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벨만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필버그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그닥이라고 생각한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 영감을 빌려왔다. 사람은 대체로 생각이 없으면 자기 내면으로 도망치기 마련이다.”
장-뤽 고다르는 생전 스필버그에 대한 악평을 쏟아냈다. 한평생 할리우드에 날을 세워온 ‘예술영화의 아버지’에게 ‘21세기 블록버스터의 아버지’ 스필버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석권한 《쉰들러 리스트》조차 고다르의 비판을 피해 가지 못했다. 홀로코스트의 사실적 묘사로 스필버그를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에 대해, 고다르는 감독이 소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으로 도망쳤다’고 일갈했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모든 영화가 ‘나’의 유아(唯我)적인 세계, 누구나 소화하기 쉬운 이분법적 선악 구도와 성 고정관념에 의존한 이미지들, 요컨대 ‘누구나 아는 그 맛’으로 귀결된다는 비판이다.
지난 3월,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파벨만스》가 개봉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흔치 않은 ‘영화에 대한 영화’다. 모든 ‘영화에 대한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다면, 스필버그의 메타영화는 고다르의 비판에 화답이라도 하듯 자전적 가족영화, 즉 ‘나’의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 팔순이 넘은 노감독은 기꺼이 관객들을 가장 내밀한 세계로 초대해 자신의 영화관(觀)을 펼쳐놓는다. 이는 ‘누구나 아는 그 맛’에 대한 오마주이자 변론이기도 하다.
영화, 통제된 세계

《파벨만스》 속 스필버그의 페르소나인 주인공 ‘샘 파벨만’에게, 영화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부모님과 함께 본 영화 속 기차 충돌 장면에 놀란 어린 샘은 집으로 돌아와 장난감 기차를 끊임없이 충돌시킨다. 영화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스스로 재현함으로써 무서운 경험에 대한 ‘통제의 감각’을 얻기 위해서다. 《파벨만스》의 첫 장면에서부터, 감독은 불가해한 현실에 질서를 부여해 재현하는 픽션의 고전적인 기능을 넌지시 부각한다.
이 ‘통제의 감각’은 샘의 유년기를 관통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샘은 친구들과 영화를 찍는다. 촬영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동급생들을 호령하고, 상영관에서 모두를 웃고 울게 하며 그는 제법 영화감독 태를 갖춰간다. ‘영화에 대한 영화’보다는 가족영화에 가까운 메타영화 《파벨만스》에서, 그나마 부각되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은 물질성이다. 샘에게 영화는 추상적 환상의 매개이기 이전에 손에 잡히는 사진이요, 필름 타래다. 스필버그는 필름을 자르고 붙이고 영사기에 연결하는 샘의 손을 집요하게 비춘다. 소년이 두 손으로 직접 필름을 이어 창조한 세계, 그리하여 관객들의 환호와 놀람, 분노까지도 완벽히 통제된 세계, 그것이 곧 샘의 영화 세계다.
또래들과의 유희에 불과했던 영화는 어느새 샘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도피처이자 구원이 된다. 어머니의 외도를 짐작한 그는 와해하는 가정으로부터 영화로 기꺼이 도망친다. 부모님이 가족들을 거실에 모아 놓고 이혼을 선언하는 장면에서, 샘은 불현듯 카메라를 들고 가족들을 촬영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 마치 어린 시절 기차 충돌을 재현했을 때처럼, 카메라의 렌즈를 거쳐 본다면 가족이 돌이킬 수 없이 와해하는 순간의 괴로움도 줄어드리라는 듯이. 친구들과 만든 전쟁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통제 가능한 영화라는 세계로의 《도피할 수 없는 탈출(Escape to Nowhere)》을 꿈꾼다.
어른이 되어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던 샘은 마침내 존경해 마지않던 감독 ‘존 포드’를 만난다. 포드는 그에게 대뜸 일갈한다. “그래, 영화감독(Picture maker)이 되고 싶다고?” 어린 샘에게 그러했듯, 포드에게도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감독(Director)’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붙기 이전에 ‘활동사진(Picture)을 만드는 사람’, 즉 일종의 수공업자다. 그는 영화감독보다는 도공에게 더 어울리는 조언을 내뱉으며 샘을 사무실에서 쫓아낸다. “기억해라. 지평선이 화면 위쪽에 있으면 흥미롭고, 아래쪽에 있으면 흥미롭고, 한가운데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다!” 계시와도 같은 포드의 말은 스필버그, 나아가 할리우드 장르영화 감독들의 창작관을 집약한다. 지평선의 위치, 카메라 앵글, 컷의 순서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의 치밀한 조작으로 관객들의 마음속에 계산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파벨만스》에서 이 ‘조작’의 힘은, 세상을 알아가고 인생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어린 소년의 성장 과정과 맞물려 삶 그 자체와 공명하는 보편적인 경험으로 변모한다.
필름이 포착한 진실
《파벨만스》는 픽션을 잘 통제된 세계로만 상정하지는 않는다. 샘은 필름을 자르고 붙일 수는 있어도, 그 위에 현상된 고통스러운 진실까지 외면하지는 못한다. 뛰어난 컴퓨터 기술자인 아버지 ‘버트’,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으나 꿈을 포기하고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어머니 ‘미치’로 이뤄진 샘의 가정은, 미치가 아버지의 재기발랄한 친구 ‘베니’에 이끌리며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소년이 어머니 미치의 외도를 발견한 것은 가족들을 위한 캠핑 영상을 만들면서였다. 베니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무에 달라붙어 장난치고, 모두가 한눈을 판 사이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미치. 남편의 이직으로 인한 이사로 베니와 헤어지고, 휘황찬란한 새집에서 홀로 울 것 같은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미치. 화면 속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은 아들 샘에게는 잔혹한 광경일지언정 너무도 아름답다.

