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열렬히 좋아하는 것, 남몰래 가슴 뛰는 것. 많은 이들에게 서브컬처의 향유는 취미 이상이다. 누군가는 만화로 인생을 배우고, 친구를 만나고, 꿈을 꿨다고 말한다. 서브컬처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양도 다양한 욕망과 애정을 보이는 문화다. 이 속에서 대중은 무엇을 좇고 어떻게 욕망하며,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
오타쿠문화 연구, 만화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사회를 세밀하게 살펴 온 인류학자 김효진 교수(일본연구소)를 만나, 지금 여기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서브컬처의 풍경을 그려봤다.

소개를 부탁드린다. 일본연구소에서 무엇을 연구하고 또 가르치고 있나.
일본연구소는 근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전반적인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대중문화, 오타쿠문화와 후조시문화*에 집중하는 중이다. 대중문화 연구는 보통 영화나 문학작품 같은 특정 텍스트의 분석이 중심이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인류학의 접근으로 대중문화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무언가 활동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특히 오타쿠들이 하는 이벤트 같은 것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 그런 이벤트 중심의 오타쿠문화가 일본의 지역 활성화와 이어지는 사례들도 있는데, 오타쿠문화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해왔던 일본 지역연구와도 맞닿는 부분이라 개인적으로 즐겁게 여기고 있다.
사실 어릴 적부터 소녀만화와 순정만화를 무척 좋아해 만화책을 가득 수집하는 오타쿠였다.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과 오타쿠 당사자로서의 욕심으로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후조시문화: 서브컬처에서 남성 동성애 서사를 향유하기를 즐기는, 향유의 주체가 주로 여성들인 문화
서브컬처의 구체적인 정의나 범위가 궁금하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매체의 향유와 그에 파생되는 여러 생산과 소비 활동 정도로 이해되는데.
사실 사회학 연구나 문화연구에서 정의하는 서브컬처(subculture)의 엄밀한 개념은 대중적인 이해와 어긋난다. 서브컬처는 부모 문화라 불리는 주류문화에서 파생된 하위문화 전반을 의미한다. 주류문화보다 작은 하위의 단위에서, 주류문화에 저항하면서, 젊은 세대나 주류사회의 소수자가 많이 만들어 내는 문화다. 일본을 예로 들면 1960-70년대 폭주족 문화나 갸루문화 같은 것이 서브컬처인 거다.
서브컬처가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미디어콘텐츠와 그 향유를 일컫는 말은 전혀 아닌 셈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렇게 주류사회에서 어린 것으로 취급되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미디어콘텐츠 전반을 서브컬처라고 부른다. 서브컬처라는 이름이 붙는 문화의 범위가 본래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이해되고 있다. 일본의 유명한 철학자인 아즈마 히로키가 저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7)에서 서브컬처가 곧 오타쿠들이 애호하는 미디어콘텐츠인 것으로 설명한 이후로 이래저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런 다양한 용법과 혼재된 이해엔 특수한 맥락이 있을 것이므로, 동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서브컬처 개념의 역사를 추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브컬처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를 하고 있다. 일본문화를 분석하는 렌즈로서 서브컬처는 어떤 렌즈인가. 일본연구에서 서브컬처가 특히 중요한 이유도 궁금하다.
앞서 말한 서브컬처의 혼재된 이해에 따라 다양한 하위문화를 일컫는 본래 의미의 서브컬처부터 따져보자면, 비주류가 가시화되기 어려운 경향이 있는 일본 사회에서는 서브컬처를 통해 사회의 단면을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 같다. 주류사회에서 배제되는 마이너리티의 문화를 살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디어콘텐츠의 향유로서의 서브컬처와 그에 따른 오타쿠문화나 후조시문화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를 해나가는 것의 의미는 한국 사회와 특히 관련이 깊다고 본다. 많은 한국인들이 서브컬처를 통해 일본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적극적인 향유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는 미묘한 위치에 있지 않나. 과거엔 불법이기까지 했는데, 금지된 상황에서도 젊은 세대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고, 직접 가져오곤 했다. 만약 당시에 서브컬처의 수입이 문화산업 영역에서 제도적으로 가능했다면 잘 팔리는 것만 알아서 수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여러 금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원하는 것,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을 소비자가 직접 들여올 수 있었다는 측면도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이해할 때 대중이 적극적으로 원해서 수입된, 능동적인 문화적 실천으로서 서브컬처와 오타쿠문화를 생각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일본 대중문화의 열렬한 수용자로서 한국인, 그리고 한국 사회의 변화. 이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매력이 있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까?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과 매력이 있는 작품은 뭘까? 늘 궁금한 지점이다. 물론 한일 양국 사이 복잡한 역사성과 정치·외교적 사정으로 인해 서브컬처에의 주목이 정당성 측면에서도 자주 위축되곤 한다. 문화 연구, 그 중에서도 서브컬처 연구가 복잡한 현실 세계에 비해 한가로운 연구인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이자 세상을 보는 눈을, 세계관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현실과 밀접하다. 역설적으로 서브컬처라는 문화의 장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최근 한일 양국을 뒤흔든 작품은 『슬램덩크』 같은데. 30여 년 만에 개봉한 극장판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와 원작만화의 국경이 무색한 흥행을 어떻게 봤나.
