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러내기, 살아가기, 여성농민의 농촌

여성x농민의 고단함을 딛고

  농업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농민은 오래도록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책임지는 먹거리 생산의 주체로서 농촌에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여성농민에게 그에 마땅한 농업의 자원과 수익, 농민으로서의 권리 등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농촌 사회 속 성차별적 규범과 관행들, 그로부터 영향받은 각종 법제도가 여성농민의 권리와 지위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성농민들은 밀려난 자리에서 여전히 씨앗을 심으며 대안농업을 이끌고 보다 평등한 농촌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부지런한 발걸음 사이엔 기후위기의 해법과 식량주권의 미래가 엿보이기도 한다. 여성농민의 한계 없는 땅 위에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농사짓는 여성의 자리는

  오늘날 총 256만 8,783명의 국내 농업인 인구 중 여성농업인은 138만 8,081명으로, 전체의 46%에 달한다. 201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52.5%가량의 여성농민들이 전체 농작업의 5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농업경영체를 가지고 경영주를 맡고 있는 여성은 농업경영체 경영주로 등록된 농업인 중 19%밖에 되지 않는다. 경영주 지위는 농산물 판매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영역에 의사 결정권을 갖고 참여하며 필요한 복지나 지원 체계를 이용함에 있어 필수적인 지위지만, 대부분 남편이 농업경영체의 경영주로 등록돼 있다. 농업경영체의 경영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300평 이상의 농지를 보유해야 하는데,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가 오래 지속돼 온 농촌에서 여성이 이 정도의 자원을 소유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대다수가 남편 명의에 귀속된 재산인 탓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20년 농업분야 주요사업 성인지통계에 따르면 전국 농지소유자 중 여성은 28.2%밖에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성농민들의 직업적 지위는 경영주가 아닌 ‘경영주 외 농업인’에 머무르고 있다. 경영주 외 농업인은 한 농업경영체 내 경영주가 아닌 농업인 지위를 말한다. 

  경영주 외 농업인 등록조차 여의치 않은 여성농민도 많다. 경영주 외 농업인으로 등록하려면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농업 이외의 소득 역시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가정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부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 여성농민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여성농민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농업 경영을 꾸려가면서도 법적으로는 그 모든 농업 활동의 주인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있다. 

표 설명 시작. 2022 농업인 인구 현황이 맨 위 중앙에 적혀있다. 아래엔 원그래프가 있다. 주황색과 초록색 두 영역만 있는 원그래프로, 주황색 영역엔 46%, 118만 702명이 적혀있고 초록색 영역엔 54%, 138만 8081명이 적혀있다. 원그래프의 왼쪽 아래엔 초록색 남성농업인, 주황색 여성 농업인이라고 적혀있다. 그래프 오른쪽 아래엔 출처 농림축산식품부 농업경영체 등록정보 통계 서비스라고 적혀있다. 표 설명 끝.
▲2022 농업인 인구 현황 Ⓒ송나윤

표 설명 시작. 맨 위 중앙에 2022 농업경영체 경영주 현황이라고 적혀있다. 아래엔 원그래프가 있다. 주황색 영역과 초록색 영역만으로 이뤄진 원그래프다. 주황색 영역에는 19% 19만 4000가구가 적혀있고, 초록색 영역에는 81% 82만 8000가구라고 적혀있다. 원그래프 왼쪽아래에는 초록색 남성 경영주, 주황색 여성경영주라고 적혀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출처 2022 농림어업총조사라고 적혀있다. 표 설명 끝.
▲2022 농업경영체 경영주 현황 Ⓒ송나윤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돼 여성농민의 직업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2016년 도입된 공동경영주 제도는 경영주의 배우자에 한해 공동경영주 지위를 부여하는 제도다. 배우자의 동의도 필요 없고 전화 신청도 가능해 등록 절차 자체는 간단한 편이지만 경영주 외 농업인에 머물러있던 여성들의 공동경영주 등록률은 높지 않다. 공동경영주 제도가 여성농민의 법적 지위 향상에 미치는 영향이 근본적으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익산시여성농민회(익산여농) 김양순 전 회장은 익산여농이 맡아 진행 중인 익산지역 ‘여성농업인 영농여건개선사업’ 교육에서 여성 농민들에게 공동경영주 제도를 소개하며 등록을 독려하곤 있지만 한계가 뚜렷한 제도라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공동경영주 등록을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부 품질관리원 지역사무소에서도 그 제도를 잘 모른다”며 제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음을 우선 지적했다. 공동경영주 등록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나 지원이 큰 것도 아니다. 2021년 〈한국농어민신문〉 보도에 따르면 많은 여성농민이 실제 행정상에서 공동경영주 서류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농업 관련 대출, 농자재 구입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경영주인 남편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경영주가 경영주와 동등한 농업인으로서의 권한과 지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경영주 제도 자체가 농업경영체법의 본문이 아닌 시행규칙에 기반해 법적 근거의 불안정성도 크다. 남성농민만이 대부분 경영주를 맡도록 하는 기존 농업경영체법을 유지하면서 여성농민을 공동경영주로 추가하는 현행 공동경영주 제도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김양순 전 회장은 경영주 제도가 갖는 본질적인 한계로 “농촌의 모든 제도와 문화가 농가를 단위로, 경영주를 기준으로, 가장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책 영역에서의 여성농민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선 여성농민을 가정에 귀속된 존재로 취급하는 제도 전반을 개선해 자신만의 농업을 꾸려나가는 한 명의 농민으로 호출해야 한다. 

