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퀴어가 다시 벽장 안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 5월 3일,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을 내렸다. 대신 같은 날 청소년 문화행사 개최를 명목으로 광장 사용을 신청한 기독교단체 CTS 문화재단에 광장을 내줬다. ‘날짜가 겹치면 청소년 행사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조례를 앞세워 당사자 간 조정절차도 거치지 않고 행정 결정을 내린 것이다. CTS 문화재단이 방송 등을 통해 반(反)동성애 입장을 꾸준히 피력해왔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소수자 인권 대신 혐오세력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서울의 상황이 어수선한 와중 지난 5월 14일, 강원도 춘천에서 올해 첫 퀴어축제가 열렸다. 수도로서 진보적인 정치공간으로 기대되는 서울에서조차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탄압받는 상황에서, 지방의 성소수자들과 그 동지들은 어떻게 연대하고 지역공동체에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축제가 열린 춘천 의암공원을 방문해 지방 퀴어축제의 면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5월의 화창한 일요일, 제3회 춘천소양강퀴어문화축제(춘천퀴어축제)가 열리는 의암공원을 찾았다. 현수막과 포스터를 따라 도착한 행사공간에는 노란 천막의 부스들 위로 만국기 대신 다양한 성소수자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춘천퀴어축제는 강원지역의 유일한 퀴어문화축제다. 2021년 처음 개최돼 올해로 3회를 맞이했다. 그전까지 국내 퀴어축제는 모두 서울,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만 개최됐기에, 인구 30만 미만의 중소도시 춘천에서 퀴어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소소한 화젯거리였다. 첫 축제부터 기획에 참여해온 조직위원 무화과(활동명)는 “춘천같이 작은 도시는 익명성이 낮아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소수자 청년과 청소년들이 억압을 해소하고 존재를 드러낼 기회가 꼭 필요하다”며 지방 퀴어축제의 의의를 설명했다. 무화과를 비롯한 춘천시민 네 명으로 구성된 조직위가 무(無)로부터 일궈낸 축제는, 어느덧 전국의 성소수자들과 앨라이*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어엿한 지역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앨라이(ally): 성소수자 인권 개선을 지지하고 차별에 반대하는 비(非)성소수자들을 이르는 말.
퀴어축제 준비는 조직위만의 일이 아니다. 조직위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들도 ‘연대단체’로 묶여 기획부터 운영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다. 무화과는 “연대단체들이 재정적 후원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직위와 함께 축제를 준비한다는 것이 춘천퀴어축제의 중요한 특징”이라며, “오래 사회운동을 해온 시민단체들의 경험과 자원은 첫 퀴어축제 기획부터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부스

▲축제 시작에 앞서 축복식을 진행하는 양만호 사제. 그가 속한 대한성공회 춘천나눔의집은 연대단체로 참여했다.

▲진보당 춘천지역위원회 부스
축제 당일, 연대단체들은 참가자들에게 간식 나눔 및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부스를 운영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 성소수자부모모임 등 서울 중심의 성소수자 인권단체 몇몇을 제외하면, 연대단체 대부분은 강원대 생활도서관, 춘천 여성민우회, 대한성공회 춘천나눔의집 등 춘천지역 시민단체들이었다. 우선시하는 의제는 제각각이지만 ‘다름’이 존중받는 지역공동체를 모색한다는 공동의 목표로 뭉친 것이다. 춘천여성회 지은희 회장은 “지방 소수자 운동은 확장성은 더디지만, 오히려 그만큼 연대감이 공고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연대발언에서도 묻어나왔다.
“우리는 모두가 스스로의 주체이며 가장 자기답기를 희망합니다. 춘천퀴어문화축제는 존엄의 지평을 넓혀가는 변혁적 운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모습 그대로 숨 쉬고 욕망하고 사랑할 권리가, 지금 당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한성공회 춘천나눔의집과 민주노총 강원지부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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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발언을 하는 강원대 생활도서관 이바다 씨
준비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서울시가 그러했듯, 춘천시 또한 조직위의 의암공원 사용 신청을 불허했다. 춘천시 녹지공원과는 공원에서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49조 2항을 근거로 ‘작년 춘천퀴어축제에서 팔찌 등을 판매하는 불법 상행위가 적발됐음’을, 공원 내 나무데크를 관리하는 여성청소년과는 ‘축제가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모호한 판단을 불허의 이유로 들었다.

▲축제가 열린 의암공원 전경

▲춘천시 의암공원 사용 불허 규탄집회 ©춘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
조직위와 연대단체들은 춘천시의 결정에 반발하며 4월 11일에 즉각 규탄집회를 열었다. 조직위는 “녹지공원과가 지적한 축제에서의 굿즈 제공은 모두 후원에 대한 리워드로, 리워드 제공 여부는 후원자의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과거 의암공원에서는 상행위가 이뤄지는 행사들이 별다른 제재 없이 열려왔다는 점, 퀴어문화축제의 본질적 목적은 영리 추구가 아닌 인권의식 증진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춘천시가 차별행정을 끝내 철회하지 않자, 조직위는 결국 헌법으로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에 기대어 행사를 ‘집회’로 신고하고 축제를 진행했다.
역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축제 당일, 행사가 시작한 지 두 시간 만에 보수 기독교 단체가 유튜브 중계카메라와 피켓으로 무장하고 의암공원 건너편에 몰려왔다. 에이즈와 성소수자를 둘러싼 사실무근의 혐오적 발언들이 수풀을 넘어 흘러나왔다. 축제 운영 스태프들은 참가자들이 이를 보지 못하도록 인간벽을 만들고, 피켓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30분 넘게 대치했다.


‘공익에 어긋난다’, ‘가정을 해체시킨다’는 춘천시와 혐오세력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축제는 완전히 가족친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올해 축제의 테마는 ‘운동회’였다. 경쟁이 아닌 화합의 장인 ‘축제’답게, 승패보다는 모두가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시됐다. 제기차기, 고리던지기, 경보 계주, OX퀴즈, 십자말풀이 등 종목 선정에 있어 장애 및 신체적 차이를 고려해 누구나 적어도 한 종목에는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운동회 시작 전 몸풀기 체조를 하는 참가자들

▲제기차기

▲고리던지기

▲박 터뜨리기

▲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김치의 공연


▲줄다리기
축제는 행진으로 마무리됐다. 연대단체들과 참가자들은 제각각 깃발을 들고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의암공원을 떠나 춘천 시내로 걸어갔다. 이들은 버스를 탄 시민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고, “혐오는 메롱메롱, 차별도 메롱메롱” 등의 구호를 외쳤다.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행진하는 참가자들
올해 춘천퀴어축제의 슬로건은 “퀴어가 힘이 넘치네!”였다. 그 어떤 혐오도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는 공동체를 위한 힘이 넘치는 연대를 막을 수 없다. 올해의 무지갯빛 봄바람은 춘천으로부터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