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고 싶은 인생, 읽히고 싶은 책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 2023.03.16.~2023.06.11.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중 넘버를 인용한 부분은 이탤릭체로 구분했습니다.

  “다들 정숙! 20XX년 XX월 XX일 오전 9시 30분, 이스라엘 도서관과 에바 호프의 마지막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세계적인 작가 ‘요제프 클라인’이 남긴 숨겨진 원고, 그 내용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 ‘에바 호프’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모를지도 모른다. 30년째 이어진 재판이 마지막 막을 올린다.

원고를 지키는 여자

  여기 한평생 원고를 지켜온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호프. 처음부터 원고가 그녀의 소유였던 것은 아니었다. 원고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한 작가로부터 탄생했다.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썼던 유대인 요제프 클라인, 일명 ‘요제프 K’, 그를 이해해주는 이는 친구이자 유명작가였던 ‘베르트’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떻게 이걸 태워… 빛나잖아.” 읽히지 않는 책은 없는 게 낫다며 자신의 모든 글을 태워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베르트는 지킬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베르트는 친구의 글이 빛날 날을 소망하며 연인이었던 ‘마리’에게 원고를 맡긴다. 그러나 원고를 꼭 찾으러 오겠다던 그는 마리도 원고도 찾지 않았고, 그녀의 딸 호프에게 상속된 원고는 호프가 사랑한 사람들, 호프의 인생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저주받은 유산으로 남는다.

사진 설명 시작. 뮤지컬 「호프」의 2023년 공연 사진이다. 법정 사람들이 호프에 대해 수군대고 있다. 사람들은 법정을 배경으로 손으로 무언가를 적는 시늉을 하며 각자 앉고 서는 자세를 번갈아 가며 취하고 있다. 무대의 조명은 차가운 청색이고 인물들을 비추는 빛은 연한 노란빛이다. 사진 설명 끝.

뮤지컬 「호프」(2023) 호프에 대해 수군대는 법정 사람들 Ⓒ알앤디웍스

  “수십 번의 판결 수십 번의 항소/ 수십억 로열티를 준대도 싫대/ 그 여자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세계적인 작가 요제프 K의 미발표 원고는 모두의 유산이라 주장하는 이스라엘 도서관과 원고는 어머니 마리가 남긴 자신의 유산이라 주장하는 호프. 사람들의 냉랭한 시선에도 그녀는 꿋꿋이 원고를 끌어안는다. 재판 중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상대 변호사에게 소리 지르는 호프를 보며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수군댄다.

  재판 중 호프는 끊임없이 과거를 겹쳐본다. 호프가 바라보는 시간대는 조명으로 구분된다. 밝은 노란빛의 현재와 어두운 빛의 과거. 조명이 어두워질 때마다 재판정의 인물들은 옷을 갈아입고 과거의 인물로 분한다. 재판장은 베르트를, 도서관 측 변호사는 호프의 과거 연인 ‘카델’을, 두 기자는 각각 마리와 ‘과거 호프’를 겸한다. 그들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 과거를 재현하고, 밝은 조명 아래서는 현재의 자리로 돌아간다. 조명이 밝아졌을 때 과거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오직 호프뿐이다. 그런 호프의 뒤를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의인화된 원고 ‘K’가 따른다. 그녀와 자신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신이 내 집이었는데

  호프는 텐트에 거주한다. 텐트는 이동식 임시가옥이다. 한 자리에 묶이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텐트는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햇볕 하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텐트는 마치 어지러운 창고 같다. 창틀은 오래됐다. 문고리는 녹슬었다. 벽지는 색이 바랬고 가구에는 먼지가 쌓였다. 언제든 어디든 이동할 수 있게 정리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뽀얗게 쌓인 먼지가 호프의 텐트가 오랫동안 한곳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호프의 텐트는 불안정한 ‘집’이다. 텐트는 어디까지나 임시가옥, 한번 뿌리를 내리면 쭉 그 자리를 지키는 집과 달리 언제든 접힐 수 있다. 호프는 안정적인 집이 없다. 자유롭게 세상을 향해 떠나지도 온전히 정착하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을 뿐이다.

  작중에서 집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다. 모든 인물은 제각각의 이유로 기댈 대상인 ‘집’을 찾아 헤매고, 잃는다. 때론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베르트의 집은 친구 요제프의 원고를 세상에 알리겠다던 꿈이었다. 허나 그는 전쟁 중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잃고, 홀로 남은 아내의 곁을 지키는 현실을 택한다. 

