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작은 작업실에 한 권의 책을 더 쌓아보려 펜을 드는 이들이 있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종이책 위기론을 버텨내는 것이 힘에 부치고,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지원책이 하나둘 등 돌리는 나날에도 누군가는 책을 쓰고 있다. 어디선가 하나의 출판작업이 마무리된다는 소식이 들릴 때도 다른 어딘가에선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다.
다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을 펴낸다. 작업실이, 소속이, 함께하는 이들이 달라져도 아득한 한켠에 간직하고 있는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지켜내면서. ‘출판공동체 편않’(편않)의 김윤우, 지다율 편집자와 기경란 디자이너를 만나 책에 세상을 담는 일에 관해 들어봤다.
한계 없는 변화와 발전을 꿈꾸는 공동체
출판사는 편집자들에게 그리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초과근무, 이에 대한 미보상, 일방적 업무 지시 등 출판업을 넘어 수많은 일터에서 관행처럼 지속되는 불공정 노동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대다수의 출판사가 규모가 매우 작고 고용이 불안정한 탓에 노동자들이 파편화돼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업장 안에 노조가 있는 곳 또한 많지 않았다. 편않의 창작자들은 그런 곳에서 처음 만났다.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이직만이 답”이라는 말로 상황을 회피하기보단 이런 고민을 함께하는 느슨하고 유연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닿았다. 대안적 출판 문화를 지향하는 출판공동체 편않은 이렇게 탄생했다.
편않은 ‘편집자는 편집하지 않는다’의 줄임말이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편집만 하지는 않는다’는 왠지 모를 비장함이 편않이라는 짧은 이름에 담겨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다율 편집자는 “출판을 둘러싼 다양한 역할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단체로서 공동체라고 이름 붙였다”며 “위계를 지양하고 어떻게 책을 만들지를 무엇보다 중히 고민하는 공동체”라고 편않을 소개했다. 많은 이들이 편않을 거쳐 갔고, 현재는 김윤우 편집자, 기경란 디자이너까지 세 명이 함께 책을 만들고 있다.
편않은 지난해 12월 독립출판과 출판작업자를 지원하는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플랫폼P의 입주사로 선정돼 센터 내 작은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다율 편집자는 그곳에서 상근하고, 김윤우 편집자와 기경란 디자이너는 주중에는 각자 고용된 출판사에서, 주말에는 작업실에 모여 함께 일하고 있다. 책은 물성이 있는 매체다 보니 제작비가 들고, 작가들에게 원고료도 지급해야 한다. 여기에 드는 운영비는 팀원들이 각출한다. 김 편집자는 “무가지만 낼 때는 단순히 돈을 모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펴냈는데, 가격을 매긴 단행본을 출판하면서는 시장에 편입되는 것이니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민이 펼쳐졌다”고 회상했다. 하고 싶은 얘기도 하지만, 듣고 싶은 얘기도 담아야겠다는 결론에 닿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글을 편집하고, 디자인을 입히고, 가격을 붙여 시장에 내놓는 과정을 반복하기보다는 ‘책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논의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편않의 시작이 동명의 무가지였던 것도, 공동체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했던 출판사 등록을 최대한 유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은 당연히 유료라는 전제하에 얼마에 팔지를 따져봄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책에 가격을 매길 것인가 자체를 먼저 물었다.
여전히 편집자들은 틈만 나면 가격 체계를 바꿔보려 머리를 맞대고 있다. 무가지 『편않』은 전국의 동네 서점에서 배포된다. 지다율 편집자는 “서점 방문객이 『편않』을 당연하게도 구매하려고 했다는 피드백을 자주 접한다”며 “무료임을 아는 순간 모두 놀라는데, 그 놀람 속에서 자그마한 균열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소비자는 길고 긴 유통망을 거쳐온 결과물에 돈을 지불해야만 창작물을 향유할 수 있다. 이 깨뜨릴 수 없는 콘텐츠 제작 방식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가지를 지속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획을 넘어 유통, 판매까지. 편않에게 출판업계의 변화는 언제든 꾀할 수 있는 도전의 대상이다.
