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미디어에 등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비가시화되고, 누군가는 차별적 시선으로 재현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미디어 전면에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하다’며 혐오의 대상이 돼야만 했다.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의 추구가 미디어 콘텐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반 PC주의’적 인식이 담긴 발언이다.
그러나 현재의 반 PC주의 논쟁은 PC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결과일 뿐이며, 미디어 업계 또한 소수자 가시화에 대한 숙고 없이 단순히 대중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에 급급한 형국이다. 미디어 콘텐츠를 둘러싼 반 PC주의 논쟁은 왜, 어떤 양상을 보이며 진행되고 있는가? 이들이 비판하는 PC주의 콘텐츠는 실재하는가?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실체 없는 허상을 좇고 있는 반 PC주의 논쟁을 파헤쳐 봤다.
미디어에 등장한 PC주의
본래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의 다양한 방면에서 소수자를 향한 편견을 배제하자는 의미로 사용됐다. 미디어 영역에서 벌어지는 PC주의 담론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것과 결을 같이한다. 소수자를 비하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그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던 이들을 문화 콘텐츠에 등장시키는 것 등이 대표적인 미디어 분야에서의 PC주의적 시도다.
업계 또한 이러한 흐름에 올라탄 듯한 모양새다. 젠더, 인종, 퀴어, 세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수자가 전면에 드러나는 콘텐츠가 제작됐다. 마블이 처음으로 제작한 흑인 히어로 단독 주연 영화인 《블랙팬서》(2018)는 북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아시아계 이주민의 삶을 은유한 애니메이션 《엘리멘탈》(2023)에서는 주인공 앰버가 4원소 중 불의 원소로서 다인종이 모여 사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이주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처럼 소수자를 가시화하려는 시도가 쌓이며 이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품에서도 소수자 정체성을 암시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백인 남성이 등장인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미디어 업계는 왜 이러한 시도를 이어가는 것일까? 세종대 한송희 교수(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는 “업계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상업성이나 대중성과 떼어놓고 이해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대중들이 원하니 일단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현재 “문화 생산자와 수용자 모두에게서 소수자를 가시화하는 걸 무작정 PC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쉽게 관찰된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자가 등장하는 콘텐츠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평가하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밝혔다. 더 많은 고민과 정교한 사고 없이는 잡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미디어 콘텐츠가 PC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예술은 그런 가치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소수자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과연 ‘PC한가 아닌가’하는 문제를 두고 잇따라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소수자가 등장하는 모든 예술 작품에 ‘PC한 콘텐츠’라는 칭호가 붙어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고, 더 나아가 이러한 콘텐츠에 대한 반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백래시(Backlash)’ 경향이 담론을 장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는 디즈니의 《인어공주》(2023)는 개봉 전부터 반 PC주의 논쟁의 중심에 섰다. 원작에서의 묘사와 달리 유색인종 배우가 주인공 아리엘 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캐스팅 이후 여러 혐오 발언이 쏟아졌고, 디즈니는 ‘덴마크인 인어도 흑인일 수 있다’며 논란에 적극 반박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PC주의가 콘텐츠에 소수자를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 원작을 해친다는 반 PC주의 논쟁으로 확대됐다.
마블도 비판을 피할 순 없었다. 마블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영화 《캡틴 마블》(2019)은 여성이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서사로 점철된 페미니즘 영화라는 비합리적인 비평에 마주해야만 했다. 한송희 교수는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연구에서 ‘동양인·흑인·성소수자가 등장한다거나, 늘 언제나 백인이었던 인물이 흑인으로 바뀌었다는 것 등’을 주된 근거로 ‘정치적 올바름은 나쁘며 마블은 그런 ‘나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재의 PC주의 비판 담론의 요지라고 설명한다.
게임 또한 반 PC주의 논쟁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다. 게임 ‘오버워치’를 제작한 기업 블리자드는 만화를 통해 오버워치의 캐릭터인 트레이서와 파라, 바티스트 등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냈다. 오버워치 총괄 프로듀서인 제프 카플란이 ‘캐릭터 중 성소수자가 다수 존재할 것’이라 말하며 사용자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졌다. 지금까지 캐릭터의 성 정체성에 대한 암시가 없었고, 게임 속 서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반 PC주의가 향하는 곳에는 허상만이
“PC 묻은 영화 안 사요.” 《인어공주》, 《캡틴 마블》 등 일명 ‘PC한’ 콘텐츠는 단지 기존의 미디어 지형에서 빗겨나 있었던 소수자를 콘텐츠 전면에 내세웠다는 이유만으로 반 PC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이들은 왜 PC주의가 미디어와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PC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논거는 무엇인지 살펴봤다.

PC주의가 결국 검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뿐이지만 이것이 ‘등장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어지면 검열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다양성을 억제할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소수자를 포함한 다양한 인물의 가시화가 곧 PC와 같은 의미라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한송희 교수는 “양적 팽창이 질적 성숙과 동의어인 건 아니다”라며 “표상의 수가 많아지는 것만큼 하나의 표상이라도 더 입체적이고 다층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영화가 PC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등장 이상의 논의가 필요한데, 이러한 고민 없이 단순히 소수자 가시화가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검열에 닿을 것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눈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는 무시한 채 최악의 상황만을 상상하는 논리의 비약일 뿐이다.
