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날리는 옷자락 뒤의 그늘진 자리

독립출판 프로젝트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 팀에게 패션 업계 노동을 묻다

 명품 브랜드나 유명 아티스트의 화보가 담긴 패션 매거진을 보다 보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화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바쁘고 치열하지만 어딘가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색색의 조명, 감각적인 구도, 세련된 옷가지와 모델. 유행의 선두를 이끄는 패션 매거진 업계의 특성이 이런 이미지에 힘을 보탠다. 무대 뒤 정신없이 분주한 모습조차 결과물을 위한 아름다운 과정으로 남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현실은 늘 영화와 다르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사람들이 있다. 촉박한 일정 속에 밤 지새우며 촬영을 준비하고, 제값도 못 받고 사비까지 써가며 일하는 사람들. 화려한 옷을 입은 신데렐라의 뒤에는, 무도회 시작 직전까지 실을 꿰매며 옷을 마감하고 유리구두를 가져다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요정 같은 이들이 있다. 바로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일은 결코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했나. 아름다운 화보 뒤편에 정작 아름다움을 만드는 이들의 자리가 아름답지 않음은 서글픈 일이다. 가장 미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산업에서 누군가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적은 임금, 불규칙한 출퇴근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불미’스럽게 일하고 있다. 애정을 담아 일했던 패션 매거진 업계의 씁쓸한 단면을 고발한 독립출판 도서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 프로젝트팀을 만나 패션 업계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물었다.

사진 설명 시작.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의 책 표지다. 제목 아래에 화난 채 발언하는 이모지의 도상이 그려져 있다. 사진 설명 끝.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 팀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 프로젝트와 팀 소개를 부탁한다.

 ‘패션’이라는 큰 산업에서 어시스턴트 근무 경험이 있는 여성들로 구성된 팀이다. 책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의 화자 ‘김점순’은 이들을 대표하는 가상 인물이다. 팀원 중 여전히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현실에서 특정 인물을 연상할 수 없도록 가상 인물 김점순을 내세웠다.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조금은 낯선 직업이다. 표면상으로는 어시스턴트가 하는 일이란 에디터가 매거진으로부터 배당받은 기사와 화보를 꾸리는 과정에서 그를 보조하고 돕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어시스턴트의 업무에는 사실상 매거진 촬영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당한다. 촬영을 위한 옷, 화장품, 소품을 정리하는 것부터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 식사 준비, 촬영장 정리, 쓰레기 버리기, 촬영 제품 반납 등 잡다한 업무까지 포함한다. 야외 촬영이나 영상 촬영 등 촬영의 성격에 따른 고려사항을 챙기는 것도 어시스턴트의 몫이다. 예를 들어, 겨울 야외 촬영의 경우 스태프가 사용할 담요와 핫팩을 구매하고, 휴대용 온열 기구를 챙기는 것까지도 어시스턴트가 한다. 그 외에도 에디터나 직속 선배가 시키는 일이라면 모두 어시스턴트의 업무라고 볼 수 있다. 업무가 ‘패션’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사진 설명 시작. 좌측에는 협찬 받은 구두 세 켤레가 상자에 담긴 채 보관되어 있는 사진이 배치되어 있다. 우측에는 촬영장 근처 공간에 관련 소품과 의상이 잔뜩 널려 있는 사진이다. 사진 설명 끝.

촬영 현장. 좌측은 협찬받은 제품을 촬영장 한 켠에 늘어놓은 것이고, 우측은 외부 촬영을 위해 필요한 의상을 모두 모아둔 것이다. 방대한 규모의 제품을 옮기는 일뿐 아니라 하자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일도 어시스턴트의 몫이다.

“매달 1일부터 15일까지는 다음 호를 위한 촬영 및 마감기간이다. 이 말인즉슨, 1일부터 15일까지 주말 포함 꼼짝없이 회사에 내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것.”

“8월 21일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와 꼬박 일하고 8월 22일 새벽 5시에 촬영장을 나왔다. 22시간이라니 신기록 갱신이네. (중략) 놀라운 건 아침 10시 촬영이 있어 집에 가서 씻고 다시 나와야 한다는 사실.”