자유롭게 펴내고 끊임없이 기록한다는 사명
과감히 무가지 발행을 추진한 것처럼, 세 사람이 함께 꾸려가는 편않은 보다 자유롭게 기획하고 또 출판한다. 현직 기자들이 작가로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한 ‘우리의 자리’ 시리즈는 출판과 언론이 많은 부분에서 교차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기획됐다. 지다율 편집자는 형태를 막론하고 “콘텐츠와 담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은 분명 중요하다”며 “‘공정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개인의 욕망은 거세돼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출판사는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도 편않과 독립출판이 자랑하는 점이다. 『격자시공: 편않, 4년의 기록』(2021)은 외지·내지 모두 널찍한 격자무늬를 바탕에 두고 글이 쓰여 있는 형태다. ‘가로운 공간’, ‘세로운 시간’이라는 목차 제목처럼 서로 교차하는 선들은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독립출판과 창작자를 모두 연결하는 듯하다. 주중에는 다른 출판사에 고용돼 근무하는 기경란 디자이너는 기성 출판사와 편않의 디자인적 목표가 달라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기 디자이너는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대중적인 디자인이 필요한 출판사와 달리 편않은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디자인도 환영받는 공간”이라며 “이러한 시도가 책과 독자 간의 거리감을 좁히는 데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편않이 자랑하는 자율성은 책 또한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임을 고려했을 때 더 큰 장점으로 발휘된다. 편않의 창작자들은 출판업이 매년 “단군 이래 최고의 불황”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분명한 사양산업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현재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윤우 편집자는 “2쇄를 찍어야 본격적으로 저자와 출판사에 이익이 돌아가는데, 최근에는 2쇄를 찍기까지의 기간이 계속 길어지고 초판 부수 또한 줄어든다”며 출판업계가 마주한 어려움을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판사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으니 갈수록 안전한 선택을 하고, 가장자리의 창작자들은 더욱 밖으로 밀려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김 편집자는 “독립출판은 시장 논리에서 한 발 멀어져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다”며 “오히려 눈에 가시를 박는, 더 불편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편않은 ‘출판에 대한 출판’을 하기로 결심했다. 책을 펴는 사람이 직접 하는 출판에 관한 이야기, 자주 어렵고 지난하지만 어느 순간 새로움이 태동하는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먼저 동명의 잡지 『편않』에 창작자들을 위한 지면을 마련했다. 그렇게 4년, 독립출판 창작자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에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을 다시 찾아 들은 새로운 이야기들을 더해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 『격자시공: 편않, 4년의 기록』이었다. 지다율 편집자는 “잡지에 실을 때와 단행본으로 낼 때, 그사이 생겨난 변화의 궤적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개중에는 출판을 마무리한 창작자들도 있었다. 김윤우 편집자는 그저 지속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빛나는 가치임을 또 한 번 느꼈다며 지난 작업을 돌아봤다. 동시에 『편않』이 창간될 때, 단행본을 처음 출간할 때 마음 속에 시작의 씨앗이 움터 첫 발걸음을 내딛은 이들도 있었다. 지다율 편집자는 “사라지는 와중에 생기는 것에도 시선을 주고 주목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편않은 출판을,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한다는 감각으로, 지속을 경신하고 약속을 갱신하며
올해는 출판업계에 유난히 어렵고 힘든 소식들이 전해진 한 해였다. 읽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책이 늘 우리 삶에서 뒷순위로 밀려나기 일쑤인 상황은 종종 창작자들을 지치게 했다. 지원도 점점 줄어갔다.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금으로 배정됐던 59억 8,500만 원은 내년도 문화예술 예산안에서 전액 삭감될 예정이다. 지방 도시 서점 활성화를 위해 배정됐던 예산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지난 2010년 디자인·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된 마포구에서 올해 작은도서관 폐관, 플랫폼P를 창업센터로 개편하겠다는 구청장의 선언, 경의선 책거리 운영 종료 등 아쉬운 소식들이 연이어 전해졌다. 작은 출판사들이 모인 마포구를 출판 특화 지역으로 꾸려갔던 수많은 노력이 타의에 의해 끝맺어질 위기에 처했다.