반 PC주의를 지탱하는 또 다른 논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콘텐츠는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이는 PC와 예술적 가치를 양립 불가능하다고 간주하고 양자 사이의 위계를 상정하는 ‘예술 지상주의’에 기반한다. 동시에 PC와 미학적 완성도를 인과 관계로 설정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PC가 영화를 망친다’는 서술을 뒤집을 만한 반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기존에 과대 대표됐던 백인 남성이 아닌 주인공과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겨울왕국》(2013)이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히려 시류에 편승하려는 의도 하나만을 가지고 도덕적이고 동시에 예술적인 숙고 없이 콘텐츠를 제작한 것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동시에 유색인종이나 여성을 내세우면 모두 PC라고 여기는 단선적 이해 또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 가시화 시도에 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예술에서도 보고 싶지 않다”고 거부하는 것 또한 발전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다. 예술과 현실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예술이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결국 예술이 성역화돼 자기 안의 세계로 침잠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한송희 교수는 “미학적인 것을 이유로 PC를 배척할 때 현실의 누군가는 삶다운 삶을 계속해서 유예 당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PC와 실제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예술의 영역에서 점차 지워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국 PC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콘텐츠란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만이 남는다. 오랫동안 소수자는 미디어에서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도구적 장치로 사용되거나, 특정한 속성을 강조한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해 왔다. 대중매체에서 숱하게 등장해 온 게이 캐릭터는 높은 목소리에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등의 특징으로 정형화됐고, 자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됐다. 이전에도 미디어에서 소수자는 등장했지만, 이러한 소수자 재현에 대해 ‘소수자가 미디어에 등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PC주의적 콘텐츠’라고 불편해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차별적 시선으로 재현된 결과는 함께 즐기고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거부할 때, 이들이 말하는 반 PC주의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임을 증명한다.
한국에서 PC주의는 곧 페미니즘?
국내에서의 반 PC주의 논쟁을 분석할 때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맥락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PC 담론에서 대중들은 젠더와 인종 측면에서의 다양성 추구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PC는 페미니즘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특히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무조건 여성 서사로 취급하거나 ‘페미니즘 콘텐츠’라고 명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비난을 정당화하는 낙인처럼 활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수아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 콘텐츠는 곧 나쁜 콘텐츠’라는 식으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송희 교수 또한 “PC에 대한 반감이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갈등과 교차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짚으며 “이는 해외에서의 PC 논의가 인종이나 계급 문제에 밀착해 전개된다는 점과 대비된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만이 가지는 특수성의 발로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서 PC주의는 곧 페미니즘으로 여겨지는가? 한송희 교수는 반 PC주의 성향을 보이는 남성들이 공유하는 ‘남성 약자 내러티브’에서 그 답을 찾는다. 이들은 소수자가 미디어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을 기존에 콘텐츠의 전면에 등장했던 기득권, 즉 남성층이 지워진다는 사실로 이해하면서 약자성을 공유하고, 여성 서사와 젠더 다양성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과정에서 소수자가 가시화된 콘텐츠는 한쪽만을 부각한 불평등한 것이 된다. 평등의 개념을 의도적으로 전유하는 전형적인 백래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남성 약자 내러티브가 인종의 측면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PC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역할에 유색인종을 캐스팅한 것이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한다. 한송희 교수는 이러한 반응에 대해 “한국에서 반 PC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다른 문화권과 달리 인종 문제에 관해 백인에게 이입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이 자신을 권력자에게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 교수는 “반PC 담론이 단지 반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띠는 것만이 아니라 인종주의·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반PC 담론이 어떤 권력관계든 권력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채 전개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담론이 공유되며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이 백인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고, 현실에 실재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또한 가려진다. ‘과도한 PC함’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진정한 다양성으로
현재의 PC주의 담론은 찬반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경향이 짙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PC주의는 옳은가, PC주의가 예술성을 저해하는가, PC와 예술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와 같이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마치 답이 정해진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무조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콘텐츠라고 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협소하고 단편적인 논의의 연속일 뿐이다.
결국 논쟁을 입체화할 필요가 있다. 한송희 교수는 “PC가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그것이 특정 소수만을 위한 배타적 올바름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전체를 위한 보편적 올바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등 구체적인 질문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PC를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추구할 수 있을지,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논의하기 위해선 단편적이고 빈곤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현재의 담론 지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업계의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많은 제작사는 기존에 존재하던 인물을 여성, 유색인종, 퀴어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소수자를 등장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는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내세울 뿐 소수자 가시화와 재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 제작 방식일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한영문화콘텐츠전공)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디즈니의 행보에 대해 ‘계몽적 프로파간다로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한다고 해서 설득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종 교체라는 쉬운 방법보다 우리 시대와 정서를 반영하는, 우리 곁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수자가 등장하는 것은 곧 PC주의’라는 납작한 이해에서 벗어날 때다. ‘소수자가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편협하고 고민 없는 PC 추구에서도 한 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한송희 교수는 “PC는 사상이나 학문 체계 안에서 맴도는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차별이나 억압과 관련하는 실천적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현재의 반 PC주의가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PC가 아닌 왜곡된 개념일 뿐이다.
콘텐츠에 등장하는 소수자와 이들이 제시하는 문제들이 내 삶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자각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가 배제된 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콘텐츠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평하는 얕은 논의로는 영화가 추동하는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현실과 유리된 예술은 허상을 좇을 뿐이고, 그 허상은 현실에 실재하는 진짜 문제를 가린다. ‘PC함’을 전부 지워낸 예술은 결국 어떠한 삶의 모습도 담아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