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 난 연극이 너무 좋아” 서문극회 paraíso가 사용하는 두레문예관 연습실 벽에 적힌 글귀다. 연극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 희곡이 본래 쓰인 언어 그대로 연극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대학 원어연극제에 참여하는 학생들 이야기다. 올해도 여덟 개의 극단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올해로 27회를 맞이하는 원어연극제 현장을 찾았다.
원어연극제가 시작된 것은 1997년이다. 외국어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한 원어연극제는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는 어문계열 학생들이 모여 매해 연극을 올리는 행사다. 코로나19 사태로 행사가 취소된 2020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원어연극제에 참여하는 극단은 여덟 곳으로, 인문대학의 어문학과에 적을 두는 극회 일곱에 (독문극회, 불문극회, 영문극회, 노문극회, 서문극회, 중문극회, 국문극회) 일문극회가 참여하고 있다.

이번 제27회 원어연극제는 8월 29일 노문극회의 공연을 시작으로 개막해, 9월 한 달 동안 14동 지하에 위치한 인문소극장에서 열렸다. 과거 원어연극제는 문화관, 두레문예관, 학생회관 등 여러 공연장을 옮겨 다녔지만, 14동이 지어진 이후부터는 14동 인문소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과거 공간이 부족해 임시 무대 등을 전전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상황이 나아졌지만, 모든 극회가 같은 장소를 사용하다 보니 무대 현장을 미리 답사하기 힘들다는 점은 약간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원어로 연극을 올리지만, 해당 언어의 어문학과 학생들만 참여하는 건 아니다. 인문대학이 아닌 다른 단과대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다. 심지어 해당 언어를 배운 적 없는 배우가 무대에 서기도 한다.
올해 원어연극제에서 공연한 여덟 극회 중 불문극회, 서문극회, 영문극회, 독문극회를 찾았다. 공연 소개와 함께, 배우 및 연출 인터뷰도 수록했다.
불문극회, théâtre fantastique, 「L’École des femmes(아내들의 학교)」
아르놀프는 오쟁이 진 남편은 되기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고아 소녀 아녜스를 데려와 자신이 원하는 아내로 키워낸다. 4살 때부터 아내가 지켜야 하는 긴 규정들을 교육했다. 모든 것은 그의 생각대로 흐르고 있었다. 아녜스와 오라스라는 녀석이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불문극회 théâtre fantastique(떼아트르 빵타스티끄)가 올해 원어연극제에서 선보인 희곡, 몰리에르의 「L’École des femmes」(「아내들의 학교」)는 여기서 시작한다.

몰리에르는 희곡 「아내들의 학교」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말한다. 아르놀프는 아내를 부속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무지 상태의 아녜스에게 자신의 가치체계를 주입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아르놀프를 무너뜨린 것은 그의 규정보다 더 엄정한 규정도, 강력한 힘도 아닌 오라스와 아녜스의 서로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다. 이를 통해 몰리에르는 인간의 본질에 반해 인간을 규제하는 일련의 행태를 비판하고자 했다. 또한 불합리한 가치체계의 주입을 스스로 자각하고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조명하고자 했다.
「아내들의 학교」는 불어로 상연될 때 특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17세기 프랑스 문학의 주류 운문 형식인 12음절 시구, 알렉상드랭(alexandrin)으로 이뤄진 대사들이 불어가 갖는 음악성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몰리에르는 비극에 주로 쓰이던 형식인 운문 5막극과 알렉상드랭을 희극에 사용해 희극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동시에 불어의 아름다움을 살렸다. 극 내내 관객들은 감탄하고 웃으며 몰리에르의 극이 갖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느꼈다. 몰리에르 탄생으로부터 약 400년, 그의 작품이 인문소극장에서 새로운 관객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배우 민재원, 문도희, 김혜윤 인터뷰
「아내들의 학교」에서 아르놀프, 죠르제트, 아녜스 역을 맡아 무대를 빛낸 민재원(불어불문 23), 문도희(소비자아동 23), 김혜윤(정치외교 23) 씨를 만나 몰리에르의 희곡과 원어연극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원어연극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재원《여인의 향기》(1974)에서 알 파치노의 독백 장면을 보고 압도당했고, 연기에 매력을 느꼈다.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품고 있다가 이번에 신입단원으로 참여했다.
도희연극에 도전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프랑스어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 불어를 몰라도 지원 가능하다는 공지에 속아 넘어가서 지원하게 된 것도 같다. (웃음)
혜윤고등학교 때 프랑스어를 전공했었는데, 대학에서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다보니 프랑스어를 활용할 기회가 적어 늘 아쉬웠었다. 그러던 와중 원어연극제를 알게 됐다.
