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부르고 기억하기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2023)
사진 설명 시작. 영화 《너와 나》의 포스터다. 폭포를 배경으로 여자 고등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손으로 브이를 만들고 있다. 가운데에는 흰색 손글씨로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시절을 지나왔고, 지금도 지나고 있다. 시절을 구성하는 것들은 매일 보는 거리의 풍경, 먹었던 음식, 들었던 노래, 반복되는 일상의 조각들이다. 어떤 시절은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너와 나》는 우리가 지나지 못한, 한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극영화 《너와 나》가 개봉했다.8년을 지나 재현하기  세월호 참사를 예술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영화라는 매체에서도 몇몇 작품이 개봉했지만, 유가족이 아닌 피해자들을 극영화의 형태로 재현한 것은 《너와 나》가 처음이다. 왜 8년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사회적 참사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재현이 그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애도가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경우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정치적 문제가 더해지면서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애도할 수 있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와 나》보다 더 앞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참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에 우선 착수해야 했다. 또 어떤 작품들은 남겨진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우선 집중해야 했다. 그만큼 세월호 참사가 남긴 사회적 상실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너와 나》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이 모든 작품들의 성과가 있었고, 또 참사를 애도하고자 했던 모든 마음들이 있었다. 그렇게 2014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2022년, 마침내 피해자들의 삶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사진 설명 시작. 고등학교 교실이다. 세미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다음영화

참사를 언급하지 않기  《너와 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파스텔톤의 밝고 화사한 색감이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눈부시고 반짝이게 찍는다. 사회적 참사를 재현하지만 무겁고 슬픈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발랄한 활기로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이 《너와 나》의 가장 큰 반전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가 참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플롯은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로만 구성된다.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와의 연관성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안산과 제주도라는 지명, 2014년을 암시하는 생활상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너와 나》의 슬픔은 여기서 온다. 영화에서 주인공 세미와 하은은 친구들과 빙수를 먹고 노래방에 가고 서로에게 장난을 친다. 사소하고도 소중한 일상이지만 관객은 그 일상을 앗아간, 실제 일어난 참사를 겹쳐 보게 된다. 영화가 일상을 아름답게 담아낼수록, 인물들의 대사가 생기를 띨수록 슬픔의 크기는 커진다. 참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겠다는 조현철 감독의 선택은 곧 그가 보여주는 창작자로서의 윤리다. 《너와 나》의 윤리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되지 않는 영역에 그대로 두는 것에 있다. 

사진 설명 시작. 녹색 숲을 배경으로, 세미가 누워 있는 하은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다. 하은은 눈을 감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다음영화

다층적인 이야기와 서브플롯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 플롯은 주인공 세미와 하은의 퀴어 서사다. 세미는 친구인 하은을 사랑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교실에서 엎드려 자던 세미가 깨어나는 장면이다. 불길한 꿈을 꾼 세미는 이번에는 꼭 하은에게 마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우연히 펼친 하은의 일기장에서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고, 하은에게 모르는 번호로 계속 전화가 오고, 하은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오해가 싸움이 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이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은 성장 영화의 구조를 따른다. 세미는 진실을 따라가면서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친구들과 오해를 풀어 감동적인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이 중심 플롯은 이 영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너와 나》는 여기에 복수의 서브플롯들을 엮는다. 세미와 하은은 떠돌이 개를 만나 주인을 찾아주고, 하은이 자전거 사고를 당하며, 다예와 친구들은 스토킹 범죄자를 추적한다. 서브플롯의 비중이 높아지면 자칫 이야기가 중심을 잃고 산만해질 위험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너와 나》가 의도하는 바다. 서브플롯의 높은 비중은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한 사람의 삶에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진 설명 시작. 하은이 비스듬한 방향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하은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다음영화

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  영화는 201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상과 안산이라는 장소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도 공을 들인다. 세미와 하은을 비롯한 또래 고등학생들은 학교가 끝난 뒤 안산의 번화가에 가고, 번화가 카페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가요가 재생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영화의 인물들을 구체적 시공간에 살아가는 개인으로 만드는 장치이자, 우리가 어떤 시절을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우선 《너와 나》는 핍진한 시공간적 배경을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에게 2014년 봄의 안산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참사의 피해자들이 구체적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갔던 고유한 개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영화는 각자가 지나온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시대와 장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미시적인 개인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경험에 가닿는 것이다.

사진 설명 시작. 하은과 세미가 야외에서 흰색 개를 보고 있다. 개는 땅에 놓인 무언가를 먹고 있다. 전체적으로 초록색 색감이 두드러진다. 사진 설명 끝.
▲©다음영화

개인성을 통한 애도로  결국 《너와 나》는 개인의 역사를 픽션이라는 허구의 수단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전체에 대한 집단적·거시적 애도를 모두에 대한 개인적·미시적 애도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영화는 이를 위해 여고생의 활기와 시공간에 대한 기억을 동원하며, 그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뤄낸다. 영화 곳곳에 삽입돼 있는 극단적인 부감 쇼트들은 영화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의 가장 처음 쇼트도 주인공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높이서 바라보는 부감 쇼트인데, 수많은 학생들이 등장하는 전경을 멀리서 촬영한 이 쇼트들은 주인공 세미와 하은의 서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인과관계 없이 삽입되며, 단역인 각각의 고등학생들을 모두 다른 개성과 활기를 지닌 인물들로 담아낸다. 이러한 병치는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 모든 인물들 또한 각자의 사랑과 오해와 서운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설득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세미가 꿈에서 본 것은 하은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모두의 죽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사실 《너와 나》는 죽음과 상실이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점을 바라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미는 그 죽음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한다. 세미에게 애도는 사랑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할 때, 사랑과 애도는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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