  가장 중심의 농가를 기본 단위로, 남성 농민을 표준으로 설계된 농업 정책들이 여성농민의 권리를 누락해 온 것은 경영주 등록 문제에서만이 아니다. 지자체별로 차이는 있지만 농민수당 등 소득보조 성격의 지원금들도 대다수 한 가구, 한 경영체를 기준으로 지급되는 사실상 ‘농가 수당’인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남성농민에게만 소득보조 성격의 각종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는 것이다.

  농협 조합원 가입도 마찬가지다. 여성농민은 국내 대부분의 농산물 유통을 담당하는 농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하기도 어렵다. 1994년 이전까지는 가구당 1명만 농협 조합원이 될 수 있었기에 대부분 가장인 남성농민이 가입했고, 이후 농협조합법이 개정돼 한 가구에서 두 명의 조합원 가입이 허용됐지만 농지 300평 이상의 농업경영체를 가진 농업인이어야 한다는 가입 조건 때문에 여전히 여성농민의 조합원 가입률은 낮다. 

  이는 곧 농협 조직의 대표성 왜곡으로 이어진다. 여성농민이 농업인구 절반을 차지하지만, 농협의 여성 조합원은 전체의 34.2%에 그친다. 이마저도 남편의 사망으로 조합원 지위를 승계한 경우가 대다수다. 임원진의 경우 전국에 농협 여성 이사는 12.6%, 여성 조합장은 고작 1.1%, 단 13명일 뿐이다. 남성 조합장은 1,098명이다. 김양순 전 회장은 농협이 “농민들의 농사일에 있어 무척 중요한 기관”인데도 “여성 구성원이 현저히 적어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와 정책, 사업들이 지속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표 설명 시작. 맨 위 중앙에 2023 전국농협 여성 조합원 및 임원 현황이라고 적혀있다. 제목 바로 아래 가장 왼쪽, 초록색 남성, 주황색 여성이라고 적혀있다. 왼쪽부터 세 개의 표가 있다. 첫번째 표에는 여성 조합원 수라는 제목 아래 주황색과 초록색 영역으로 된 원그래프다. 주황색 영역에는 34.2% 71만 4591명, 초록색 영역에는 65.8% 137만  2913명이라고 적혀있다. 두번째 표에는 여성 조합장 수라는 제목으로 주황색과 초록색 영역으로만 이뤄진 원그래프다. 주황색 영역은 1.1% 13명, 초록색 영역은 98.9% 1098명이라고 적혀있다 세번째 표는 여성 이사 수라는 제목의 주황색과 초록색으로만 이뤄진 표다. 주황색 영역에는 12.6% 1247명, 초록색 영역은 87.4% 8624명이라고 적혀있다. 표 오른쪽 아래에는 출처 농협중앙회 여성신문이라고 적혀있다. 표 설명 끝.
▲2023 전국농협 여성 조합원 및 임원 현황 Ⓒ송나윤

농촌 사회 성평등한 조직 문화 가로막는 것은

  여성농민의 권리와 지위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지탱하는 것은 농촌사회의 오래된 가부장적 성차별 관행과 규범이다. 농협의 경우 여성농민에게 불리한 조합원 가입 조건을 딛고 여성이 가입을 시도하더라도 이사회에 여성농민이 없으니 이사회에서 가입이 거절되기 일쑤다. 지난 3월 〈한국농어업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남편이 이미 조합원이면 굳이 여성까지 복수조합원이 돼도 별다른 이득이 없다는 인식이 크다. 이 인식 역시도 여성의 농협 조합원 가입을 어렵게 하는 큰 이유다. 

