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주목하라! 참 야속한 말입니다. 행과 행 사이를 살피라니 도무지 보이질 않는데 무책임하게도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다 심장 밖으로 튀어나온 마음처럼 문장에서 뛰쳐나온 행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업 중 만난 윤동주의 〈십자가〉에서였습니다. 이 시의 4연은 이렇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여기서 혼자 똑 떼어진 ‘처럼’은 완전한 무언가에 완전히 맞붙을 수는 없어서,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같은 행 같은 구에 자리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아가는 길에는 서겠다는 듯 바로 아래 행에 혼자 꿋꿋이 자리합니다. 완전하진 못해도 온전함으로 있겠다는 굳은 마음이 행간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행간과 행간의 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커버스토리는 “뭔진 몰라도 책과 독서에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주술적 믿음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흩어진 것들을 그러모아 쥐는 작업을 우선했습니다. 무언가를 왜 하지 않냐는 물음은 행간을 주목하란 말만큼이나 무책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독서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혹은 독서를 할 이유가 없는) 이유를 찾아 헤맸습니다. 독서 실태조사 자료서부터 정책 토론이나 학회 연구 자료까지 뒤져가며 독서 행위를 조명했습니다. 끝에 가서는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게 들어와서 어지럽단 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믿었던 책과 독서에 있는 ‘무언가’는 생각보다 아주 컸습니다. 소묘해갈수록 책은 복합적인 관계 맺음의 산물임이, 독서는 그러한 관계 맺음의 수행임이 드러났습니다. 기사와 데스킹을 끝마치고, 책은 ‘에게’와 ‘처럼’을 연결해주던 행간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서광이기도 했던 수전 손택은 책이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데아에나 있을 법한 ‘인간’이란 완전한 존재로 온전히 향하는 길에는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책은 세계와 인간의 행간으로 우리에게 자리한다고 믿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하나가 세계의 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우연하게도 이번 179호에는 커버스토리뿐 아니라 행간을 발견하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책과 행위, 독자, 공간은 물론이고 오랜 극장과 시민, 유적과 발굴자, 인권과 지방자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의 주제는 다른 궤에 있는데도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기사 쓰기를 행과 또 다른 행에 갈고리를 걸어 행간으로 엮여 들게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간 모든 기사는 행간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간도 아니고 행에부터 눈길을 주지 않는 시대입니다. 문장과 문장을 잇는 데에 더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인력까지도 느슨해져 갑니다. 나 혼자만 행간에 매달려 있기에는 외롭고 심심합니다. 이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읽어줄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겠지요. 행과 행에 깊이 뿌리를 박고 동아줄을 내리든 가지를 뻗든 손을 내밀든 해서 행간 여행을 함께 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책책책, 책을 읽으려 해도…… 마음처럼 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책장을 행복하게 쏘다니는 책벌레에게

처럼

행간이 허락된다면, 그것에 대롱대롱 매달려 하염없이 책과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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