어머니의 욕망과 체념이 필름으로써만 포착되고 표상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파벨만스》에서, 샘이 미치를 촬영하는 장면에는 ‘영화’라는 필터가 이중으로 개입한다. 첫째는 샘의 어머니 미치가 아들이 촬영한 필름에 담긴다는 것, 둘째는 스필버그의 어머니 레아 포스너가 미셸 윌리엄스라는 할리우드 대배우의 몸을 빌려 《파벨만스》라는 영화 속에 현현해 있다는 것. 두 겹으로 ‘영화화된’ 그녀의 욕망은 16mm 필름의 거친 화질로, 샘과 스필버그의 집요할 정도의 클로즈업으로, 필름 되감기로, 슬로모션으로 새로운 생명을 획득한다. 이미지의 힘은 강력하다. 뻔하디 뻔하며 누구나 알고 있는 편집의 기교들을 통해 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미치, 혹은 레아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영화 속 섬세한 여주인공으로 변모한다.
영화를 만드는 샘은 가족 중 유일하게 미치의 진실을 목격하고 이를 함구한다. 다른 가족들은 끝끝내 미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님이 이혼을 선언하자 여동생 ‘레지’는 샘에게 말한다. “사실 엄마도 쉽지 않았을 거야. 아빠 같은 천재와 결혼했잖아. 뭘 해도 아빠보다는 못할 수밖에 없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어.” 샘은 동생의 말을 구태여 바로잡지 않지만, 샘의 다큐 속 미치를 본 그와 관객들은 레지가 간과한 진실을 알고 있다. 세계 최고의 연주자가 될 수도 있었던 그녀는 남편에 대한 열등감 따위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단지 그녀의 재기발랄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봐줄 사람, 그녀가 주인공인 서사를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했음을.
카메라의 ‘눈속임’은 역설적으로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자신만의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미치의 내밀한 ‘진실’을 폭로한다. 샘은 통제 가능한 세계의 토대였던 필름을 매개로 오히려 통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과 직면한다. 16mm 필름에 포착된 미치와 그녀의 영화적 이미지들은, 어떤 진실은 가장 뻔한 픽션의 필터를 거쳐야만 비로소 발화되고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아는 그 맛’을 위한 변론
샘의 영화는 간과된 현실을 투영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바꾸기에 이른다. 전학 간 학교에서 샘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의 표적이 된다. 고된 고등학교 생활 끝에 졸업 기념 영상 촬영을 맡게 된 샘은,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의 유명인 ‘로건’을 영웅처럼 그려내 단순한 행사 기념 영상을 제법 흥미진진한 ‘영화’로 탈바꿈시킨다. 졸업식 당일 모두가 샘의 작품에 환호하는 가운데 딱 한 사람만이 지독한 혼란에 빠진다. 다름 아닌 영웅의 역할을 부여받은 로건 자신이다.
자신을 영웅처럼 그려낸 이유를 따지는 로건에게 샘은 “내 영화가 더 좋아 보였으면 했나 보지”라고 대꾸한다. 샘이 보기에 큰 키에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운동부 에이스 로건은 ‘좋은 영화’에 꼭 필요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로건은 절규한다. 자신은 결코 샘이 영화 속에서 그려낸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로우앵글 샷, 박진감 넘치는 음악, 젊고 아름다운 얼굴에의 클로즈업 등, 로건은 ‘누구나 아는 그 맛’으로 한껏 부풀려진 스크린 속 자기 모습에 압도당한다. 샘이 다큐에 덧댄 ‘허구적인’ 영웅의 이미지는 현실의 깡패를 은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완전히 굴복시킨 셈이다.

스필버그 영화들의 상당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영화적 이미지와 서사의 문법은 ‘누구나 아는 그 맛’으로 평가 절하될지언정 어느새 현실을 압도하는 힘을 획득했다. 스필버그는 바로 그 유구한 문법으로 20세기 말부터 꾸준히 가장 현재적인 이야기를 들려줘 왔다. 비록 그 방식은 다소간 유치하고, 진부하고, 때로 지나치게 이분법적일지언정 그는 ‘누구나 아는 그 맛’으로 근현대 사회의 가장 막강해 보이는 힘들–파시스트와 인종주의자들(《쉰들러 리스트》(1994)), 안전불감증의 정치인(《죠스》(1978)), 과학에 대한 맹신(《쥬라기 공원》(1993)) 등-을 무릎 꿇렸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가장 익숙한 감각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의 낯선 현실들을 대면하게 했다.
다시 고다르의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홀로코스트와 같은 무거운 소재에는 다른 영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정당하다. 어떤 사건을 스펙터클의 언어로 표상하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관객들의 인식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시도다. 이미지의 힘에 대한 재귀적 성찰이 요구되는 우리 시대에는, 스필버그와 같은 할리우드 감독들이 체화한 문법을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 문법이 지니는 불가해한 현실을 해독하고, 이질적인 욕망들을 직면하고, 어떤 목적으로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파벨만스》는 TV와 인터넷 시대를 헤치고 살아남은 영화감독이 만든 그 자신이 평생을 바친 ‘힘 있는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다. 그 힘을 앞으로 어떻게 비판하고 사용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이다. 그전까지는 모두의 유년기를 적신 스필버그의 세계에 한 번쯤 다시 흠뻑 빠져봐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