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 포스터와 <리턴 투 서울>의 포스터이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포스터에는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 소영과 동현의 모습이 담겨 있다. <리턴 투 서울>의 포스터에는 서울의 거리를 걷는 프레디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설명 끝.” width=”1200″ height=”1200″ style=”vertical-align:middle;” />
▲《라이스보이 슬립스》 포스터(왼쪽), 《리턴 투 서울》 포스터(오른쪽)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리턴 투 서울》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영화 두 편이 개봉했다. 캐나다 이민자의 삶을 다룬 《라이스보이 슬립스(Riceboy Sleeps)》와 프랑스 입양인을 주인공으로 한 《리턴 투 서울(Retour à Séoul)》이다. 한국을 떠난 인물들은 다시 한국에 사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만, 두 영화에서 각각이 그리는 귀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두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같은 곳에 도착하는 영화라는 점을 알게 된다.
소영과 동현의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이민자 서사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미혼모 ‘소영’과 그의 아들 ‘동현’이다. 소영은 공장에 취직해 성실하게 일하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에 굴하지 않으며 낯선 사회에서 정착하기 위해 분투한다. 동현 또한 문화적 차이와 차별을 겪는 동시에 학교에 적응하고, 성장해 나간다. 그런데 이 영화가 기존의 이민자를 다룬 작품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이들의 서사가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영과 동현의 고유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이민자들의 보편적인 경험을 그려내려 하지 않고, 인물의 사적인 역사를 전달한다. 여기에는 동현처럼 어린 시절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했던 앤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돼 있다.

이러한 고유성이 납득되는 것은 전반부 장면의 독특한 촬영 때문이다. 영화는 동현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전반부와 시간이 흘러 동현이 청소년이 된 시점의 후반부로 나눠져 있다. 감독은 코닥 16mm 필름을 사용한 전반부에서 특유의 따뜻한 색감과 필름 입자의 질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몽환적이고 아련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16mm 필름은 영화 촬영의 표준이었던 35mm 필름에 비해 질감이 거친 등 영상의 품질이 낮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16mm 필름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그 결과 영화의 전반부는 하나의 긴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 소영과 동현의 이야기는 객관적 시점에서 쓰인 이민자 서사가 아니라 주관적 기억으로 재구성된 ‘그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올해 초 개봉한 또 다른 자전적 영화인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2023)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애프터썬》은 영화 전체를 아버지와의 여행에 대한 회상으로 구성해 부녀 관계에 대한 자전적 기억을 형상화한다. 《애프터썬》에서는 2000년대에 대한 향수를 연출하는 장치로 miniDV 테이프 캠코더로 촬영한 영상이 사용됐다. 어떤 촬영 매체들은 그 시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온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도 관객은 16mm 필름을 통해 90년대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에는 소영과 동현 외에 세 번째 인물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소영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사이먼’이 아니라 화면에는 나오지 않는, 나올 수도 없는 세상을 떠난 소영의 남편이자 동현의 아버지, ‘원식’이다. 그의 자리는 카메라 뒤다. 앤소니 심 감독은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원식의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원식은 영화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부재하는 원식이 역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은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다른 이민 서사들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된다. 청소년이 된 동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동현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둘 모두 동현에겐 부재하면서도 저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현은 학교에서 가계도를 그려 오라는 과제를 받은 뒤부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민자인 동현에게 가계도를 그린다는 것은 민족적인 혈통에 대한 일이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가족의 혈연관계를 연결해 나가는 일이다. 동현은 소영에게 한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묻는다. 그렇기에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가족에 대한 영화다.
한국은 나한테 해로워
소영과 동현의 귀환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한다면, 《리턴 투 서울》에서 귀환은 예상치 못한 문제의 발단이 된다. 《리턴 투 서울》의 주인공 ‘프레디’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인물인데, 여행하던 중 일본행 비행편이 기상 악화로 결항하자 그 대신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는 프레디에게 한국은 낯선 땅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을 프랑스로 입양 보냈던 기관을 통해 친부모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 프레디는 반강제적으로 한국과 관계를 맺게 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와 달리 《리턴 투 서울》에서 한국은 가족의 감동적인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다. 어릴 때 프레디를 버렸던 친부는 용서를 구하지만 프레디는 그를 혐오하고, 반대로 친모는 끝까지 외면하지만 프레디는 그녀를 기다린다. 정체성에 대한 태도에서도 두 영화의 차이가 드러난다. 프레디에게 “토종 한국인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은 그를 한국인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프레디는 한국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영화 후반부에 프레디가 말하는 “한국은 나한테 해로워”라는 대사는 극 전체를 관통한다. 한국 사회는 프레디를 끊임없이 재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프레디가 친부의 가족들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들은 프레디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한국에서 함께 살자고 말하지만, 프레디는 그 자리를 불편해하며 말한다. 자신은 양부모와 친구들이 있는 프랑스로 곧 돌아갈 거라고. 프레디는 모든 이민자에게 고국이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으며, 그들 사이에도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그런 프레디가 친부의 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친부와 재혼한 아내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압력, 프레디의 할머니가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기도의 기괴함 같은 것들이다.
