를 저질러 생계를 책임진다. 어느 날 트릿이 시카고 출신 갱스터 ‘해롤드’를 납치해오며 둘뿐이던 형제의 삶에는 파문이 인다. 형제에게 따스하고도 냉정하게 격려를 건네는 해롤드, 소박한 믿음을 갖고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 필립,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 폭력적일 수밖에 없던 트릿. 세 사람은 서로에게 격려를 건네며 성장한다. 완벽하지 않기에 서로를 격려할 수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극장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에 위로를 심어준다. 바쁘고 건조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어쩌면 격려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