과거의 어떤 작품이 젊은 세대에서 크게 흥행했다는 것은 현재에는 없는 어떤 것, 낭만과 자유에 대한 것이 작품에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보여주듯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들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 분석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극장판 주인공인 송태섭(일본명 미야기 료타)이 오키나와 출신으로 그려진 것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라는 공통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팬덤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고 본다.
흥행 자체에는 한일 관계의 영향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현 정부의 대일 정책이 여러 문제와 비판을 직면하고 있긴 하지만 일단은 일본과 ‘미래지향적’ 관계를 갖겠다고 말한 영향인지 언론에서도 일본 대중문화의 흥행을 두고 늘 제기되던 역사 인식 부재에 대한 비판 등 팬덤을 향한 공격적인 여론도 덜 했던 것 같다. 국내 언론 보도들도 흥행 현상 자체에만 집중해 보도한 편이다.

단순 관람 차원의 흥행뿐 아니라 관련 동인문화**, 팬덤 공동체가 한국 사회에 무척 크게 자리 잡기도 했는데.
원작 만화가 연재되던 당시 국내의 동인문화는 일본의 것들을 가져오며 그것이 퍼져나가는 구도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인지 동시적으로 모든 것이 향유되고 있다. 팬덤에서도 일본과 한국, 중국이 동등하게 교류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특히 한국은 케이팝 팬덤 문화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 팬덤에서 만들어진 해석이나 동인 설정이 일본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주인공의 고등학교인 북산고의 정대만과 상대 팀이었던 산왕공고의 이명헌, 최동오 세 캐릭터의 조합이 비공식적인 설정으로 유행한 바 있지 않나. 세 사람이 졸업 후 같은 대학 농구부에 진학한다면 재밌을 것이라는 상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일본 동인 팬들도 상상도 못 한 설정이라며 재밌어했다. 사실 일본 현지의 사정과 원작을 생각해 본다면 실현 가능한 조합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이 서울에 몰려있고 농구부가 있는 학교가 적으니 비슷한 대학을 지망하고 대학에서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상이지만, 일본은 주로 사는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고 농구부도 훨씬 많다. 최동오, 정대만, 이명헌은 대학에서 만날 수 있으나 마츠모토, 미츠이, 후카츠(각 캐릭터의 원어 이름)는 대학에서 만날 수 없는 셈이다. 이런 순간들이 무척 재밌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캐릭터나 관계성, 커플링이 지금에서는 많이 달라진 부분도 관찰된다.
** 동인문화: 같은 취미나 뜻을 공유하는 동인(同人)들이 아마추어 출판물인 동인지를 내고, 함께 향유하는 문학계의 문화를 지칭한다. 본래 의미를 기반으로 서브컬처 내에서 기존 작품의 2차 창작물 등을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꼭 출판물 형태의 동인지를 발간하지 않더라도 감상과 비평, (주로 성애적인) 새로운 관계성을 발굴하는 해석의 공유 등을 포함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가 최근 개봉하면서 일본의 작품이 말하는 반전 윤리의 정당성에 질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일 양국의 국가적 맥락이 문화콘텐츠 소비에서도 반복적으로 복잡성을 가져다주는데, 보다 나아간 논의가 가능할까.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인이 전쟁에 관한, 근현대의 과거사에 관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비판적인 의식을 갖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반전의 메시지를 담는 작품에 있어서는 반전을 말할 자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본의 콘텐츠에서 전쟁을 발화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을 때 위축되는 것은 늘 일본의 양심적이고 의식적인 창작자들인 편이다. 정말 문제적인 발언과 창작을 이어가는 우익 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재 자체나 표현 자체에 대해 판단 내리기보다 그다음 단계의 정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우선 나와야 비판과 독해도 가능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이 자신이 체험한 근현대,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가 진짜 문제 아니겠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경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자신이 겪은 전후에 대한 자전적인 감각을 명확하게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쟁을 저지른 주체가 그려지지 않았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전쟁 당시에 어린 나이였던 감독이 실제로 겪은 전쟁이란 그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본다. 과거 역사의 재현 문제를 둘러싼 쟁점 중 하나는 개개인의 아주 실제적인 감각에 대해서는 덜 말하려는 경향인 것 같다. 거대한 역사적인 서사가 있고 개인의 경험이 그것에 배치될 수도 있는데, 그런 순간을 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가 얘기될 필요가 있다.

서브컬처의 중요한 한 축인 동인문화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다. BL(Boy’s Love) 만화 등 서브컬처를 즐기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남성 동성애 서사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여러 생산과 소비는 매우 오랜 문화인데, 어떤 기원과 맥락이 있을까.