연극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재원사랑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아르놀프가 되려 사랑에 정복당한다.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 앞에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적인 삶 아닐까.
도희규정이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녜스라는 인물의 성장도 그 자체로 큰 메시지다.
혜윤아녜스가 진실한 사랑을 찾으며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우리에게 지식뿐 아니라 지혜를 가져다준다.
본인이 맡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재원아르놀프는 두 면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다. 사람의 멱살을 잡고 무릎을 꿇리는 등 권위적이고 거만하다. 동시에 하인들과 아녜스에게 속아 우스꽝스러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도희아르놀프가 무릎을 꿇리고 멱살을 잡는 하녀, 죠르제트는 연극의 가벼운 면을 담당한다. 본인은 진지한데 옆에서 보면 웃기다. 순수하기에 자기 멋대로 하는 인물로 해석했다.
혜윤아녜스는 초반에 순수하지만 약간은 무식한 인물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오라스와의 교류를 늘려가고, 아르놀프에게 저항하기까지 이른다. 17세기 문학에서는 흔치 않은 입체적 인물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무엇인가.
재원아르놀프가 화가 나서 아녜스를 때리려다, 그 순간 아녜스의 눈빛에 반해서 차마 못 때리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권위적이었던 인물이 사랑 앞에서 나약해진 모습이 매력적이다.
도희오라스가 집에 오는 걸 막으라고 아르놀프가 하인들을 교육시키는 장면이다. 그 과정에서 아르놀프가 죠르제트와 알랭에 의해 밀고 밀쳐진다. 인물들은 진지하나 관객들은 웃긴 장면으로, 작품의 희극적 특성이 잘 나타난다.
혜윤아녜스가 아르놀프와 언제 결혼하냐고 묻자 아르놀프가 이번 저녁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은 곧장 손을 잡고 돌며 즐거워한다. 그때 한 대사인 “Dès ce soir”(“이번 저녁이요!”)가 극회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밈이 되기도 했다.
(본인 참여 제외) 올해 원어연극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연이 무엇인가.
재원노문극회의 「старший сын」(「장남」)이다. 감동과 유머가 공존하는 멋진 공연이었다.
도희국문극회의 「북어대가리」다. 국문 연극이 원어연극제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극이었다.
혜윤독문극회 「Die Physiker」(「물리학자들」)이 좋았다. 추리적 요소와 윤리적인 질문 등 현대극이 담을 수 있는 복합적인 주제와 인물의 다양성이 충분히 녹아있었다.
본인에게 원어연극제란 어떤 의미인가.
재원원어연극제의 의미는 옛날의 극이 갖는 재미와 원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그 언어만의 아름다움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 최고의 선택이자 선물이었다.
도희배우가 아니었던 사람이 배우가 되기까지, 정말 길고 압축적인 여름을 보냈다. 언어의 장벽도 있었다. 모두 마친 지금은 프랑스어에 익숙해졌고,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났다.
혜윤오리엔테이션에서 ‘원어연극제는 뼈를 갈아 넣어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한번 갈아 넣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었다. 실제로 골수까지 갈아 넣은 기분이고 성취감이 크다.
영문극회 bdg, 「Angels in America(미국의 천사들)」
영문극회 bdg는 도전적인 희곡 선정으로 원어연극제 시작 전부터 화제가 됐다. 「Angels in America」(「미국의 천사들」)를 올린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천사들」은 미국의 극작가 토니 쿠슈너의 대표작으로, 전체 분량이 8시간이 넘을 정도로 길어 1부와 2부로 나눠 공연하도록 돼 있다. bdg는 1부와 2부를 합친 전체 연극을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분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각색했지만, 공연 시간은 이번 원어연극제에서 가장 긴 4시간에 달했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공연 시간이었지만, 인문소극장은 연극을 보러 온 관객으로 가득 찼다.