  여성 구성원을 늘려 대표성을 개선하기 위해 한 지역 농협에서 여성 조합원이 30% 이상이라면 꼭 한 명의 여성 이사를 두도록 하는 적극적 조치인 여성임원할당제도가 존재하지만, 본래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할당제도로 한 명의 여성 이사를 뽑는다고 해도 여성농민들에겐 여전히 선거를 통한 이사 선출의 기회도 있으므로 얼마든지 출마해 이사 자리에 도전해도 된다. 그러나 김양순 전 회장은 “여성임원할당제를 통해 여성 이사가 한 명 결정되면 투표권을 가진 조합원들이나 남성 이사진들이 절대로 여성 이사를 추가로 두려 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여성임원할당제도의 취지는 적어도 이 이상의 여성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최소 수준에 관한 것이지만 ‘한 명이면 충분하다’ 따위의 최대 수준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는 농협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여성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나 할당제가 시행될 때마다 나타나 온 부작용이기도 하다. 

  김양순 전 회장은 익산시 망성농협에서 이사를 맡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여성으로서 농협 이사를 맡는 일에 대해 “나 빼고 모두 남성인 집단에서 홀로 여성 친화적인 의사 결정을 이끌고 여성농민을 위한 사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고 전했다. 

여성농민이 고단한 이유

  농촌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것은 농사일이 전부일까. 그럴 리 없다. 농사일에 필요한 노동력을 돌보고 살피는 재생산노동인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농촌 사회를 지탱하고 있고, 이는 성별분업에 따라 대부분 여성농민이 담당해왔다. 201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남성농민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이 하루 0.61시간일 동안 여성농민의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하루 4.74시간이었다. 

  여성농민이 농사일을 결코 덜 하는 게 아닌데도 가사노동은 여성농민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김양순 전 회장은 ‘남편 식사를 챙겨야 해서, 시어머니를 모셔야 해서’ 등의 이유로 여성농민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여성농민들이 많다고 말했다. “농민회 활동에 나오더라도 ‘가족들 밥 차려주러 가야 한다’며 금방 돌아가기도 한다”고도 덧붙였다. “여성농민이 더 많이 사회에 참여하고 활동하도록 끌어내고 싶지만, 여성농민이 과도하게 부담 중인 가사노동이 그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성농민은 살림을 주로 맡으며 농업에는 보조인이라는 성별분업 인식이 만연한 현 상황에서는 여성의 공적인 교육 기회에의 접근 역시 제한된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20년 농업분야 주요사업 성인지통계에 따르면 농업전문과정을 졸업한 전체 졸업생 중 여성은 2020년 기준 19.9%에 그친다. 농기계 분야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여성도 매우 적다. 2019년 기준 농기계운전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남성은 484명이었으나 여성은 20명, 농기계정비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여성은 25명이었다. 이는 결국 농사일에 필요한 각종 자원이 기본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안농업’ 하는 여성농민이 바꿔내는 농촌

  여성농민은 넓은 농지, 주요 자원, 편리한 기계와는 멀어져 있다. 남성농민보다 대규모 농업에의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여성농민들은 소규모의 밭농사를 주로 담당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농민은 적극적으로 ‘대안농업’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대안농업이란 대규모 산업형 농업, 관행농업과 대조되는 농업을 말한다. 자연농, 농생태학 등 생태적인 농법에 기반해 농약이나 기계 없이 작물을 길러내는 것이다. 수입 농약이 아닌 지역순환농업에 기반한 퇴비를 쓰고, 토종 씨앗을 심으며 농업에서의 새로운 실천과 변화를 이끌고 있다. 