기경란 디자이너는 “영화, 글,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매체 중 하나로서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들이 계속 그 문화를 향유하는데, 확장되기가 다소 어려운 것일 뿐”이라며 복잡한 고민의 지점들을 단순화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책을 만들고 쓰고 판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책을 둘러싼 오늘날의 담론과 출판업이 마주한 문제를 함께 고민할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하고 또 소중하다고 말한다. 지다율 편집자는 플랫폼P에 입주하며 얻은 것으로 “활력과 생산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공간 자체가 주는 감각”을 꼽았다. 한곳에서 일하고 가끔 대화하는 것이 만들어 내는 정서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라는 감각이 연대와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지다율 편집자는 “함께한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났을 때 생기는 힘이 있다”고 전하며 플랫폼P 개편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입주사들이 연대했던 경험을 나눴다. 지난 2월 13일 해당 문제를 처음 인지한 이후, 입주사들은 서명운동, 기자회견, 북페어 ‘마포 책소동’, 책 문화 관련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기획하고 진행했다. 공동 대응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은 관련 내용과 입주사들의 움직임을 하나로 모아 지난 11월 플랫폼P에서 진행된 역대 입주사들의 작업 소개 행사 ‘여기 ( ) 사람 있어요’에 전시하며 방문자들의 관심과 연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지 편집자는 “지난 1년간 입주사들끼리 소통하고 행동하며 서로 힘을 주고받았다”며 함께한다는 행위와 그런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짚었다.

편않은 지난 11월 아트북·독립출판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독립출판을 중심으로 모인 220팀의 예술가와 출판사가 자신의 작업물을 소개했고,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방문해 둘러보고 이야기하고 구매하고 또 다음을 기약했다. 모든 이들이 책을 매개로 연결되는, 활기찬 축제의 장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넘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모여들어 이를 표현했다.

열심히 달려 나가다가도 문득 멈춰서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는 출판이라는 길. 그럼에도 출판하는 이유를 묻자 “책을 좋아해서”라는 답변이 가장 먼저 나왔다. 김윤우 편집자는 “불황은 계속되고 노동자들의 불행도 계속되지만,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고, 여전히 궁금하고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전했다. 기경란 디자이너 또한 책이 재밌다는 것이 출판하는 가장 큰 이유라며 “협업해 무언가를 만들고 그 결과물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책의 경우 “이 책 좋아, 한 번 읽어봐”라며 개개인에게 잘 전달될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 디자이너는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픈 마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출판 업계”라며 책과 출판을 사랑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내가 계속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 지다율 편집자의 답변은 조금은 다른 면을 짚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판에 뛰어든 것은 다른 이들과 같다면서도 하루 더 지속했을 때 발생하는 진척을 느끼며 나아가고 있다는 색다른 감각도 전했다. 지 편집자는 출판을 “매일매일 우리의 지속이 경신되고 자기와의 약속이 갱신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언제까지, 얼마나, 어떻게 계속할 수 있는지 가늠하고 또 증명해 내는 과정이 편않하는 마음에 담겨 있었다.
책을 사랑하기에 시작했던 처음 그때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편않은 우리가 닿아 있는 매일의 이야기를 책이라는 매체에 담아내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 책의 문턱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함께 읽어주고 감상과 고민을 나눠주고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해줄 사람을 언제나 구하고 있다. 열린 마음으로 책과 함께할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편않은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책들이 많지만, 새로 태동하는 것에 시선을 주고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것에 마음을 두는 나날들이 이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