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둘도 많다!’의 시절을 지나,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로 가기까지. 출산 억제에서 출산 장려로 방향은 바뀌었지만, 한국의 인구정책은 국가의 인구 목표를 위해 다양한 이름으로 꾸준히 진행돼 왔다. 그 수많은 표어와 포스터들 아래 묻혀있던 논의가 있다. 개인이 자신의 재생산과 관련한 사항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 재생산권에 대한 이야기다.
합계출산율 0.78명. 심각한 ‘저출생 사회’가 된 지 오래인 한국은 현재 출생률 높이기에 열심이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아이를 낳을 결심도 하지 못하는 사회, 낳더라도 기를 수 없는 사회, 개인이 재생산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인 것은 아닐까. 권리로서의 재생산이 충분히 실현되고 모든 개인이 재생산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한국 사회는 불가능한 상상일까. 한국 사회와 재생산 권리를 자세히 살펴봤다.
한국 사회에서 재생산권이란
재생산에 관한 권리가 인권임을 처음 명시한 것은 1994년 카이로에서 개최된 국제인구개발회의에서 채택된 카이로 행동강령이다. 카이로 행동강령에 따르면 재생산권이란 ‘모든 연인이나 개인이 자녀의 수와 터울, 시기를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정보와 수단을 가질 권리, 최상의 성과 재생산 건강을 누릴 권리’다. 자신의 신체에 관한 의사 결정권, 관련 정보에의 접근성뿐만 아니라 강간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포함하는 넓은 권리인 것이다. 특히 카이로 행동강령은 재생산권이 국가들의 법체계 내에서 이미 인권으로 확립된 개념임을 강조한다. 젠더법학을 연구하는 장다혜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재생산권이 “자유권, 평등권, 사회권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며, “자유권적 측면인 자기결정권, 평등권적 측면인 폭력이나 차별 없이 이를 누릴 권리, 사회권적 측면인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보장할 의무가 재생산권의 개념에 모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재생산권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낙태죄 폐지 운동이 본격화된 2016년 가을이다. 그해 9월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것이라 예고했다. 비도덕적 진료 행위에는 모자보건법상 허용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인공임신중절이 포함됐다. 여성들이 모자보건법상 허용사유에 규정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임신 중지로 내몰리는 처지를 고려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윤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을 권리를 현저하게 침해하는 결정이기도 했다. 이에 여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와 “여성의 몸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포괄적 재생산권 보장을 요구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당시 행정자치부가 대한민국 출산지도 서비스의 일종으로 지역별 가임기 여성의 숫자를 시각화한 지도를 만들어 공개한 일도 있었다. 소위 ‘가임기 여성 지도’에 많은 여성들이 분노했다.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는 관점의 저출산이라는 단어 대신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쓰자는 움직임도 이때부터 일어났다. 배은경 교수(사회학과)는 2021년 발표한 「저출생의 문제제기를 통해 본 한국 인구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모색」 연구에서 이러한 전환의 의미는 여성들이 ‘국가가 자신들을 자기 생애와 재생산적 신체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위하는 주체로서 대우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봤다.

▲2016년 12월 행정자치부 홈페이지에 공개됐었던 ‘대한민국 출산 지도’ 중 가임기 여성 수 지도. 기초 지역자치단체별 가임기 여성 수를 구체적으로 표시했고, 많은 순으로 순위도 매겨져 있다. Ⓒ당시 행정자치부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라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2017헌바127 결정문에서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임을 인정했다. 또한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 낙태를 금지하기보다 ‘출산과 육아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적, 사회구조적 불합리의 개선 등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고 실효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장다혜 교수는 “임신 중지가 인구 조절의 영역이 아니라 여성 건강, 가족 구성, 사회권 등과 관련된 쟁점이라는 측면들을 포괄하는 선언”이라고 본 결정의 의의를 짚었다. 이화여대 김선혜 교수(여성학과)는 임신 중지가 범죄로 규정돼 더욱 심한 낙인으로 여겨졌던 이전과는 달리, “다른 질병이나 건강 관리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적절한 의료 조치를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영역임을 확인”한 것이라 강조했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재생산권 논의에 크게 기여했다. 김선혜 교수는 낙태죄 헌법소원 과정이 임신 중지의 문제가 공적 영역에서 발화되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김 교수는 이 과정에서 “임신 중지가 한 개인의 문란한 성생활이나 섹슈얼리티의 위반과 같은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인생과 건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권리이자 다층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의 대안 입법이 즉각 이뤄지지 않으면서 활발히 확대될 수 있었던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도 주춤한 상태다. 재생산권 보장으로 가는 길에는 여전히 구조적 문제들이 놓여 있다.
인구 정책 속 재생산권은 어디에
한국은 재생산권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 초대센터장을 지내며 건강정책을 연구한 김새롬 교수(보건대학원)는 “국제적으로 재생산권을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기 전에도 한국의 보건의료 정책과 체계에서 모성 건강은 다뤄져 왔지만, 재생산 권리에 대한 고려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보건의료 분야에서 성·재생산 건강, 성·재생산 권리와 같은 표현이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재생산의 문제는 오랫동안 인구 정책에서만 다뤄졌다.