「미국의 천사들」은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게이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연극의 배경인 1980년대는 에이즈가 미국에서 처음 알려진 시기다. 당시에는 에이즈의 치료법이 없어 에이즈에 감염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미국 전역에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확산됐다. 한편 게이들이 주로 걸린다는 점 때문에 이 질병에는 종교와 도덕을 가장한 동성애 혐오가 가해졌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은 에이즈 사태에 대해 소극적으로 보도했으며, 정치권 또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을 외면했다. 그 결과 에이즈 환자들은 의료 보험조차 누리지 못하고 차별적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암울한 시대를 바탕으로, 「미국의 천사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삶을 비극적이면서도 생생하게 그려낸다. 에이즈에 걸리고 애인에게까지 버림받는 프라이어, 결혼한 몰몬교 신자지만 뒤늦게 성적 지향을 깨닫는 조, 에이즈 감염 사실을 숨기고 동성애자 탄압에 앞장선 로이 등 인물들은 차별적인 사회에서 소수자들이 마주해야 했던 경험들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천사들」은 지난 2021년 국립극단이 1부를 초연했으나, 2022년에 예정돼 있던 2부 공연이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면서 국내에선 한번도 온전히 상연된 적 없는 작품이다. 연극 전체를 무대에 올린 것은 이번 영문극회의 공연이 처음인 셈이다. 40여년 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연극이지만, 「미국의 천사들」이 묘사하는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은 오늘날의 사회에도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는 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연출 이나라 인터뷰
「미국의 천사들」이라는 쉽지 않은 희곡을 연극으로 구현한 이나라(영어영문 22) 연출에게 희곡과 원어연극제에 대해 물었다.

원어연극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작품을 해석하고, 연기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들과 마음을 맞춰가는 과정이 즐거워 참여하고 있다.
이 희곡을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젠더프리 캐스팅을 해온 bdg는 항상 고전적인 작품에서 시의성 있는 메시지를 찾으려 노력했다. 올해는 1980년대 보수적이었던 정부가 외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선택을 해 봤다. 「미국의 천사들」은 동성애, 에이즈,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등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그저 이론에만 머물거나 시혜성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매력적인 극이다.
연극의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천사들」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삶은 끔찍하고 사회는 삶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자고 간청하는 연극이기도 하다.
「미국의 천사들」은 어떤 희곡이라고 해석했나.
지독하게 얽힌 모든 관계들의 필연성, 처절함, 그리고 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는 희곡이다. 결국 그 어떤 인물도 미워할 수 없음을,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인물에 이입하더라도 울림을 주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무엇인가.
하나만 꼽기 너무 어렵지만, 마지막 장면을 고르고 싶다. ‘나는 살 테니 축복해달라’고 말하는 프라이어의 대사가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하퍼로 시작해 하퍼로 끝나도록 한 각색도 마음에 든다. 제일 짠한 장면은 로이 콘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가 로이 콘의 환영에게 안기는 장면이 가장 이입이 됐다.
본인에게 원어연극제란 어떤 의미인가.
1년에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다.
서문극회 paraíso, 「Los Intereses Creados(이해관계)」
독특한 효과음, 과장된 몸짓과 말투, 단순한 플롯과 유쾌한 시놉시스. 서문극회 paraíso(빠라이소)가 올해 원어연극제에서 선보인 연극은 우화적인 희극이자 ‘꼭두각시극’이라고도 불리는 스페인의 대표 소극, 「Los Intereses Creados(이해관계)」다.
「이해관계」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상을 각각의 인물이 맡아 표현하고, 이들의 관계와 갈등을 통해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풍자적인 성격이 강하다. 연출자 또한 무대에 직접 등장해 모든 등장인물이 특정 인간상을 대표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전달한다. 공연의 막이 오르고, 무대 위 두 명의 연출자가 직접 인물을 소개하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 뒤로는 배우들이 소품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시작을 준비한다. 독특한 도입은 이들이 현실이 아닌 풍자‘극’을 진행할 것임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다.

「이해관계」는 모든 걸 잃고 한 마을을 찾은 두 청년 레안드로와 끄리스삔이 돈을 벌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고귀한 나리와 충실한 하인이라는 거짓된 신분으로 소개하며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 모든 과정을 설계한 똑똑하고 교활한 끄리스삔은 마을 사람들을 조종해 지낼 집부터 먹을 음식, 사용할 돈까지 모두 얻어낸다. 레안도르를 고귀한 나리로 꾸미고 극진히 모시며 자신의 목적대로 행동하도록 만든 것 역시 끄리스삔이다. 그러나 레안드로가 진정한 사랑, 실비아를 만난 뒤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끄리스삔은 점차 자아를 찾아가는 레안드로를 막고 원래의 목적인 돈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다 결국 레안드로마저 살해하고 만다.
