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이 남기는 정적을 채우다

희곡 읽기, 경험하기, 보고 듣기

  내가 그려낸 인물들이 눈앞에서 저마다 말하고 움직이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과 가닿지 못한 공간들이 순식간에 전환되는 순간. 희곡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순간들이 얼기설기 엮여 책장을 덮을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과 호흡대로 희곡을 읽는다. 같은 작품을 읽은 후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기도, 또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희곡의 매력은 바로 이 ‘열려있음’에 있다.

  그러나 희곡이 발하는 빛은 점점 옅어져만 간다. 희곡을 찾아 읽는 사람들은 줄었고, 고전 희곡의 경우 익숙지 않은 단어와 문체가 이어져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다. 서점에서조차 희곡에 허락된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희곡을 찾아 읽으며, 희곡을 함께 읽자 소개한다. 희곡이 선사하는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희곡이 남기는 정적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희곡이 꾸준히 읽히는, 또 읽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희곡 전문 독립서점을 찾아 희곡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며 그 답을 고민해봤다.

인스크립트: 희곡을 읽다

  희곡은 ‘한 편의 글’로만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 희곡을 읽을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들어낸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희곡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곤 하지만, 한 발 한 발 멀어져가는 희곡을 다시 독자들 앞으로 이끄는 공간이 있다. 희곡 전문 독립서점 ‘인스크립트’다.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찾아간 연희동 골목에서 인스크립트를 만났다. 작은 공간 곳곳을 다양한 희곡 작품으로 채운 ‘희곡을 위한’ 공간이었다. 낯섦과 설렘,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며 서점에 들어섰다. 한쪽 책장을 빼곡히 채운 강렬한 색채의 ‘지만지드라마’ 희곡 전권과 귓가를 울리는 오페라 음악이 ‘예술 공간’에 들어섰음을 환영해준다.

사진 설명 시작. 인스크립트 내부 모습이다. 사진 왼편으로는 많이 책이 꽂힌 책장이 벽면을 채우고 있고, 그 앞으로는 선반 위에 책이 쌓여 있다. 그 뒤로는 바 테이블과 높은 의자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 설명 끝.
▲희곡 전문 독립서점 인스크립트

  “왜 사람들은 희곡을 읽지 않을까? 왜 희곡을 파는 서점은 없을까?” 서점 한켠에서 만난 권주영 사장은 이런 물음에서 출발해 인스크립트라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인스크립트를 정식 오픈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되지 않아서”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희곡으로 가득한 이 소중한 공간에 애착을 느끼며 음료 한 잔을 주문했다. 서점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서는 음료를 마시며 희곡을 읽어볼 수 있었다.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낯선 제목들을 찬찬히 훑어보다 스페인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희곡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꺼내들었다. 한참 읽다가도 잠시 멈춰 장면을 그려보거나, 앞서 지나간 이야기들을 되짚어보기도 하면서 희곡을 읽는 호흡을 만들어갔다. 희곡을 앞에 둔 채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공간은 희곡이 선사하는 자유로움을 닮아 있었다.

사진 설명 시작. 책상 위에 커피와 책이 놓여 있다. 왼쪽에 있는 커피는 유리 컵에 얼음과 함께 담겨 있고, 빨대가 꼽힌 채로 천 위에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흰 표지에
▲방문객은 음료와 함께 희곡을 즐길 수 있다.

인스크립트: 희곡을 경험하다

  작품 한 권을 완독한 후에는 공간을 둘러보며 ‘왜 희곡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어들까’ 사색했다. 작품을 둘러싼 시공간과 그 안의 수많은 인물을 독자가 직접 상상하며 읽어야 하는 희곡의 특성은 머릿속에 인물들을 정립해 그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작업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전되기 전 독자 스스로 희곡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구현해내고, 각자의 특징을 토대로 이들을 구분해가며 읽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인물을 인지하는 것에서 막히면, 다음 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희곡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희곡을 즐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없을까? ‘희곡 서점’이라는 틀에 집중하면서도 더 많은 사람이 희곡을 친숙하게 느끼고, 또 희곡 읽기에 도전해볼 수 있도록 고민한 흔적이 인스크립트 곳곳에 묻어 있었다.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등 익숙한 제목의 고전 희곡부터 신진 작가 작품집, 어린이를 위한 희곡집, 큰 글씨책,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를 먼저 공부해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입문서까지 다양한 형태의 도서들로 희곡 읽기를 권해보는 손짓들이 공간을 함께 채우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낭독회 또한 희곡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인스크립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인스크립트의 낭독회에 모인 이들은 희곡을 읽은 감상이나 작품 분석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인물을 연기해본다. 기꺼이 내가 아닌 타인의 가면을 써보는 특별한 경험이다. 작품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을 넘어 마음속에 차올랐던 문학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을 즐기는 것이다.