  여성농민들이 이끌어 온 대안농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종씨앗지키기 운동이다. 오늘날 씨앗은 지식재산권을 가진 기업에 의해 판매되고 있다. 농민들은 기업이 수익성을 위해 1회만 발아하도록 만든 씨앗을 매해 구매해 기른다. 이런 현실은 기업에서 판매하는 종자, 농약, 화학비료를 구매해 대규모 생산을 하고, 다시 농작물을 기업에 납품하는 생산과 유통 체계의 일부다. 이 체계에서는 무엇을 심고 길러내 어떻게 유통할 것인지를 농민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인 식량주권을 갖기 어렵다.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은 농민들의 식량주권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도, 또 변형 유전자원 문제에 대응하고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 토종씨앗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농민이 지키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농촌은 1970년대 한국 농업정책의 기조에 따라 산업적 대량생산 농업으로 농촌개발이 진행되며 가족농의 규모화, 기계화, 종자 보급 등의 전환을 겪었으나, 당시 여성농민은 여기서 배제돼 영세한 소농으로 남은 경우가 많았다. 또 농사일의 성별분업 상 밭농사와 씨앗 관리는 늘 여성이 맡아왔다. 이로 인해 국내 씨앗 회사가 모두 외국으로 넘어가고, 모두가 씨앗을 구매해 대량으로 농사짓는 시대에도 할머니들은 대부분의 토종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여성농민연합회는 전국에서 토종씨앗을 모아, 심고 키우고 다시 나누는 토종씨앗지키기 운동을 지속 중이다. 여성농민운동의 중요한 성과다. 토종씨앗과 할머니들의 지식 및 경험을 다룬 책 『씨앗, 할머니의 비밀』(2018)을 쓴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김신효정 연구교수는 “토종씨앗 운동은 할머니들과 다음 세대 여성농민이 처음으로 연결된 운동”이라며, “농촌에는 약하고 나이 든 여성농민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비관이 있었으나 토종씨앗 운동을 통해 ‘나이가 들어서도 씨앗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양순 전 회장은 “농사를 지으려면 해외의 것을 사서 써야 하는 현 상황은 종잣값의 변화나 기후위기, 전염병 등에 무척 취약하다”며 식량주권을 위해 “대대로 물려받은 토종 종자를 나눔하고 키워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산여농의 경우 4년째 콩류와 깨류를 중심으로 토종씨앗지키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4년간 1인 1종자 농사짓기 등을 통해 토종씨앗이 조금씩 불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 설명 시작. 중앙 위 토종씨앗이 적혀있고, 중앙에 농산물을 손에 든 여성농민을 캐릭터화한 그림이 그려져있다. 아래에는 익산시여성농민회라고 적혀있다.
▲Ⓒ익산시여성농민회

  토종씨앗을 지키고 심는 대안농업은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력 또한 뛰어나다. 토종 종자를 여럿 심으며 작물의 다양성이 보장되다 보니 급변하는 기후 환경에 적응하는 종자를 키워내기 쉽기 때문이다.

  대안농업은 유통망에서도 관행농업과 차이가 있다. 소유한 농지가 없어 생산량이 적은 여성농민은 농협을 통한 출하나 대형마트와의 계약재배 같은 주류 유통망 체계에는 참여하기 어려웠기에 여성농민들은 대안농업에서 다양한 유통망을 실현하고 있다. 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의 ‘언니네텃밭’이 대표적인 사례다. 언니네텃밭은 토지 소유 여부와 관계 없이 대안적 농법으로 농사짓는 여성농민 누구나 자신의 이름으로 농산물을 유통할 수 있도록 한다. 언니네텃밭에서는 여성농민의 농산물을 ‘꾸러미’로 만들어 소비자에게 곧바로 전달하는데, 이때 소비자는 여성농민 개인에게 꾸러미를 구입한다기보다는 매월 언니네텃밭 회비를 지불해 꾸러미를 생산하는 여성농민 공동체를 지원하게 된다. 김신효정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를 공동체 지원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이라고 하며, CSA는 커다란 기업의 먹거리 유통 체계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대안 먹거리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김신 연구교수는 “한 80대 여성 농민이  언니네텃밭에 참여하며 처음 자기 명의의 통장을 만들었다고 전했다”며 “대안농업의 새로운 유통망이 비공식적으로 일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농민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 설명 시작. 왼쪽 사진에는 소쿠리 안에 무, 버섯, 계란, 상추, 김치, 콩나물, 감자가 들어있다. 오른쪽 사진에는 동그란 소쿠리 안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계란, 두부, 가래떡, 고사리, 무, 페트병에 든 식혜, 시금치가 들어있다. 사진 설명 끝.
▲언니네텃밭이 소비자에게 보내는 제철 꾸러미. 여성농민 마을공동체가 생태농업과 토종농사로 재배, 수확한 농산물들이다. Ⓒ언니네텃밭