짜임새 있는 극본에 스페인어 특유의 빠른 대사 속도, 이곳저곳 숨겨진 유머와 과장되고 해학적인 연기가 합쳐져, 극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마을을 속이는 거대한 규모의 사기극을 미소 지으며 보게 만드는 소극의 힘이 「이해관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배우 김형민 인터뷰
원어연극제가 막을 내린 지 2주가 지난 어느 날, 「이해관계」에서 주인공 ‘끄리스삔’을 연기한 배우 김형민(서어서문 23) 씨를 만났다. 무대 위에서 관객을 휘어잡는 에너지를 발산하던 그는 그날의 감동을 오롯이 간직한 채 시종일관 벅찬 표정으로 자신의 첫 무대 경험을 풀어냈다. 김 씨에게 서문극회와 원어연극제는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원어연극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학기 초에 만난 선배들이 항상 원어연극제는 1학년 때 꼭 해봐야 하는 좋은 경험이라고 추천했다. 작년 서어서문학과 22학번들도 거의 전원이 서문극회에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했다. 다들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고 해서 고민 없이 참여했다. 1학년이 아니면 방학을 모두 연습에 할애할 여유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해관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해관계」에는 정형화된 인간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돈을 탐하는 인물, 뜬구름을 좇는 인물,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 허상에 빠져 사는 인물 등 그 모습은 다양하다. 또한,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전형적인 악역과 선역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누구의 편을 들기보다는 다양한 캐릭터에 스스로를 대입해 보고, 또 공감하면서 이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빠져들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레안드로의 애절함과 순수함에 감동을 받기도, 누군가는 끄리스삔의 냉정함과 교활함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관객들이 어떤 인물에도 100%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 함께 고민하고 상상해 보면서 극에 이입하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본인이 연기한 ‘끄리스삔’은 어떤 인물인가.
「이해관계」의 중심이 되는 플롯은 다양한 이해관계, 그중에서도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두고 ‘감정도 그저 이해관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 끄리스삔과 ‘사랑은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한 감정’이라고 믿는 레안드로의 갈등으로 극은 흘러간다. 끄리스삔은 돈을 갈취하기 위해 수많은 인물을 조종하는 능청스럽고 교활한 인물인데, 매 순간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는 냉정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타인의 감투를 쓰고 각 인물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는 것처럼 상황을 꾸며내기에 여러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본을 분석하다 보니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 뒤에 감춰진 끄리스삔의 외로움이 보였다. 끄리스삔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가족, 친구, 연인 등 자신의 짝꿍이 있다. 그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끄리스삔의 모습 또한 대본 곳곳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조종할 때는 확실하게 감투를 쓰지만, 유일하게 계획을 공유하고 있는 레안드로를 대할 때는 끄리스삔이 가진 어두움과 아픔이 잘 드러나게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극의 마지막 장면인 3막 13장을 좋아한다. 레안드로가 실비아와 결혼하고 끝나는 원작과 달리 각색 과정에서 추가된 장면인데, 끄리스삔은 진정한 사랑을 쟁취해 결혼까지 하게 된 레안드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도시를 떠나며, “사랑도 이해관계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감정 따위가 아닌 결합된 이해관계다.”라는 대사를 뱉는다. 극의 초반부터 이어져 왔던 끄리스삔과 레안드로의 갈등이 폭발하고, 대립 구도와 두 인물의 특징이 강조되는 장면이다. 또 끄리스삔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돈을 얻었음에도 레안드로를 죽여버린다는 점에서 관객은 의문을 품게 된다. 반전을 담은 이 장면에 애정이 갔다.
본인에게 원어연극제란 어떤 의미인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는 것이 매우 뜻깊었다. 두 달 내내 같은 사람들과 매일 몇 시간씩 모여서 연습하고, 대사를 주고받고, 피드백을 나누고, 밥도 함께 먹는 모든 과정이 정말 좋은 추억이자 값진 경험이었다. 공연을 올리기 전에도 이미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커튼콜 때 꽉 찬 객석이 보내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무대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행복감을 만끽했다. 원어연극제를 통해 벅차고 행복한 눈물로 가득한 두 달을 보낼 수 있었다.
독문극회 eS, 「Die Physiker(물리학자들)」
독문극회 eS는 희극 「Die Physiker」(「물리학자들」)를 무대에 올렸다. 「물리학자들」은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1961년 희곡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던 당시 시대 상황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극이 진행되는 배경은 정신병원의 한 병동이다. 이 병동에는 세 환자가 입원해 있는데, 솔로몬 왕의 계시를 받는다고 믿는 뫼비우스, 자신을 각각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고 믿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그들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물리학자들이 바로 이들로, 작중 인물들은 이들을 ‘물리학자들’이라고 부른다.