  ‘읽는다’는 행위 외에도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 방문객들에겐 책장에 꽂힌 작품들의 제목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서로 희곡 이야기를 나누는 들뜬 목소리들도 곧잘 들려온다. 희곡이 이어주는 유대감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권주영 사장은 “희곡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싶어 오픈 전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놀랐다”며 “희곡을 좋아하는 분들이 다들 어디 숨어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라고 전했다. 인스크립트는 희곡을 좋아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그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연결고리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사진 설명 시작. 세 권의 책이 놓여 있다. 가장 앞에 보이는 책의 표지는 회색과 하늘색이 겹쳐진 색 위로 파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제목
▲인스크립트가 큐레이팅 한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 역시 다른 방문객과 눈이 마주쳐 서로 탐색전을 펼치다 읽고 있는 작품의 제목을 묻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저 사람도 희곡을 좋아해서 이곳을 찾아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처음 만나는 이에게도 쉽게 말을 걸어볼 수 있었고, 주고받는 말은 끊이지 않았다. 권주영 사장은 인스크립트를 운영하며 “매일 공통의 관심사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을 본다”며, 예술로 연대하는 이들에게 희곡이 주는 울림이 있다고 말했다. 희곡에 대해, 극에 대해, 문학과 무대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은 연결되고 있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희곡을 보고 듣다

  희곡은 정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정적을 채우는 방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직접 작가가 돼 인물 뒤 숨겨진 서사를 연결해볼 수도, 다른 이가 무대로 구현해낸 결과물을 감상할 수도, 희곡을 직접 낭독하거나 연기해볼 수도 있다. 희곡에서 뻗어나가는 무궁무진한 경험을 짚어보던 끝에, 인스크립트에서 읽은 희곡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뮤지컬로 각색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2023)를 보기로 했다. 혼자 희곡을 읽던 나의 상상을 넘어 다른 이들의 상상이 궁금해졌다. 희곡을 보고, 들어본 것이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같은 메시지를 희곡과는 사뭇 다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극중 맹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장애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을 나눈다. 서로 동화되다가도 또 갈등하면서 ‘맹인이 살아가는 삶’이 그려진다. 

  정상성은 무엇일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진 또 다른 이의 삶과 경험을 바라볼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희곡이 생략과 암시로 비워뒀던 질문들을 극 중 인물들은 말과 행동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새로운 시도들도 눈에 띈다. 각 인물의 동기가 희곡에 비해 명확하게 표현됐고, 어떤 인물의 등장은 과감히 생략하고 대사로만 처리해 특정 인물의 존재감을 새롭게 표현했다.

  다름에서 오는 간극이 희곡 경험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같은 크기, 같은 글씨체로 쓰여있던 대사는 선명한 목소리의 높낮이를 가진 ‘말’로 변해 극장에 울려 퍼졌다. 격정적인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 상상했던 장면에서 긴 정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희곡이 선물하는 자율성은 희곡을 바탕으로 창작된 다른 장르의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르게 생각해보기’가 예술인이, 또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면, 희곡이야말로 이를 실천하도록 돕는 좋은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완결된 문학 형식, 희곡. 희곡이 남기는 다양한 가능성을 마음껏 상상해볼 수 있었던 공간, 인스크립트. 희곡이 가진 의미를 연극이나 영화 대본 등 다른 창작물을 만들기 위한 재료 정도로 일축할 수는 없다. 희곡이 남기는 정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수 있도록.’ 인스크립트 벽면에 붙어있는 공간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 이 문장에서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공간이 많지 않은 요즘이다. 희곡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인스크립트는 언제 찾아와도 희곡과 함께할 수 있다는 방문객들의 행복함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중심에서 희곡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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