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

연극인 강보름 연출, 하지성 배우를 만나다

  많은 일의 시작엔 열정과 사랑이 동반되지만, 시간이 흐르며 피로와 권태에 가려지곤 한다. 좋아하는 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딜 가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한 삶’이란 조언을 들을 수 있지만, 애초에 좋아하는 일을 찾는단 것조차 쉽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 없인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 같은 예술을 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극을 사랑하는 두 사람, 강보름 연출과 하지성 배우를 만나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연극과 만나다

  두 사람 모두 학창시절에 연극과 처음 만났다. 강보름 연출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자신이 어떤 일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교내 활동에 참여했다. 스포츠, 문학, 여행 등 온갖 활동을 경험한 뒤 선택한 것은 연극이었다. 강 연출은 다양한 탐방 끝에 연극을 선택한 이유로 “연기, 조명, 극본 등 모든 역할을 다 해볼 정도로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연극에 쏟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연출만 못 해본 게 한이었다”며 “연출을 꼭 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졸업 후에도 연극을 계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성 배우에게 연극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체장애가 있단 이유로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학교는 특히 답답한 공간이었다. 하 배우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진학하다 보니 비장애인인 다른 학생들과 편하게 섞이지 못해서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대상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TV 속에서 맘껏 감정을 쏟아내는 배우들은 어린 시절 그의 답답함을 대신 해소해주는 존재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처음 접한 연극은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성 배우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 담긴 숨소리, 몸짓, 눈빛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큰 울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 배우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강렬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엔 TV보다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느꼈다. 그는 졸업 후 곧장 극단으로 향했다. 이유는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나 자신을 만드는 일

  두 사람은 연극을 만들며, 오히려 연극이 자신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을 통해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긴 것이다. 강보름 연출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인생에 대한 불안을 다룬 연극 《레디메이드 인생》을 통해 연출가로 데뷔한 강 연출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힘든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진로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하는 관객들을 만났다. 강 연출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힘든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깨달았다”며 “나를 넘어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해지는 연극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밝혔다.

  특히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들과의 만남이 주요했다. 강보름 연출은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소수자들에게 연극이 연대와 치유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 연출의 작품에는 수많은 장애인 배우와 스태프들이 참여한다. 다양한 소수자들이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칠 뿐만 아니라, 대사나 몸짓이 문자와 수어로 통역되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환경에서 공연된다. 누구도 차별받거나 애써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그와 함께하는 이들은 모두 소수자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

사진 설명 시작. 강보름 연출과 하지성 배우가 함께 만든 연극 《여기, 한때, 가가》의 포스터가 있다. 사진 설명 끝.
▲강보름 연출과 하지성 배우가 함께 한 연극《여기, 한때, 가가》ⓒ프로젝트 레디메이드

  강보름 연출의 작품 《여기, 한때, 가가》에는 하지성 배우도 참여했다. 하 배우는 “무대에 올라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행복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강 연출은 그의 캐스팅 이유를 설명하며 “주인공 역할에 완전히 공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건 하지성 배우뿐이라 생각했다”며 “한 작품의 리더로서 구성원들이 가장 편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기는 순간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연극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도 한다. 초창기 하지성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장애인 관객의 공감을 얻는 일이었다. 장애인 배우는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장애로 인한 신체적 특징이 관객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 배우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어떤 연기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고 말했다.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면 관객은 배우와 자신 사이의 차이점을 먼저 떠올려 연기에 쉽게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랜 고민 끝에 하지성 배우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 배우는 “장애인 배우의 가장 큰 특성은 결국 장애”라며 “비장애인의 연기를 따라 하는 것보다 나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장애인도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비장애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 배우는 “다른 사람들을 세심히 관찰하다 보니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아무리 모습이 달라도 결국엔 ‘단일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관객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맘껏 표현하기를 꿈꿨던 하 배우는 자신의 장애를 “참 감사한, 나만의 무기”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마음의 힘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돼 힘든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하지성 배우는 “연극 덕분에 힘든 일을 이겨냈던 기억뿐”이라 답했다. 하 배우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인데, 연극을 할 땐 관객이든, 동료든 누군가 늘 함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성 배우는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에 강한 확신을 보였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언젠가 연극을 그만둬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뿐이다. 하 배우는 그럴 때마다 오히려 무대 위로 오른다.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연극에 대한 사랑만이 남는다. 하 배우는 연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며 “난 연기를 위해 태어났고, 내가 연극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 그가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도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 강보름 연출은 연극을 시작하고 책임감에 짓눌릴 때도 많았다고 회고한다. 연극은 최대한 많은 관객을 모으기 위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의도치 않게 관객의 상처를 무대 위로 끄집어낼 수 있다. 강 연출은 그럴 때마다 괴로웠고, 때론 자신이 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했다.

  강보름 연출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부담감을 해결했다. 강 연출은 “예전에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품을 만들어야 가치 있는 예술가이고 관객들에게 부끄럼이 없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한 작품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욕심부리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게 된 그는 연극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연극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은 종종 찾아온다. 강보름 연출은 “가끔 연출가로서, 한 작품의 리더로서 느끼는 무게감이 너무 커서 연극을 그만두고 싶단 생각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강 연출은 그럴 때마다 잠시 연극을 잊어본다. 여행을 떠나고, 연극과 무관한 사람을 만나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휴식의 끝엔 늘 연극이 있다. 연극에 대한 사랑을 자주 의심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연극으로의 회귀였다. 연극 연출가를 그만두면 어떤 일을 할 것 같냐는 질문에 강 연출은 “그래도 결국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사진 설명 시작. 연극 《여기, 한때, 가가》의 커튼콜. 장애인, 여성 등 다양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강보름 연출과 하지성 배우가 함께 한 연극《여기, 한때, 가가》의 커튼콜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

  방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 강보름 연출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로 다양성을 언급했다. 연극은 영화나 그림 등 다른 예술과 달리 같은 작품이라도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달라진다. 목소리, 표정, 조명 그리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까지 그 어느 것도 똑같이 반복될 수 없다. 강 연출은 “늘 새롭고 다양하기에, 연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작품을 본 관객들로부터 각자의 다양한 감상을 듣는 일이, 같은 작품을 함께 만든 창작자들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하지성 배우는 자신이 왜 연극을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연극은 그에게 그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하 배우 스스로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도 그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같은 무대 위에서 저마다 다른 마음가짐을 가져도 무대가 끝나면 모두가 꼭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참 좋았다.”라는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의 힘을 믿는다면 언제나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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