  마리는 베르트를 기다리며 원고를 그의 분신처럼 지킨다. 피난 트럭에서 딸 호프와 원고가 땅바닥에 굴러떨어지자 마리는 주저하지 않고 원고부터 챙겨 호프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는다. 수용소에서도 마리는 코트 속에 늘 원고를 품고 다닌다. 그러나 딸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베르트는 마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 설명 시작. 뮤지컬 「호프」의 2023년 공연 사진이다. 현재의 호프가 재판장이 서는 단의 한쪽에 걸터앉아 울상인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아래에 유대인 수용소의 인물들이 있다. 오른쪽의 인물은 총 넷으로 과거 호프와 유대인 수용소의 인물들이다. 팔에 찬 완장의 노란색의 별이 그들이 유대인들임을 보인다. 그들은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무대의 가운데에는 마리가 쭈그린 형태로 앉아있다. 그녀는 손에 원고를 쥔 채 정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K가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다. 마리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빛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붉은빛이다. 인물들이 서 있는 곳만 부분적으로 노란빛을 띤다. 흰색 스포트라이트가 호프를 비추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뮤지컬 「호프」(2023)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호프 Ⓒ알앤디웍스

  비록 원고에 밀려 외면받았지만 어린 호프에게 집은 어머니 마리였다. 마리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려 애쓰던 호프, 문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빼앗기던 수용소에서 그녀는 마리의 코트 속이 수색받을 위기에 처하자 “엄마랑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라고 외치곤 봉기를 준비하던 동료 유대인들을 고발해버리기까지 한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집을 되찾기를 갈구한다. 넘버 ‘나의 집’에서 베르트, 마리, 과거 호프는 입 모아 “내가 돌아갈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해 노래한다. 베르트는 자신이 머물기로 한 현실이 진정한 집이 아님을 안다. 그는 “돌아가고 싶어 나의 집으로”라 외치며 상실한 꿈을 그리워한다. 마리는 베르트를 바라보며 “모두 당신인데 돌아와 줘 제발”이라 애원한다. 과거 호프는 자신은 바라보지 않는 마리에게 “당신이 나의 집이었는데 돌아갈 곳이 없어”라 울부짖는다. 그러나 세 사람의 목소리는 그들이 집을 찾을 수 없을 것을 암시하듯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흩어진다.

  전쟁이 끝나고, 호프는 구원처럼 찾아온 카델에게서 기댈 수 있는 새로운 집을 찾으려 한다. 전쟁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남자, 카델은 전쟁 같은 세상에 서로의 희망이 되어주자고 호프에게 속삭인다. 원고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시궁창 같은 텐트’ 대신 둘만의 집을 짓고, 그리로 돌아가자는 카델의 종용에 호프는 경매를 주최하는 이들이 독일인들인 것조차 외면하며 마리로부터 원고의 절반을 빼앗아 경매에 내놓는다. 그러나 결과는 카델의 배신이다. 원고를 판 돈을 모두 들고 떠나려는 카델에게 호프는 자신을 이 시궁창에서 꺼내달라며 절규한다. 그런 그녀에게 카델은 돈 몇 푼과 자신의 총을 건네고 “앞으론 제발 아무도 믿지 마”라는 말을 남긴 채 매몰차게 떠난다. 집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산되고, 호프는 집 없이 방랑한다.

읽히지 않은, 읽히지 못한 이들

  “이 원고가 나야, 나라고!” 어느새 남은 게 원고뿐인 호프가 외친다. 호프와 K, 둘은 모두 ‘읽히지 않은’ 존재다. 원고는 인쇄하거나 발표하기 위해 쓴 글, 다시 말해 K는 세상에 난 본질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존재다. 베르트가 출판을 밀어붙여 세상에 나왔지만 외면당하는 자신의 글을 보며 요제프 K는 씁쓸히 “읽히지 않는 책은 없는 게 나아”라고 중얼거린다. 원고에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넘버 ‘요제프 K’에서 K는 자신에 대해 “그 책은 이름이 없다/ 절망의 거울일 뿐/ 쥘 수 없던 모든 게/ 그 책의 이름이었다”라 노래한다.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아 작가의 성을 따 K라 불린 원고, 그는 책이 돼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사진 설명 시작. 뮤지컬 「호프」의 2023년 공연 사진이다. 마리가 의자에 앉은 채 K에게 기대고 있다. 손에 원고를 쥔 상태다. K는 일어선 상태로 한 손으로 마리의 어깨를 잡고 있다. 두 인물의 표정은 모두 굳어 있다. 사진 설명 끝.