책 속의 구절들만 봐도 업무량이 상당해 보인다. 구체적인 근무 조건이나 양상이 궁금하다.

 고용형태는 파견직, 계약직, 정규직 등 다양하다. 패션과 잡지에 관심과 동경을 가져왔던 사람들이 각 매체의 공식 SNS 계정에 올라오는 채용공고, 구인구직 사이트, 지인 소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어시스턴트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어시스턴트는 처우가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계약직 어시스턴트와 별다를 바 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근무 시간은 보통 9~18시 혹은 10~19시로 계약하고 있으나 잘 지켜지지 않는다. 촬영 및 마감 기간에는 선배들이 출근하라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라는 시간에 퇴근한다. 불합리하지만 업계 내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촬영장에서 할 일을 마치고 선배에게 먼저 퇴근해 보겠다는 의사를 비치면, 소위 ‘요즘 애들’이냐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꼬박 48시간을 일한 경험도 있다.

 임금은 대개 최저시급으로 책정되며, 야근 수당 등 추가 수당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잦다. 팀 전체에 인센티브가 지급될 때도 어시스턴트는 받지 못한다. 오히려 돈을 쓰면서 일하기도 한다. 소품 준비를 위해 종종 동대문 시장 등 현금 결제만 가능한 사업장을 이용할 때가 있는데, 증빙 과정이 번거로워 사비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비를 절감하라는 눈치를 받은 적도 있어 이동 시에 사비를 종종 쓴다. 일하는 내내 매우 바쁘고 피곤하다 보니, 필요한 지출에 대해 절차를 거쳐 회사에 요구하기도 어려워 ‘그냥 내가 결제하고 말지’ 생각하게 된다.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사비를 쓰면서 일한 거다. 

장인-도제식처럼 일정 기간 어시스턴트로 일해야 에디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에디터와 어시스턴트 사이의 구조가 궁금하다. 

 패션 매거진 에디터 공채는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작은 매체에서부터 경력을 쌓은 에디터가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에디터로 채용 되는 식이다. 어시스턴트로 일해왔다고 해서 그 매체의 에디터가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에디터 중엔 어시스턴트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에디터가 되기 위해 어시스턴트를 하는 것이 필수는 아닌 셈이다. 공채 등 공식적으로 에디터로 채용될 길이 없으니, 지인이 없다면 어시스턴트로 경력을 쌓으며 미래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책에 “외부에서 봤을 땐 ‘나이스’한 이미지였지만 사내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 예민하고 보수적이었다”는 구절이 있다. 패션 매거진 업계의 세련된 이미지로 인해 근무 분위기도 수평적일 것이란 인상을 주는데. 실제는 어떤가. 

 언급한 것처럼 대개 정규직 에디터의 일을 비정규직인 어시스턴트가 돕는 형태라, 업무 분담 자체가 무척 수직적이다. 사내문화도 그에 따라 경직돼 있는 편이다. 같은 회사나 팀에 소속돼 있지 않더라도 경력에 따라 엄격하게 ‘선후배 호칭문화’를 지킨다. 직속 선배의 손님이 회사에 방문하면 모시러 가는 등, 따로 업무가 없을 때도 선배의 사적 업무를 돕는 게 불문율이다. 아무도 “밥은 어시스턴트가 시키는 거야”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아도 늘 어시스턴트가 모두의 식사를 챙기는데, 그런 상황들에서 위계적인 분위기를 체감하곤 했다. 어떤 선배 에디터에게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고맙습니다’라고 했다가 지적받은 적도 있다. 애초에 에디터들이 어시스턴트를 ‘동료’로,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나가는 스태프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설명 시작.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 책의 일부 페이지다. 좌측엔

어시스턴트 노동환경을 재구성한 대화 화면

책 곳곳에는 ‘선배의 독촉 전화’, ‘눈치 주기’, ‘스트레스’ 등 근무환경 내 정신적 피로도가 높음을 추측하게 하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난청을 진단받거나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해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살게 됐다는 사례도 제시된다. 마감 기간이면 열흘 넘게 수십 개를 촬영하고 야근하는 업무 구조라는 설명도 있다. 이렇게 고생한 후에도 잡지 크레딧에 이름이 적히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무엇이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을 만들게 된 것일까. 