  자원으로부터, 주류로부터 밀려났기에 도착한 공간이지만 여성농민은 이 공간을 전유해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생산과 유통 체계를 상상하고 실현하고 있다. 김신효정 연구교수는 “여성농민의 대안농업은 농업의 생태적 전환을 이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해석했다.

여성농민의 땅에는 내일의 해가 뜬다

  오늘날 여성농민이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기후위기다. 기후위기의 위협은 성별, 계층, 인종 등에 따라 불균형하게 가해지기에 여성농민 또한 다층적인 불평등을 경험한다. 농민에게 치명적인 기후 변화로 작물을 키우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생산량 감소는 생계 문제로 직결된다. 냉해, 열파 등으로 인해 작년을 기준으로 여성농민들의 생산량은 30% 이상 감소했다. 김양순 전 회장에게 여성농민회나 농민 개개인 차원에서 기후위기엔 어떻게 대응 중인지를 묻자 “(기후위기는) 정말로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다”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노동환경이 열악해진다는 것이다. 야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더위와 추위, 처음 보는 벌레들의 등장으로 인한 병충해 문제, 온열질환과 피부질환 등 새롭게 출현한 농작업 질환들에 대응할 방법이 없다. 김양순 전 회장은 “조금씩 피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야외 농작업 시의 어려움을 덜어줄 편의장비를 연구하고 보급하거나, 기후위기로 인한 잦은 재난 시 위험 상황을 잘 피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말했다. 

  김신효정 연구교수는 “결국 기후위기를 맞닥뜨리는 농촌은 생존권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라며 농민 개인이 이를 감당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추가로 투입되는 노동과 비용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건강에 현저한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인데도 관련 정책이 전무한 채 국가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농촌의 생존 위기에 대한 보상이나 대응책은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김양순 전 회장은 “해마다 힘들어지는데도 이곳에선 계속해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다”고 말했다. 여성농민의 대안농업은 좀 더 기후위기에 적응력이 높은 방식의 먹거리 생산을 위해 노력 중이다. 김신효정 연구교수는 “여성농민들은 기후변화의 피해자인 동시에 이를 해결할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주체들”이라며 이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핵심적 역할을 해나가는 데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업 농업 중심의 정책 구조와 예산 분배를 넘어 대안농업에의 적극적인 공적 투자와 지원이 시급한 것이다. 

  지금까지 기후위기로 인해 농산물 가격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는 해외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해결책을 내놨고, 결국 농민들만 피해를 떠안아 왔다. 먹거리를 소비하는 소비자들도 스스로가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농촌은 먹거리 생산으로 모두의 삶을 책임져 온 곳이기 때문이다.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이 농업의 문제에 연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신효정 연구교수는 도시농업을 적극 제안한다. 생태적 감수성과 농촌과의 연결성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김신 연구교수는 “도시를 소비만의 공간으로 두지 말고 생산의 공간으로 넓혀보는 것, 그곳에서 생태와의 연결성을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성농민에겐 ‘자기만의 땅’이 있다. 그들을 둘러싼 불평등한 억압이 때로 벅찼을지라도 해방과 긍지로 다진 땅, 무엇이든 태어나 얼마든지 살아가는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더욱 가까이, 조금 더 닿아보자. 오늘날 농촌과 농업이 인간을 넘어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우하도록 전환을 이끌고 있는 여성농민과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할 때다. 익산에서 소규모의 고추 농사를 짓고 있는 한 여성농민은 그가 농사일, 운전, 살림을 모두 도맡는 모습을 본 기자가 고단하진 않냐고 묻자, “여기(농촌)서는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라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깃든 자긍심과 긍지를 오래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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