프레디가 한국에서 만난 친구이자, 한국어를 모르는 프레디의 통역을 담당하는 한국인 ‘테나’는 프레디를 한국인으로 규정하려는 폭력적 시선을 은연중에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테나는 항상 프레디에게 한국 문화를 설명해 주다가도, 프레디가 한국 문화에서 벗어난 돌발행동을 할 때나 친부에게 공격적으로 말할 때마다 당황한다. 그는 그런 프레디를 말리고, 프레디의 말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질 내용으로 순화해서 전달한다. 의도적인 오역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는 자신을 ‘착한 한국인’으로 만들려는 테나와 한국 사회의 기대에서 탈주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프랑스인이야!”

프레디의 말을 들은 테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너는 한국인이기도 해.” 이 시점에서 테나의 말은 명백하게 부당하다. 하지만 이후 프레디가 한국과 점점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테나의 오해는 예언적인 것이 된다. 순전한 우연이었던 프레디의 첫 한국 방문은 그가 곧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끝나지만, 프레디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보지 않겠다고 말했던 친부와도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된다. 프레디가 한국과의 연을 끊지 못하는 것은, 다시 닿아버린 과거를 완전히 무시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된 이상, 프레디의 정체성은 재편될 수밖에 없다.
귀환, 문제의 해결 혹은 발단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소영과 동현이 함께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원식의 무덤에서 끝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언제나 가족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소영이 가족을 지탱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과정과, 동현이 아버지를 찾아나가며 겪는 성장을 그린다. 두 이미지의 병렬 속에서 두 모자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멀어졌다가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이민 생활은 문제투성이였고, 이는 한국으로 귀환함으로써 치유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결말 부분에서 소영과 동현은 한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원식이 살던, 지금도 원식의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다. 한국 여행은 동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동현은 한국 음식을 먹고,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고, ‘한국 사람처럼’ 머리를 깎는다. 캐나다에서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동현은 한국에서 대조적으로 편안하게 웃는다. 또 동현은 원식의 가족들에게 환대받고, 알지 못하던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다. 동현이 원식의 유품인 군복을 입는 장면은 한국 여행이 그에게 비어있던 정체성의 자리를 채우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턴 투 서울》에서는 프레디가 가족과 동시에 프레임에 등장하는 장면이 드물지만, 《리턴 투 서울》 또한 가족에 대한 영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의 재결합이나 치유가 아닌 불화와 그로부터 깨지는 정체성을 그렸다는 것이다 . 프레디는 영화의 결말에서 친부와 어느 정도 화해에 이르지만, 여전히 거리를 둔다. 연락이 닿지 않던 친모와는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지만, 이후 친모는 또 한 번 프레디를 외면한다. 영화가 국적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프레디는 자신이 프랑스에도, 한국에도 완전히 속한다고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레디가 있는 곳은 프랑스도 한국도 아닌 ‘어딘가’다.
《리턴 투 서울》의 귀환이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와 달리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프레디에게 한국은 문화적인 근원이 아니라 지리적 출생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친부모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프레디의 삶에 들어온다. 그래서 프레디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운명론적이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지만, 인식한 순간부턴 연루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건.
한국 방문 이후 프레디는 한국에 무기를 수출하는 프랑스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6.25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로 입양됐던 자신이 한국에 무기를 파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스물다섯 살에 한국에 처음 도착하기 전까지 프랑스인으로 살아왔던 프레디에게 뒤늦게 알게 된 그의 태생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사다. 프레디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삶을 큰 문제없이 살아오던 인물이지만, 입양기관에서 친부모의 정보를 듣는 바로 그 순간 친부모를 만나는 일은 그에게 자아를 찾기 위한 필수통과지점이 된다. 부모에 대해 알게 된 이상 과거의 자아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같고도 다른 두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리턴 투 서울》에서 딱 하나 공통으로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즉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그들은 낯선 나라를 통과하고 낯선 가족들과 대면하며 마침내 ‘나’를 만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해 고유한 여정을 거친 두 이야기는 이렇게 같은 곳으로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