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 책』(2002)의 표지 ©yes24
책에 미쳐본 적이 있는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메슥거림을 참고 활자를 주워섬길 만큼, 혹은 무더운 여름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손전등으로 글귀를 따라갈 만큼. 만화 『노란 책』은 누구에게나 한 권쯤은 있을 바로 그런 책에 대한 이야기다.
1980년대 일본의 실업학교 여학생 미치코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노란 표지의 책을 발견한다. 19세기 프랑스 작가 로제 뒤 가르의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이다. 책에 푹 빠진 미치코는 공부하고, 집안일을 하고, 메리야스 회사 취업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틈틈이 책을 읽는다. 소녀는 어느새 주인공 ‘자크 티보’를 상상 속 친구로 여기며 속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기에 이른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책을 반납할 시간이 다가오고, 미치코는 고통스러운 이별을 준비한다.
노란 책은 미치코의 삶에 균열을 낸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했던 평범한 소녀는 ‘혁명가’ 자크 티보와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나마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 내밀한 세계는 단조로운 일상과 충돌하며 때때로 환멸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분열의 감각이야말로 책 읽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정신없이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들어 현실을 자각하고 실망에 휩싸인 경험이 있을 테다. ‘일상을 함께하는’ 독서이기에, 오히려 ‘일상과 이상의 괴리’를 가장 첨예하게 경험시킨다. 이러한 분열의 경험은, 그것이 건설적인 변혁의 의지로 이어지든 단순 자아도취에 그치든 간에, 폭력적인 일상에 묻혀버리지 않고 ‘나’의 고유한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이다.
저자 타카노 후미코는 독특한 연출과 스타일로 알려진 만화가다. 『노란 책』에서 그는 여백과 잔상을 활용한 연출로 책 읽기의 리듬을 충실히 재현한다. 미치코는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가는 대신 여러 번 쪼개서, 때때로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가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은 곱씹으며 천천히 읽는다. 작가는 여고생의 소란한 일상 사이에 사각의 컷들로 분절된 고요한 독서의 시간을 슬쩍 끼워 넣는다. 이로써 책 읽는 시간은 일상 속에 기입된 비일상과 유희의 시간이 된다.

▲『노란 책』(2002) 의 한 장면 ©북스토리
책 읽기 참 어려운 시대다. 단숨에 소비되는 콘텐츠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독서의 고요한 리듬을 되찾기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았을 책 속 ‘다른 세계’와의 추억을 『노란 책』과 함께 되살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것이 또 다른 좋은 책과의 만남이자 모험으로 이어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