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중 대사를 인용한 부분은 이탤릭체로 구분했습니다.
매일같이 몇 개의 기사를 읽고, 수십 개의 온라인 사이트를 헤집으며 수백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오늘날. 몇 시간 만에 머릿속에서는 1톤 정도의 기억이 지워지고, 1톤 정도의 정보가 새로 주입되는 것만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켜켜이 쌓였던 추억과 서사가 얇아져만 가고, 대화는 갈수록 짧아진다. 현대 사회가 그렇다. 어떨 땐 너무 짧고 어떨 땐 또 지나치게 긴 이야기들이 떠다니는 세상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춰 조각내 본 적 있는가? 그렇게 조각난 5분여의 장면을 그저 가만히 앉아 지켜본 적 있는가? 여기 어떤 무대 위,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들과 경험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중이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앉아본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야?
인물1: 말해줘.
인물2: (잠시 고민하다가) 아 안돼.
인물1: 아 왜 안 되는데?
인물2: 말해줘?
인물1: 응!
인물2: (이전보다 길게 고민하다가) 아 안돼!
암전. 생활 소음들과 함께 서서히 무대 위로 조명이 들어온다. 중앙에 서 있는 두 명의 인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눈다. 무대 위 구조물에는 아이콘이 떠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한 지 3분쯤 지났을까. 돌연 조명과 음향이 꺼진다. 한 장면이 이렇게 끝나버렸다. 무대 위의 아이콘이 켜지고 조명이 다시 들어오자, 이번엔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76개의 조각이 이어진다.

어떤 배경 설명도 없이 시작된 장면이 메시지도, 교훈도, 아니 사실 그 무엇도 전달해 주지 않은 채 갑자기 끝나 버렸다. 두 인물의 대화를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파편화된 장면, 파편화된 대화. 대화도, 관계도, 그 무엇도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객석에 앉은 지 5분. 첫 장면이 끝나고 당황스러운 마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을 크게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말하기 싫은 비밀이 대체 뭔데!”
인물3: 수요일에 저녁 식사 약속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
인물4: 안 했다니까!
인물3: 했어. 내가 분명히 기억한다니까.
인물4: 알았어. 내가 잊어버렸나 보네. 미안해!
인물3: 봐봐. 잊어버린 거잖아!
인물4: 미안해!
진해정 연출가의 연극 「러브 앤 인포메이션」(2023)은 7개의 섹션 안에 2분에서 5분가량의 짧은 장면 76개가 나열된 작품이다. 극에 등장하는 인물만 100명이 넘고, 원작 대본에도 대사만 쓰여 있을 뿐 인물의 젠더와 나이, 계급 등의 정보는 알 수 없다. 다섯 명의 배우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는 각 대사를 어떤 인물이 발화하는지조차 명확히 적혀 있지 않은 대본을 바탕으로 인물을 연기한다. 언제, 어떤 공간에서, 무슨 맥락에서 이 장면이 시작됐는지도 물론 정해지지 않았다. 실험적인 형식은 창작자들에게 더 큰 자율성을 선물한다. 연출은 원작자 카릴 처칠이 지정한 특정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장면 순서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배우 또한 각 장면에서 어떤 성격과 배경을 가진 인물로 등장할지 한계 없이 상상하고 또 표현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색의 티셔츠 위에 똑같은 청색 점프수트를 입은 5명의 배우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누구로든 변신할 수 있다.

그 자율성을 관객 역시 누릴 수 있다. 바로 직전 끝난 장면에 이어 같은 배우가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지만, 장면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다른 인물로 다시 상상할 차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상대와는 어떤 관계인지, 지금 무엇에 관해 대화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로 대화에 임하는지. 생략되고 끊긴 말들이 무엇인지 유추하며 감상해야 한다. 명확히 주어진 건 단지 장면뿐이다.