역사가 깊은 만큼 저마다 감각이 다를 텐데, 90년대 초반이라든지 BL 작품의 소비 및 생산이 흔하지 않았던 때와 비교해 요즘 세대의 감각은 완전히 다르다고 본다. 워낙 다양한 매체가 있고, 그중에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지 않나. 어떤 콘텐츠든 얼마든지 보려면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신에게 더 재밌는 것을 고르는 것뿐이다. 오늘날 BL을 즐기는 여성들 개개인에게 이 매체가 어떤 의미고 어떤 쾌락을 주는지,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는지를 고민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인 것 같다.
특히 한국에서는 성적인 매체가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BL이 그 역할을 대신해 왔다고 볼 수 있다. BL이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다양한 욕망과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때로 BL에서는 폭력적인 욕망이 표현되기도 한다. 거리감을 두고 이입하며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터부시됐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헤테로 로맨스나 여성성에 대해 탐구적인 작품은 이미 너무 많고, 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에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다. 보다 거리감이 있는 존재가 이입하기에도 편리하기에, 유지된 거리에서 인물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를 욕망하며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남성이 상징하는 사회적 권력, 자유나 남성성으로 정의되는 매력에 대한 추구도 분명히 있다. 그렇게 짜여있는 사회 구조 자체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BL과 퀴어 콘텐츠는 멀고도 가까운 것 같은데.
BL이 묘사하는 대상이 과연 무엇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골몰해 온 주제다. 현실의 게이를 참조해 묘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욕망을 투영하는, 사실은 여성이 생각하는 남성의 모습을 바라는 대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다. 사실 BL의 뿌리는 소녀만화에 있다고 본다. 남성성에 대한 여성의 해석, 여성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형태의 남성과 관계성을 그리는 것이 소녀만화의 문법이다. BL이 결코 퀴어 콘텐츠가 아니며, 현실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권익에 해롭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최근에는 그 경계가 점차 무너지고 있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BL보다도 사회 전체가 조장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점을 먼저 짚고 싶다. 또 최근에는 BL에서 어떤 당사자가 읽더라도 문제없는 사실성으로 그려내는 부분들도 관찰된다. BL에서 인물들을 그려내는 방식이 게이 당사자의 현실에서의 실천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2007~) 같은 BL 만화가 대표적이다.
상업 출판 영역의 BL 만화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했는데, 산업이 됐다는 것은 분명히 욕망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최근엔 태국의 BL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BL 장르가 만화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같은 3차원의 매체에서의 BL, 케이팝 RPS***, 특정 원작의 2차 창작은 각각 독자적인 영역으로, 별개의 논의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패러디의 영역인 2차 창작과 동인지 문화는 아마추어의 무대에 가깝지만, 대중의 욕망이 폭발하는 장이며 더 날 것의 해석과 비평, 창작이 모여든다. 딱히 작품화될 필요 없이 “너도 그 캐릭터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어?”라는 식의 주고받음이 많다. 케이팝 RPS는 현실의 산업과 아이돌과 접속돼 있다는 점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대상으로 하는 2차 창작과는 또 다르다. 다 각기 다른 욕망이다.
***RPS: 김효진 교수의 공저 『퀴어돌로지』(2021)에 따르면, ‘Real Person Slash’의 준말로 실존인물 간 연애를 픽션으로 묘사하는 모든 문화적 허용을 총칭하는 것이다.

서브컬처 속 욕망의 표현들이 윤리적인 정당성이나 규범과 부딪히고 극복하며 타협하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환상의 재현이 쉽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은 든다. 욕망과 표현에 대한 제약이나 그로 인한 강박과 위축이 큰 편이고, 창작물에 대한 비난이 작가나 창작물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 번 만들어진 표현은 가능성에 더 가깝다. 표현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고 활용되면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해방적인 측면을 갖게 되기도 한다. 창작자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면, 그걸 통해 다시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욕망들을 따라가는 가능성 속에서 좋은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대중이 서브컬처에 소비자라는 형태로만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문제이기도 하다. 소비자 이외에 어떤 개입과 참여의 방식도 상상할 수 없는 대중이 작가와 창작물에 가하는 심각한 수준의 사이버불링 등은 우려되는 부분이다.
최근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나 주목해야 할 작품이 있나.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를 주로 언급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중년 게이 커플의 일상을 그린 『어제 뭐 먹었어?』도 매우 훌륭하고, 최근 나온 단행본인 『타마키와 아마네』도 무척 좋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시대를 건너며 평범한 부부였다가, 여성인 친구였다가, 다정한 옆집 아주머니와 귀여운 아이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묘사해 사랑의 다층적 형태를 실험하는 내용이다. 요시나가 후미의 대담집 <일이어도, 일이 아니어도>도 곧 번역돼 출간된다. 대담집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작품 창작 교본으로서도 훌륭한 책이다.
오래도록 좋아하고 연구해 온 것들에 깃든 애정에 대해 듣고 싶다.
대중문화연구를 통해 늘 깨닫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것,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인 것 같다. 틀릴 걸 각오하더라도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하려 노력하는 일에 애써왔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무언가 해나가는 순간들을 앞으로도 잘 포착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