1960년대, 정부는 폭발적 인구 증가가 경제 성장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출산을 억제하는 방향의 가족계획사업을 시작했고, 1996년까지 계속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쳤다. 2000년대를 지나며 출생률이 점점 줄어들고 저출생이 사회문제화되면서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되고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과 같은 표어와 함께 출산 장려 정책이 이어졌다. 억제에서 장려로 방향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러한 인구 정책의 흐름 내내 개인의 몸, 특히 임신·출산과 관련된 여성의 몸은 철저히 국가적 통제와 계획의 대상이었다.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칠 때는 피임약과 피임 기술이 보급되던 장면이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는 오늘날에는 임신 중지 단속을 강화하는 장면으로 전환됐다. 출생과 관련된 국가 인구 정책의 대상으로 늘 여성만을 지목하며 여성을 ‘출산하는 몸’으로 도구화해온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시행되는 한편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성별분업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여성은 으레 출산과 양육을 희생보단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성스럽고 위대한 어머니로서 아이를 완벽히 키워내야 한다는 모성 신화는 사회 깊이 뿌리박혔다. 이에 대해 김선혜 교수는 “어머니가 되는 일이 외부적 압력과 기대로 인한 것이 아닌 온전한 개인의 행복이었던 적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출산이 개인의 행복이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요나 다름없는 국가나 가족의 기대 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전히 어머니가 되는 것을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기대에 따라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로 이해하는 여성들이 많다”며, “여성에게 임신, 출산, 양육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면 양육수당 지원과 같은 정책이 있어도 저출생이라는 큰 흐름이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간 지원금, 난임 지원, 임신 중지·피임 예방 등 출생을 늘리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여성 1명이 가임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는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지난해 0.78명에 다다랐다. 이 수치는 그동안의 시도가 아이를 낳고 싶고 낳을 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간의 저출생 극복 정책이 재생산권의 포괄적인 보장을 지향하지 못하고 재생산의 한 순간일 뿐인 임신·출산에만 집중하는 근시안적인 접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재생산은 임신·출산을 넘어 생애 전반에서 이뤄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따라서 저출생 극복을 위한 논의는 성차별적 노동 환경, 젠더 폭력, 경제적 문제 등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전반에서 재생산 권리가 보장되는지 살펴야 한다. 장다혜 교수는 특히 재생산권의 보장을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들 중 오늘날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주목했다. “개인이 노동자로서 살아가면서도 양육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베이비시터·친족 등 타인에게 맡겨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양육의 특성에 부쳐, 부족한 임금, 한없이 긴 노동시간, 아이를 키우는 이에게 불친절한 조직 문화로 점철된 오늘날 노동 현실에서 노동자와 양육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장 교수는 노동 환경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양육 지원금을 만능으로 여기는 작금의 방식을 비판하며 “출생률 저하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지표”라고 지적했다.
낳았으면 하는 아이, 안 낳았으면 하는 아이
지난 6월 감사원 정기감사에서는 2015년에서 2022년 사이 태어났으나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일명 ‘유령 아동’이 2,236명에 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말 그대로 출생 미등록 아동이기에 병원이 아닌 곳에서 태어난 아동들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이라 추정된다. 유령 아동의 존재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자, 의료기관이 직접 출생 정보를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해 출생신고 없이도 국가가 아동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하는 ‘출생통보제’와, 익명 출산을 보장하는 내용의 ‘위기 임신 및 보호 출산 지원과 아동 보호에 관한 특별법’(보호출산제)이 각각 지난 7월과 10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비슷한 시기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유지되던 영아 살해·유기죄도 폐지되면서 미등록 영아의 살해나 유기 시 일반 살해·유기죄가 적용돼 처벌이 대폭 강화됐다.

다만 출생 등록 중심의 해결책이나 처벌 강화로는 불충분하다는 비판도 연일 이어지고 있다. 출산과 양육은 결국 인간 생애의 연속적 과정 중 한 부분임에도, 이 같은 방안들은 출생 등록의 단편적 장면만을 떼어 만들어졌다. 생애 전반의 연속성을 고려하는 접근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행정 시스템에 등록된다고 해서 아이들이 알아서 자라는 것도, 기존 제도의 한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등록을 넘어 그 이후에 펼쳐지는 장면이 ‘양육할 만한 환경’이어야만 아동과 부모 모두의 실질적인 권리 보장이 가능하다. 오히려 짚어봐야 할 것은 왜 어떤 여성들은 아이들을 버려야 했고, 아이들은 아무 곳에도 등록되지 못했는지다.