짧은 장면 속 대사들이 지나가며 쉴 새 없이 정보가 쏟아지지만, 동시에 그 정보는 온전치 못하다. ‘같은 장면의 다른 해석’이 많은 예술작품의 지향점이라면, 이 작품은 그 지점을 향해 직진하고 있는 듯하다. 관객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장면을 독해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연인일까? 둘 중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전에도 이런 상황이 발생한 적 있을까?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인물5: 잠이 안 온다.
인물6: 따뜻한 우유?
인물5: 아 아냐.
(중략)
인물5: 페이스북이나 할까?
(알람음, 암전)
독특한 형식만을 떠올리면 너무나도 낯선 극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이 작품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무기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어려운 단어는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와 내 옆자리 관객이 오늘도 썼고 내일도 쓸 단어와 문장들이 이어진다. 배우들이 표현하는 장면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그들은 대화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질문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그렇게 짧으면 2분, 길어도 5분 내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내 사라진다.
작품의 드라마투르기 김민조 씨는 ‘틱톡, 쇼츠, 릴스 등의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이 작품이 채택한 형식이 그다지 낯선 형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극의 각 장면을 떼어 놓고 보면, 마치 숏폼 영상에 담긴 현실 사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 장면에서 잠이 안 온다는 인물5의 말에 인물6이 따뜻한 우유를 비롯해 잠드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방법을 제안하지만, 결국 인물5는 페이스북을 켠다. 2012년 발표된 작품인 터라 페이스북의 인기가 저문 오늘에서는 마지막에 인물5가 외치는 “페이스북이나 할까?”라는 대사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애플리케이션 이름만 바꾼다면 바로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이자 10년 뒤의 나도 똑같이 반복할 행동임은 분명하다. 나열된 장면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자주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고, 또 어느 순간엔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무대 위 인물을 마음 놓고 비난하기도 한다.
인물7: 미안하다고 말해야 돼.
인물8: 안 미안한데?
인물9: 근데 네가 걔를 아프게 한 건 맞잖아. 그렇지? 그건 알지? 그럼 가서 미안하다고 말 해야 돼.
인물8: 미안하다고 느껴지지가 않는다고.
인물7: 말해야 돼.
이야기는 이리저리 제멋대로 튀는 듯하다가도 한순간 날카롭게 세상을 담아낸다.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상대와 나눴던 감정과 공유했던 경험을 쉽게 지워버리는 사회. 고통과 미안함을 느끼지 못해 어떤 느낌이냐 묻고, 병아리 뇌를 꺼내 실험하는 일을 한다는 잔인한 이야기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무감각하게 꺼내는 감정 없는 사회. 카카오톡 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받은 노동자가 상사를 찾아와 부당함을 호소하지만, 상사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회.

영상스케치: 고동욱'이라는 흰색 글씨가 써있다. 아래쪽으로는 열을 맞춰 흰색 아이콘들이 나열돼있다. 왼쪽 가장 위부터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 위쪽을 향한 화살표, 무한대, 루트 안에 있는 사과 두 개, 입술, 입술에 대각선이 그어져 있는 것, 지팡이, 안경, 우상향하는 그래프, 남자, 여자, 책가방, 롤러코스터, 공중전화, 학교, 동영상 아이콘, 포크와 나이프, 유전자, 카카오톡, 뇌, 헬멧을 쓴 노동자, 심장박동, 음소거 아이콘, 담배, 와이파이가 지원되지 않는다는 아이콘, 문자메시지 아이콘, 극장, 수류탄, TV다. 사진 설명 끝." width="1080" height="1080" style="width: 1080px; height: 1080px; vertical-align: middle;">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위 구조물에는 장면과 관련된 아이콘이 떠있다. ⓒ두산아트센터
모든 장면이 너무 현실과 비슷해 나도 저렇게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종종 부끄러움이 밀려오고, 왜 누군가는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외면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기 어렵다. 극이 중단 없이 달려가는 탓에 장면과 장면 사이 짧은 암전을 빌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어떤 땐 눈물을 닦고, 또 어느 순간에는 상념을 비우려 애써 머리를 털어야 했다.
