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동준(경제 졸업) yeodj@naver.com
2021년 2월 졸업한 졸업생입니다.
과반 학생회장을 하다가 〈서울대저널〉에서 활동했습니다.
학생사회 및 학내노동 문제를 항상 관심있게 지켜봐왔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 투쟁! 투쟁, 투쟁, 투쟁!”
민중의례에 반드시 들어가는 노래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런 선창으로 시작한다.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뿐 아니라 단과대학생대표자회의(단학대회)에서도, 심지어 새터 등의 행사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2014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민중의례는 서울대 학생사회에 첫발을 디딘 내게 이질감을 줬다. 민중의례의 취지를 알게 된 건 나중이지만 취지를 모르던 내게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대부분의 1학년, 정확히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낯선 노래였기 때문에 따라부르는 사람은 적었다. 그래도 학생운동의 유산으로 학생회의 정치성을 상징하던 이 노래는 남아있었다. 앞으로도 남아있을 줄 알았다.
2023년, 정치성을 뚜렷하게 띠는 단과대 중 하나였던 사회대에서조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더 이상 새터 때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사라진 ‘임을 위한 행진곡’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는 어떤 문제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상실은 학생회의 철저한 탈정치 기조의 상징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 2명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이를 각 단체가 당연하다는 듯 공유하는 건 민주열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끼리 연대하고 있음을 뜻한다. 학생회뿐 아니라 노조, 전교조, 전장연 등은 서로 대표하는 집단은 다르지만 보다 큰 목소리를 위해 서로 뭉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모든 단체가 어깨동무하고 있음을 보이는 상징이던 것이다.
과거 학생회는 그 어느 정치단위보다 민주화에 앞장섰고 각종 정치 현안에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과거에 비해 연대가 당연하다는 시각은 줄어들었지만 당장 내가 입학한 뒤에도 학생회는 철도 민영화 논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세월호 참사 등 학외 사안에 입장을 내는 것은 물론 학생회 깃발을 들고 관련 집회에 적극 참석했다. 하지만 2023년의 서울대 학생사회는 적극적 연대는커녕 그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가르치지 않으며 소극적 연대마저 끊어버린 것이다.
이제 탈정치 기조의 학생회가 문제인지 살펴보자. 거칠게 표현하면 애초에 ‘탈정치화된 학생회’는 성립이 불가능한 형용모순이다. 1단계, 대통령실, 국회, 각 부처의 현안들로부터 눈을 돌리면 탈정치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2단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 환경 등의 거대 의제를 회피하면 탈정치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교내로 시야를 좁혀보자. 3단계, 학내의 교수-학생 간 성폭력 문제, 자체직원 문제 등 교내의 구조적 문제에 눈을 감으면 탈정치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4단계, 학생회비를 걷고, 이를 각 학생 단위에 배분하고 이를 어떻게 집행할지 결정하는 일도 정치이고 본부로부터 더 많은 학생 지원금을 얻어내거나 수강신청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을 위한’ 일도 결국 정치다.
3, 4단계의 정치행위까지 하지 않을 때야만 비로소 진정한 탈정치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학생회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탈정치화된 학생회’는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표현인 셈이다.
아마도 요즘의 학생회가 말하는 ‘탈정치’란 외부사안이 아닌 학내 내부 사안, 즉 3, 4단계의 정치행위만 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공명’, ‘정오’ 두 선본이 학내의 노학 연대에 대해 모두 정도는 다를지언정 ‘학생 우선’ 기조를 내세운 것을 보면 학생을 위한 4단계의 정치행위만 하겠다는 게 최신의 흐름인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4단계의 정치행위만 취사선택하면 그조차도 제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대화와 소통’을 아무리 강조해본들 협상은 본질적으로 힘의 대결이다. 학생이 아닌 다른 집단과의 연대가 없는 학생회는 본부와의 협상에서 압박을 주기 어렵다. 학부 학생사회가 노조, 교수진 등과 연대하지 않는데 그들로부터의 일방적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성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 의제를 다루지 않는 학생회는 학내 소수자 단체들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다. 학내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기 어려운데 학외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본부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학생회는 학외에 존재감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 본부는 ‘잡음’이 나지 않는 학사행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촛불집회를 열며 조국 이슈에 대응했던 (물론 문제에 대한 접근 자체는 평면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총학생회가 있었고 교수-대학원생 간 성폭력 문제에 분개해 학생총회까지 성사해 내는 총학생회가 있었다. 이렇게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움직임을 보이는 학생회가 있는가 하면 정순신 사태에도 침묵을 지키며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학생회가 있다. 본부가 두 학생회 중 어느 학생회의 요구에 압박감을 느낄지는 명백하다.

분명 정치혐오가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각종 정치나 사회 현안을 다루게 되면 과거에 비해 논란에 휩싸이기 쉬워졌다. 때문에 현안에 대한 예민한 접근이 필요해졌다. 학생회가 취하는 입장에 따라 논쟁이 촉발되고 이 토론의 결과로 학생회의 최초 입장을 접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학생회가 왜 입장을 내냐는 반발에 시달릴 가능성도 높다. 허나 이는 학생회가 보다 더 섬세한 내부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사회 각종 현안에 침묵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대표적인 학생 복지 사업인 간식사업조차 여러 단계의 합의가 필요하다. 즉, 정치적 행위라는 뜻이다. 간식사업 무용론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간식을 언제 어떻게 나눠줄지 등도 합의를 해나가야 한다. 정치나 사회 현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안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부딪힐 수 있지만 이를 조율하는 것은 간식사업 집행 과정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간식사업보다 격렬하게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뿐이다.
학생사회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학외 이슈에 대한 입장을 내는 것도 결국 같은 정치 행위다. 학생회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집단이고 학생회의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곧 정치다. 심지어 특정 이슈에 대한 침묵이나 외면을 택하는 것마저 정치적 행위다. 가능하지도 않은 탈정치 기조를 택하느라 학생회의 기능을 스스로 축소하는 우를 범하는 건 제 살 깎아먹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사라진 건 단순해보이지만 생각보다 위험하다. 학생회 기능을 스스로 축소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아무 잡음이 나오지 않는 학생회보다 시끄러운 학생회가 더 많은 일을 하려는 학생회라고 볼 수 있다.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잡음은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대 학생사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부활을 두고 다시 잡음이 이는 날이 오길 바란다. 설령 부활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대찬 논쟁이 벌어진다면 학생회 기능 회복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