어떤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이 적절한 때 중지되지 못해 출산으로 이어져 출생 등록을 포기했을 수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길어지는 입법 공백에,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임신 중지에 대한 정확하고 적절한 정보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채 원치 않거나 준비되지 않은 출산을 겪곤 한다. 김새롬 교수는 “형법상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의료 정책은 제자리걸음”이라며, 특히 임신 중지에 대한 의료 정보 제공 체계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나 포털사이트를 통해 본인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에 어떻게 접근 가능한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지 오래”인데도, “임신 중지 관련 의료 정보는 잘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임신 중지 관련 정보를 찾아보는 여성들은 혼란스럽거나 위축된 상태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아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사회적 낙인과 그에 맞물린 제도적 한계 역시 여성이 양육의 시작인 출생 등록을 포기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김선혜 교수는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정한 출산의 모습이 있다”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법률혼 관계에서의 출산, 그리고 아이를 뒷받침하고 키울 경제적 여력이 있을 때의 출산만이 권장돼, 그렇지 않은 경우 차별이나 낙인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미혼모 등 혼외 관계, 청소년, 장애인, 법적 시민권에 문제가 있는 이주민과 같이 보다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는 이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이한 몇몇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놓고 출생 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문제가 아니며, 한국에서 재생산 자체가 특정한 방식의 차별이나 위계적 관계에 놓인 탓에 출생 등록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국가가 생각하는 ‘낳았으면 하는 아이’가 따로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국가가 모두에게 똑같은 출산을 권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국가가 ‘낳았으면 하는 아이’는 법률혼 관계 내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다. 소위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설정된 한국의 가족, 재생산, 아동 관련 제도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제도 바깥 취약한 위치, 결혼의 테두리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등록 상태로 남아 현행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유다. 장다혜 교수는 “그동안의 특정 출산만을 정상적이라고 한정하던 시선들을 버리고, 정상가족이 아니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 더 나은 공적 돌봄 체계 등과 관련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재생산권의 미래를 상상하기
지금 이 순간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논의는 무엇일까. 장다혜 교수는 출산이 혼인 내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먼저 꼽았다. “다양한 가족 형태가 익숙한 사회에서야 법률혼의 특권들이 사라질 수 있기에 가족의 구성을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과 그에 따른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는 지난 6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가족구성권 3법이 발의됐다. 가족구성권 3법은 동성 간 혼인신고가 가능하게 하는 혼인평등법, 혼인 및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생활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생활동반자법, 임신을 원하는 여성이라면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보조생식술 등의 출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비혼출산지원법을 칭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가족·재생산 관련 제도에 반영된 우리 사회 속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그동안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가족공동체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난임 지원만을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보조생식술 관련 제도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골자인 비혼출산지원법의 경우, 그간 실제로는 불법이 아님에도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윤리 지침 등에 따라 자의적이고 관습적으로 제한돼 왔던 비혼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확장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법과 제도 차원에서 다뤄지는 재생산권 논의는 진전과 후퇴를 반복 중이다. 한국은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제20조에 따라 5년마다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수립하는데, 2021년에서 2025년에 걸쳐 시행하는 것으로 계획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는 처음으로 성·재생산권 개념이 포함되면서, 생애 전반에 걸친 건강 보장으로 정책 추진 방향이 전환됐다. 즉, 출산 장려에서 삶의 질 제고로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전 정부에서 만든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담긴 재생산권 보장의 방향을 역행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올해 3월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현 정부의 저출산 정책 추진 방향을 제시하며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목표보다는 결혼·출산·양육이 행복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사회 환경 조성을 목표로 설정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에 배울 교과서에서도 성평등과 다양성 포용 관련 표현들이 줄어든다. 교육부가 작년 12월 확정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통합사회 과목에서 성소수자가, 도덕 과목에서 성평등이, 보건 과목에서 재생산권과 섹슈얼리티라는 표현이 삭제된다. 이는 재생산권 보장의 근간이 되는 성평등한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지식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허민숙 여성학자 겸 국회 입법조사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생산 권리는 선택의 자유에 해당하는 기본적 권리’라며 ‘교육과정에서 관련 내용을 지우는 것은 이런 권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선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이 보장되고 각 사람이 자신의 존재 자체로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보장될 수 있음을 교육과정에서 익힐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논평을 내 다양성을 포용하고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교육과정의 마련을 촉구했다.
후퇴를 딛고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재생산권에 관한 이야기가 저출생 문제와만 연결돼 생애 전반에 걸친 폭넓은 권리 보장을 위한 논의가 축소돼선 안 된다. 장다혜 교수는 “저출생 문제와 관련해서만 재생산권이 다뤄진다는 것은 곧 재생산권의 수단화”라며, “재생산권은 출생률 제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에 대한 인권”임을 강조했다. 장 교수는 “수단적 논의를 넘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권 보장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환경을 꾸려나갈지를 토론하는 목적적 논의가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재생산권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장면과 정교하게 맞물린 기본적 권리다. 아무도 이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이 권리를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모두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계속해서 상상해야 한다. 이를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모두의 당면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