일상적인 행동, 짧고도 간단한 대화,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우리. 그 무엇도 낯설지 않은 요소들이 다른 방식으로 조합됐다는 이유만으로 전에 없던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 혁신이 완전히 다른 감각을 선사하고, 이 작품만을 위한 특별한 감상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몇 장면이나 기억나?
인물10: 우리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거 기억나.
인물11: 그래 우리 걸어가다가도 문득 멈춰서 이렇게 바라보고 그랬잖아.
인물10: 나는 침대 한켠에 네가 앉아있던 때를 생각하고 있는데.
인물11: 오 그게 우리가 헤어질 때쯤이었나, 초반쯤이었나?
인물10: 끝날 때쯤 아니었나? (정적) 내가 언제 얘기하는지 알아?
(긴 정적)
인물11: 나 그 카페 가끔 지나가는데.
인물10: 어디?
인물11: 왜, 헤어지자고 얘기하려고 노력했던 그.
인물10: 아 나 그날 전체를 지워버렸나 봐.
인물11: 그래도 우리 진짜 행복했어.
인물10: 슬펐기도 했지. 울곤 했잖아.
인물11: 우리가 그랬나?
분명 관객이 모든 장면과 대사를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76개의 장면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미 객석에 들어올 때 품고 있었던 기억이 너무 많아, 몇 장면만이 머리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커튼콜이 끝나면 죄다 흘러가 버리고 너무 강렬하거나 심히 공감되는 짤막한 몇 개가 살아남을 뿐이다.
극장에는 작품과 관련해 이인아 교수(뇌인지과학과)가 쓴 글, ‘정보의 파도 속 뇌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가 비치돼 있었다. 이 교수는 글에서 ‘정보의 다른 이름은 기억’이라며 ‘인간의 뇌는 언어와 영상 등 여러 매체들을 매개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일들을 정보로 받아들이며 학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무대야말로 이러한 정보 학습이 가장 쉽게,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발생하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관객은 극을 감상하며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빠르게 사고 회로를 가동한다.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어떨 때는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저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기억이나 예전에 읽었던 글들, 시청했던 영상, 나눴던 대화를 꺼내 극과 연결한다. 그렇게 연결된 것은 생명력이 길어서 극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감상을 적어보려 노트북을 펼친 뒤에도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 장면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해 뜬금없는 순간 문득문득 되짚어 보게 됐던 장면이다. 동상이몽, 서로 다른 기억과 생각에 기반해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고전 코미디 같아서였을까. 실제로도 객석 곳곳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사실 고전 코미디가 아닌 다른 고전 작품,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이,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속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가 떠올랐다.
김민조 씨 또한 그의 글에서 비밀을 가지고 실랑이하는 두 사람의 장면이 고대 그리스 희곡 『오이디푸스 왕』의 변주로 읽힐 수 있음을 언급한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통해 2000년의 역사적 간극은 삭제됐다. 이처럼 작품을 보며 떠올리는 기억은 한 개인 안에서 연결될 뿐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기도 한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초시대적 문제를 겨냥하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극에서 풍겨오는 고전의 향취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발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극을 해석하는 수백 개의 방법이 존재한다. 관객이 누구이고,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느냐에 따라 인물들의 대화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극이 진행되는 순간의 감정도, 극장을 나설 때 남는 메시지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쉼 없이 스쳐 가는 장면을 성심성의껏 독해하지 않는다면 이 극은 그냥 ‘인포메이션의 나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상한 극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대 위에 서 있는 인물에 우리를 투영하고, 또 나를 둘러싼 세상에 장면을 대입하게 되면, 정보는 그저 정보가 아닌 진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생각이 뻗어나가는 동안 다음 장면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전혀 문제없다. 74개의 장면이 여전히 남아 다음 이야기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