뮤지컬 「호프」(2023) K에게 기대고 있는 마리 Ⓒ알앤디웍스

  요제프 K가 사후 명성을 얻어 그의 작품에 대중들이 열광하게 된 후에도 원고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계속해서 저지된다. 극 중에서 원고는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숨겨지고 덮인다. 원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된 마리는 수용소에서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코트로 원고를 숨긴다. 심지어 원고를 유서와 함께 호프에게 남기는 그 순간에도 마리는 원고를 코트로 덮어 가린다. 호프의 소유가 된 후에도 원고는 그녀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계속 숨겨진다.

  호프 역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존재다. 원고와 차이점이 있다면 호프는 스스로에 의해 가려진 존재라는 점이다. 호프가 거주하고 있는 텐트는 원고를 감싼 마리의 코트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텐트라는 공간에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텐트를 열고 나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카델과 손잡고 경매장에 원고를 내놓으려 했을 때 카델을 향해,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려 했었다. 그러나 세상으로의 걸음은 실패로 돌아갔고, 호프는 마리처럼 코트 속에 원고를 품고 세상을 향한 문을 완전히 닫는다. 

  넘버 ‘유산’에서 원고만 남은 자신의 처지에 호프는 K를 보며 자조한다. “이제 뺏길 남자가 없어/ 네가 뺏어갈 엄마도 없어/ 아무도 아무것도 가진 게 난 없어/ 남은 게 너밖에 없어” 품에 남은 것이 원고밖에 없었기에, 호프는 더더욱 원고에 매달린다. 그렇게 그들은 읽히지 않은 채 서로에게 ‘떠나고 싶은 것이자 떠나지 못하는 것’으로 오랜 세월 겨울과 같은 시간에 남았다.

항상 함께, 그러나 영원히는 안 될 

  K와 호프의 동행, 그 시작은 오랜 방황 끝에 텐트에 돌아온 호프가 마리의 코트를 걸치던 순간이었다. 호프가 K를 마주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원고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이제부터 거기가 네 자리”라 일갈하는 것이었다. 그런 호프에게 K가 건넨 엄마의 유언장 첫 문장은 ‘우리에게 남은 건 원고밖에 없어, 호프.’ 호프는 “왜 내가 아니라 항상 너냐고”라며 분노한다.

  호프의 곁에는 항상 K가 있다. K는 ‘쫑알거리는 녀석’이다. 호프는 우산을 휘두르며 쉴 새 없이 자신의 곁에서 떠들고 잔소리하는 K를 쫓으려 한다. 하지만 K는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녀석’이다. 남은 것이 그밖에 없다. 항상 호프의 자리를 빼앗아 왔지만, K는 호프의 유일한 동반자다. 피난 버스에서 마리에 의해 호프의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마지막 재판을 위해 재판정에 선 오늘까지 항상 호프와 함께였다.

  K는 유일한 호프의 편이다. 호프의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재판정의 사람들과 달리, K는 호프를 위해 이스라엘 도서관 측 변호사에게 소리치기도, 유대인 수용소 시절의 과거를 바라보며 우는 호프를 토닥이기도 한다. 호프는 K의 품에 안겨 울곤 한다. 그런 호프가 K는 안쓰럽다. 읽히지 않은 원고인 K는 읽히지 않은 호프의 인생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다. 현재의 호프가 되기까지 그녀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자신을 미워한다면서도 왜 떠나보내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K는 호프가 자신을 떠나야 함을 안다. 정확히는 호프와 자신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호프는 그녀 자신의 인생을 향해, K 자신은 책이 되어 만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법정에 가기 싫어하는 호프를 보며 K는 “재판 포기했다며. 그럼 진 거잖아. 그럼 이제 나도 떠나야지”하며 부러 호프의 텐트 내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가구들에 인사를 건넨다. “안녕 삐거덕대는 의자/ 안녕 먼지 쌓인 테이블/ 한동안 꺼져 있던 TV도 안녕 안녕” 그의 장난스런 빈정거림에 툴툴대며 마침내 집 밖으로 나서는 호프에게 코트를 입히며, K는 몰래 다짐한다. “도와줄게. 당신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내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사진 설명 시작. 무대 조명은 어두운 빨간색으로 가운데를 청색 빛이 비추고 있다. 그 빛을 가운데 두고 호프와 K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다. 무대 양쪽에 과거의 인물들이 재판정의 각 단마다 서 있다. 그들의 시선은 호프를 향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뮤지컬 「호프」(2023) 호프를 일제히 비판하는 과거의 인물들 Ⓒ알앤디웍스