연극이 2막으로 넘어가면서 중요한 반전이 밝혀진다. 사실 세 주인공은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정말 물리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뫼비우스는 뛰어난 핵물리학자로, 오랜 연구 끝에 ‘모든 가능한 발명의 체계’를 완성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연구가 공개되면 세상의 파멸이 도래할 것임을 깨닫게 된다. 20세기 전반 물리학의 급격한 발전과 그 결과로 등장한 핵무기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리학자들」이 뫼비우스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과학자의 윤리, 자신의 학술적 연구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책임이다. 결국 뫼비우스는 자신의 연구를 영원히 비밀에 부치기 위해 정신질환자로 위장하고,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사실 환자들은 정신질환이 없으며 미쳐있는 것은 이들을 치료하는 의사였다는 중심 설정도 이어서 밝혀진다. 이 같은 전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물리학자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아이러니다. 뫼비우스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불태워 버리며, 간호사들은 자신의 환자를 도우려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브레히트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조리에 대한 뒤렌마트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연출 측면에서는 조명의 효과적인 사용이 눈에 띄었다. 조명의 색을 이용해 장면의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스포트라이트를 활용해 극적인 정서를 극대화하는 등 인문소극장의 조명기구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연출 박선윤 인터뷰
독문극회는 뒤렌마트의 희곡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원어연극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독문극회의 박선윤(독어독문 22) 연출을 만났다.

독문극회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대학에 입학한 이후 연극과 뮤지컬을 미친 듯이 보러 다녔다. 자연스럽게 원어연극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작년에 기획으로 처음 독문극회에 참여했다. 작년에는 행정적인 업무를 주로 맡았던 터라 올해는 직접 연극을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연출을 맡게 됐다. 조연출이나 음향 스탭을 할 생각이었지만 하고 싶은 게 많기도 했고 연출을 하겠다는 사람이 따로 없어서 내가 맡았다.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을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원어로 연극을 한다는 특성이 관객들에게 일종의 장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르는 언어더라도 연극을 최대한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이런 고민 끝에 진지하면서도 반전이 있고, 웃을 수 있는 요소도 많은 「물리학자들」을 골랐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극은 나름 희극이다. 한편으로 극을 선정할 때는 시의적인 맥락이 딱히 없었는데, 우연히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 시기와 상연 일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둘을 연관짓는 반응이 많아 재밌었다.
연극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사실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각해 본다면 가치관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연구자로서 가져야 하는 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인슈타인과 뉴턴은 각자의 이념을 가지고 대립하며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뫼비우스는 과학을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찬트 박사의 반대편에서 과학자의 윤리를 보여준다.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연출자로서 희곡을 어떻게 해석했나.
희곡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등장인물의 성별이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요소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과 뫼비우스가 남성 인물에서 여성 인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이들이 계속 남성 인물로 존재해야 하는지 아니면 인물의 캐릭터성만 가져와야 하는지 등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결국 모든 인물을 여성으로 바꿔서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개인적인 성향인 것 같은데, 연극 「오펀스」를 인상적으로 봤다. 그 연극도 남자인 인물을 여자로 바꿔 연출한 젠더프리 연극인데, 희곡에서 남성인 인물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인물을 다르게 해석하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연극을 볼 때 ‘저 인물이 여자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는 사람이다.
또 뒤렌마트 희곡이 옛날 희곡치고 주체적인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편이다. 「물리학자들」의 찬트 박사 같은 경우는 희곡에서도 여성으로 설정돼 있는데, 뒤렌마트 희곡 특유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만 뭔가 뒤틀린 여성 인물’이다. 과거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그것이 여성 인물에 의해 전복되면서 희극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점이 뒤렌마트 희곡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무엇인가.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배우가 계속 말하는 장면인데, 연출을 하면서 스스로 세뇌하듯이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디렉팅을 했다. 각자의 신념을 스스로에게 세뇌하면서 영원히 고립될 준비를 하는 장면, 미친 것처럼 가장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좋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장면을 꼽는다면 1막의 마지막에서 뫼비우스가 간호사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모든 스탭들이 가장 집중해 만들어냈다. 희곡에서도 이 장면이 조용하면서도 기괴하게 표현돼 있다. 그래서 섬뜩함이 잘 표현되도록 노력했다. 조명, 음악, 연기가 모두 어우러져야 하는 장면이라 신경을 많이 썼다. 무대에 올리기 10분 전까지도 고민이 많았는데, 잘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올해 원어연극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다른 공연은 무엇인가.
일문극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독문극회는 항상 치정, 정신질환, 살인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일문극회는 매우 잔잔한 희곡으로 공연을 했다. 독문극회가 표현할 수 없는 서정적인 것을 잘 보여준 것 같다. 조명의 색을 활용한 연출과 다다미를 깐 무대 미술도 정말 좋았다.
나에게 원어연극제란?
‘기억미화’다. 모든 연극이 그렇겠지만 연습 가기 싫고, 공연 당일까지도 ‘이게 될까’, ‘접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공연을 올리면 또 잘 된다. 그러고 나면 ‘나름 괜찮았다’, ‘내년에 또 하자’ 이렇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