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성의 아름다움

《추락의 해부》(2024)
사진 설명 시작. 영화 《추락의 해부》의 한국어 포스터다. 눈 덮인 땅 위에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그 옆에 한 소년과 여자가 서로 안고 서 있고, 그 옆에는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여자는 전화기를 들고 전화하고 있다. 아래에는
▲《추락의 해부》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프랑스 알프스의 외딴 산장에서 한 남자가 떨어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건 당시 집에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아내를 제외한 다른 목격자는 없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추락의 해부》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는 소설가 ‘산드라’(산드라 휠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법정 스릴러다. 그러나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관심사는 법정 스릴러 자체만은 아니다. 《추락의 해부》는 법정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을 이용해 개인의 복잡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추락의 해부》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의 죽음에 대한 재판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지만, 끝까지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진실들도 마찬가지다. 사뮈엘과 산드라의 부부관계에 대한 진실, 산드라와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과의 관계 등등. 많은 추리 영화와는 달리, 《추락의 해부》에는 플래시백이 없다. 과거를 시점으로 하는 장면들은 존재하지만,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 보이스오버, 다른 장면과의 연관성 등의 장치를 이용해 이 장면들이 플래시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재구성된 과거임을 알려준다. 즉 관객에게 전지적인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카메라는 남겨진 단서들을 바탕으로 진실을 각자 가늠해야 하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이편에 남아 있다. 이는 영화가 편리하게 진실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트리에는 영화를 연출하면서 휠러에게 산드라가 정말 범인인지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인 것인지, 또는 사뮈엘이 자살한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이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감독이 표면적으로 진실을 가리는 공간인 법정을 영화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도가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신랄한 검사와 증인으로 소환된 전문가들은 사건 당시의 정황과 부부 사이의 갈등을 해부해 나가지만, 산드라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검사의 주장만을 믿을 수는 없다. 산드라가 정당하게 항변하듯이, 그가 제시하는 진실의 조각들은 전체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증인은 사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고, 하나의 증거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추락의 해부》의 법정은 결국 심판을 내리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관객은 산드라에 대한 최종 판결을 판사의 입이 아니라 미디어 너머 소란스러운 기자들의 질문을 통해 접하게 된다.

영화에는 개인 간의 소통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치가 등장한다. 프랑스인 사뮈엘과 독일인 산드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가족은 누구의 언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한다. 산드라는 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부부의 어린 아들인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은 사고로 시각이 손상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다니엘의 안내견 스눕은 사뮈엘의 추락을 처음 목격한 존재지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뮈엘의 추락 직후 이어지는 타이틀 시퀀스에서는 35mm 필름, 디지털 캠코더 등으로 촬영한 듯한 등장인물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파편적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사진 앨범 또는 홈 비디오를 연상시키는 이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이 영상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촬영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이 맥락이 제거된 이미지들로부터 극히 일부분의 진실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 설명 시작.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사진이다. 붉은 벽지가 붙은 방 안에서 산드라와 사뮈엘이 웃고 있다. 사진 설명 끝.
▲©Les Films Pelléas

다니엘의 입장

  영화의 주인공은 물론 산드라지만, 그의 아들인 다니엘 또한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 《추락의 해부》가 흔들리는 영화라면, 다니엘은 영화에서 가장 흔들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산드라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현실적인 인물인 데 반해,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과 재판을 겪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놓인다. 무자비한 법정 공방에 집중하다 보면 법정 드라마 장르는 연극적으로 느껴지기 쉽지만, 다니엘의 존재는 영화가 다루는 사건의 무게를 상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니엘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큰 전환을 겪는다. 영화가 2부에서 1년 후 시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뮈엘의 추락 사건에서 산드라의 재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지만, 플롯의 관점에서 1부와 2부 사이의 1년은 다니엘의 정신적 성장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2부에서 다니엘은 아버지의 사망에 대한 진실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인물로 변한다. 이 점에서 진실을 추리하는 관객의 대리인이기도 한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알아야만 해요.” 다니엘은 왜 진실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 사건의 진실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어도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부모에 대한 진실이 그렇다. 다니엘에게 초점을 맞출 때, 《추락의 해부》는 소년이 흔들리는 어린 시절을 다시 세워 나가는 이야기다.

사진 설명 시작.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의 사진이다. 판사와 변호사, 증인과 방청객들이 보인다. 피고인석에서 산드라가 일어나 발언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Les Films Pelléas

사회적 압력

  《추락의 해부》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성급하게 개인을 재단하는 사회적 편견과 미디어, 그리고 대중이다. 산드라는 살인 용의자로서, 동시에 아내이자 여성으로서 법정에 선다. 트리에는 프랑스 사회의 성역할과 결혼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법정 드라마라는 장르 속에 담아냈다. 산드라가 외도를 숨기지 않는 양성애자라는 점, 가정을 위해 직업적 삶을 희생하지 않는 어머니라는 점, 그 모든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점은 그의 유죄를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미디어는 성공한 소설가의 스캔들을 가십으로 소비하고, 산드라의 자전적 소설에 등장하는 내용을 들어 공격한다. 산드라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서툴지만 의연하게 맞서는 인물이며, 바로 이 점이 그에게 주인공다운 힘을 부여해주는 요소다. 관객은 산드라가 정말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사회적 선입견에 맞서는 그의 논리를 심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가정과 상상을 동원해 피고인을 의심하는 검사는 일견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진실에서 가려진 부분을 개연성으로 채워 넣는 데에 익숙하다. 개연성은 서사를 만들고, 그럴싸한 이야기는 사실처럼 느껴진다.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경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려진 부분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장르적으로는 지금까지 미스터리 영화가 관객에게 진실을 전달해 오던 오랜 관습을 비트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 설명 시작.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산드라와 뱅상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둘은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Les Films Pelléas

영화가 내딛는 결정

  우리가 안전한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결국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스스로의 기억조차 의심해야 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니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다니엘은 진실을 알기 위해 재판을 방청하지만, 도리어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이때 다니엘에게 돌파구를 제공하는 이는 산드라로부터 증인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파견한 ‘조에’(카밀 루더포드)다. 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힘겹게 말하는 다니엘에게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를 때는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문장이, 《추락의 해부》를 특별한 영화로 만든다. 《추락의 해부》는 단순히 인식의 주관성을 폭로하는 우유부단한 영화가 아니다. 《추락의 해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이 삶의 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결말에서 다니엘은 하나의 진실을 선택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며 마지막 장면의 의미심장한 대사처럼 “무서운” 과정이지만, 그 선택을 통해 소년은 성장한다. 그 선택을 마주하는 것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 중 하나다.

사진 설명 시작. 집의 다락방이다. 다니엘이 벽에 손을 짚고 서 있다. 사진 설명 끝.
▲©Les Films Pellé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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