책장을 열고 각자의 집으로

  호프가 자신을 떠나보내고 그녀만의 인생을 찾도록 K는 아픈 과거에 스스로를 매어두는 호프를 일깨운다. 마지막 판결 전 휴정, 모두가 퇴장한 법정에 호프와 K만이 남고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K는 묻는다. “당신은 왜 그렇게 춥고 외로운 표정으로 과거에, 그 텐트에 자신을 가두고 사는 거야?” 순간 과거의 인물들이 호프의 곁에 다가와 그녀의 행적을 비판한다. 마리와 호프 대신 고발당한 유대인 수용소의 동료들, 경매장에서 독일인에게 원고를 팔아넘겼던 그녀를 비판하는 카델, 총을 겨누고 도망치듯 떠나버리는 바람에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와 과거 호프 자신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늘 떠돌던 호프를 향해 K는 자신의 원고지 속에 담긴 인물 ‘나그네’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그네 말이야, 사실은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었어. 근데 돌아갈 수 없었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자신이 밉고 화가 나고 벌레같이 혐오스러웠거든.” K는 호프의 방랑과 고통이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스스로를 가둬왔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K는 노래한다. “이건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책/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인생/ 너 때문에 세상에서 지워진/ 너와 나의 이야기라고”. 

  ‘너 때문에 지워진 너의 이야기’, 호프는 자신과 K를 평생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도록 막아온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호프는 이제 자신이 틀렸음을 안다. 동시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내 나이가 이제 일흔여덟이야. 틀린 줄 알아. 근데 틀려도 익숙한 것을 찾을 때야.”

사진 설명 시작. 뮤지컬 「호프」의 2023년 공연 사진이다. 호프가 한 손에 원고를 쥐고 다른 손에 라이터를 든 채 원고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단 위의 재판장은 깜짝 놀란 표정이다. K는 호프의 앞에 서 은은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조명은 따뜻한 노란빛이다. 사진 설명 끝.

뮤지컬 「호프」(2023) 원고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는 호프 Ⓒ알앤디웍스

  최종 판결을 앞두고 호프는 원고를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이스라엘 도서관 변호사는 코웃음 친다. “자기 자신이라면서요. 화났다고 제 팔다리 자르는 사람 봤어요?” 호프는 머뭇거린다. 그때 K가 라이터에 자신의 몸을 갖다 댄다. 마치 그렇게라도 자신을, 호프를 해방시키려는 듯하다.

  삽시간에 생기는 연기에 간신히 K를 떼놓고 호프는 울먹인다. “뭐라도 붙들고 나 좀, 나 좀 제발 살자!” 호프가 진정 꿈꿨던 것은 삶. 허나 호프는 ‘뭐라고 붙들어야만’ 살 수 있다고 믿어왔다. 오랜 세월 그녀가 붙들어온 K가 속삭인다. “자신을 더 읽어 봐.” 

  K는 호프를 원고의 소유권을 둘러싼 현실의 재판에서 그녀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재판으로 이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조명 아래 법정의 사람들이 다시 한 명씩 과거의 인물이 돼 호프 곁에 선다. 베르트, 마리, 수용소의 동료들, 카델 그리고 과거 호프. 호프는 죄책감에 떠는 대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베르트에게는 “안녕 미웠던 아저씨”, 카델에게는 “안녕 아팠던 사람”, 마리에게는 “안녕 우리 엄마”라고. K가 그녀를 재판정으로 보내며 흥얼거리던 말, ‘안녕’을 말한다. 그리고 가려져 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해 “나조차 관심 갖지 않고/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아/ 저 혼자 낡아버린/ 오랜 날 혼자였던 호프도”라 인사한다. 

  안녕(安寧)은 편안할 안(安)과 편안할 녕(寧)으로 이뤄진 단어다. 즉, 안녕이란 평안함을 비는 행위다. 과거를 마주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인물들과 자신의 평안을 빌 수 있을 만큼 성장한 호프는 그간 죄책감과 아픔에 눌려 바라보지 못했던 하늘을 바라본다. 그녀의 옆에는 삶의 한순간들을 차지했던 인물들이 서 있다. 그들에게, 또 스스로에게 안녕을 외치며 호프는 인생을 돌려받았다.

  호프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난 에바 호프”라 당당히 외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과거의 날들에 안녕을 고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안녕을 빌며 원고를 내려놓은 채, 호프는 떨리는 발걸음을 내디딘다. 마침내 의지할 대상 없이 처음으로 그녀 스스로 섰다. 점차 발걸음은 빠르고 경쾌해진다. 비로소 그녀 스스로 마련해낸 평안함으로, 집으로 향한다. 재판정을 떠난 호프와 재판정에 남은 K, 그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게 된 나그네, 호프의 평안을 빌며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재판의 막은 내렸다. 하지만 이야기는 비로소 쓰이기 시작한다. 내린 막을 뒤로하고 길을 잃었던 나그네와 책이 되지 못했던 원고는 각자의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스스로 지을 인생이란 집으로, 책이 되어 만날 넓은 세상으로, 각자의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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