 근무 분위기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꼬집어 말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한 권의 화보집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야 하는 잡지 발간의 구조 자체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촉박한 과정과 조건에서 모든 인력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기엔 비용의 문제가 있으니 어시스턴트 제도를 도입했을 테고, 이러한 고용 방식이 에디터-어시스턴트 간 불평등한 관계를 당연시하는 관행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행을 거부한 이도 분명 있었겠지만, 소수의 개인적인 실천만으로는 업계 전반에 변화를 꾀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고착화됐다. 

고용노동부 등 관할 기관을 통한 구제는 어려운가. 

 싸울 힘이 없다. 개인 한 명이 이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 싸우려면 시간, 돈, 힘이 있어야 하는데 어시스턴트는 그중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개인 한 명이 고발해서 해결될 문제 규모도 아니라 생각한다. 실제로 어느 매거진에서 어시스턴트 후배가 선배를 고발한 적이 있는데, 겪은 부당 대우가 심각했으나 겨우 부서 이동으로 마무리됐다고 알고 있다. 어시스턴트가 퇴사 의사를 내비치면 ‘ *레퍼런스 체크’를 운운하며 압박하기도 한다. 좁은 업계에서 고발 후의 위험이 꽤 무섭고 현실적인 협박으로 다가온다. 

* 이직자를 대상으로 한 평판 조회를 일컫는 용어다.

여전히 ‘김점순’ 팀에는 패션 매거진 업계에서 어시스턴트로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퇴사를 하더라도 오랫동안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는 듯한데. 부당한 업계 관행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있을까.

 《문명특급》 MC인 재재 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저주받은 책임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크게 공감했다. 당시에는 업계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나약한 건가?’라는 자기검열을 수없이 했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마음도 컸다. ‘이렇게 고생하더라도 언젠가는 에디터가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도 있었다. 견디면서도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들이 우리를 그곳에 계속 남게 했던 것 같다. 

끝내 업계를 고발하게 된 이유는.

 사실 어시스턴트 동료들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떠나더라도 여전히 이 업계를 동경하고 꿈꾸는 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우리 자신들도 업계에 발 들이기 전까진 어시스턴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돈은 얼마나 받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에디터가 된다는 보장은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미리 알고 선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패션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의 고민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억압 속에서 자란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일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여성에겐 특히 그렇다고 느낀다.

 또 다른 이유는 패션 업계가 청년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그 어떤 자성의 인식도 없다는 점에 대한 분노였다. 어시스턴트를 오래 한다고 해서 에디터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해진 수습 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비정규의 상태로 버티는 것이다. 버티는 과정에서 ‘일다운 일’을 할 수도 없다. 어시스턴트에게 작은 기사를 배당하는 매거진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잡다한 업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을 영원히 하는 기분이었다. 이력서에 쓸 수도 없는 ‘물경력’만 늘어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일했다.

 업계의 폐쇄성을 고려해 익명의 독립출판 형식으로 이런 문제들을 고발하게 됐다. 고발 과정에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그저 개인이 겪었던 경험으로 축소되지 않고, 업계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여겨지도록 특히 신경 썼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 앞으로의 행보도 궁금하다. 

 고발 이후 패션 업계 진로를 희망하는 분들의 문의가 많았다. 『패션 매거진 어시스턴트 김점순』에 대한 관심은 감사했지만, 이런 열악한 조건을 알고서도 여전히 패션 매거진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에 씁쓸하기도 했다.

 익명으로 활동해야 하므로 갖은 제약이 많아 ‘김점순’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이 책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이 업계를 떠나고, 우리를 괴롭게 했던 선배들이 일을 그만둘 때쯤이면 ‘이 책은 사실 우리의 이야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한때 애정을 담아 일했던 패션 매거진 업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나.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다면.

 잡지가 사양산업이라고 불린지도 오래됐지만, 패션 브랜드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것을 찍는 매거진도 건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시스턴트 제도가 사라지면 좋겠다. 동료들이 안정적인 근로조건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다운 일을 하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려, 업계에서 색출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어시스턴트 동료들에게 애정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언젠가 더 나은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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