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웹툰 「집이 없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집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한 몸 눕힐 물리적 거주 공간으로서의 집도, 어엿한 사회의 성원이 될 때까지 아이를 돌보고 길러내는 ‘가정’으로서의 집도 없다. 아이들은 가족을 견딜 수 없어서, 살았던 집을 떠나고 싶어서, 새집이 갖고 싶어서 저마다 애써보지만, 그 과정에서 남을 다치게 하거나 스스로 다친다. 웹툰 「집이 없어」의 아이들이다.
「집이 없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집’의 문제에서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 취약성을 떠안고 구조적인 소외를 겪는 아이들의 삶을 현미경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이 당하는, 혹은 행하는 여러 형태의 폭력에 대해 말한다. 집이 없는 아이들의 잘못, 책임, 용서, 연대, 성장을 이야기한다. 2018년부터 매주 화요일, 네이버 웹툰에서 한 편씩 연재 중인 「집이 없어」를 읽어봤다.
집 없는 자리
「집이 없어」의 중심인물은 고등학생인 ‘고해준’이다. 엄마 ‘은주’의 손에 홀로 큰 해준은 세상의 온갖 귀신을 알아보고 무속적인 수행에 집착적으로 의지하는 은주와 넉넉지 못한 형편에 사는 것이 버거웠다. 해준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고, 은주에게 사실은 그와의 삶이 너무나 힘들었노라 거칠게 말한 뒤 집을 떠난다. 해준을 붙잡는 순간 은주는 그 자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단 한 명뿐이었던 가족인 은주를 잃은 채, 그와 살던 집도 없어진 해준에겐 이제 고등학교 기숙사만이 유일한 터전이지만, 해준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길거리 텐트에 살며 소매치기로 생활을 영위하던 ‘백은영’과 시비가 붙어 기숙사에 입사하지 못한다. 학교는 해준의 사정을 살펴 해준에게 오랫동안 거주 공간으로 쓰인 적 없는 폐가 같은 구 기숙사를 내어준다. 그때쯤엔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은영 역시도 집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구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고, 유혈 사태로 끝난 시비 사건이 첫 만남이었던 두 사람은 낡고 스산한 구 기숙사의 유일한 룸메이트가 된다. 그렇게 해준과 은영은 집 없는 자리에서 만나, 함께 새집을 짓는다. 이어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을 힘들어한 주완, 오빠의 가정폭력을 견디며 살던 마리, 부모님의 이혼을 앞둔 민주, 장래 희망을 두고 부모님과 갈등을 겪는 하라까지 등장해, 여섯 사람은 다신 없을 학교생활을 함께한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사이좋은 친구였던 것은 아니다. 미숙하게나마 삶에 최선을 다하느라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사고처럼 맞닥뜨린다. 해준과 마리의 첫 만남은 은영과의 첫 만남처럼 고약하다. 마리는 자신에게만 떠안겨지는 막중한 가사노동, 오빠의 가정폭력,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이뤄진 집을 너무나 떠나고 싶어 자신이 속한 고등학교 신문부의 실적에 집착한다. 성실한 동아리 활동을 인정받으면 기숙사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욕이 과했던 마리는 그만 학교신문에 오보를 내, 해준에게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누명을 씌운다.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마리와 해준은 좋은 친구가 된다. 마리의 속사정이 참작됐기 때문은 아니다. 마리가 자신으로 인해 해준이 겪는 어려움을 헤아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기 때문이다. 마리는 해준의 누명을 풀어주는 것을 넘어 해당 학교폭력 사건의 진짜 가해 학생들을 찾아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일까지 해낸다. 그리고 무사히 기숙사에 입사해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다. 책임지지 않는 인간이었던 아버지와 오빠로 인해 겪었던 삶의 고난을 이겨보고자 마리는 누구보다도 애썼다. 그러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최선을 다해 책임을 졌다. 마리가 진 책임은 마리 스스로를 구했고 친구들을 구했다.
잘 살아보고 싶어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서 자꾸만 잘못하게 되는 아이들. 모든 사람이 어렵고 조급한 상황 속에서 규칙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애들의 상황과 심정을 변명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내가 당한 폭력과 내가 행한 폭력 사이에서, 그 부조리와 혼란을 딛고 잘못한 스스로를 고쳐낼 때까지 아이들을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집이 없어」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속도다.
은영의 경우 분명 집이 없는 상태로 지내는 매 순간 사회의 규범을 잘 지키기 어려워하고, ‘평범’한 또래의 범주에 편입되기를 힘들어한다. 하지만 은영 역시도 해준을 처음 만났을 때 훔친 해준의 돈을 갚으려고 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해보려고도 한다. 해준의 누명을 해소하려는 마리의 일에도 해준 몰래 도움을 준다. 이 일들이 은영의 마음처럼 늘 잘 되진 않지만, 해준을 비롯해 은영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 은영은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들은 분명 서로에게 잘못하고 상처 줬다. 서로를 해치고 때로 잃어버렸다. 삶이 너무 서툰 나머지 어떤 말과 행동이 서로에게 상처인 줄 모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리고, 믿어준다. 용서하고, 돕는다. 서로를 구해주며,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가는 거다.
잘못한 어른
아버지의 폭력과 그에 무력한 어머니의 방임으로 이뤄진 은영의 유년 시절. 은영은 거부할 수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어떤 어린 날을 떠올리며 “어렸을 때는 집이 전부잖아”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작고 어린 존재에게 집이자 가정은 사실 세계이자 전부다. 집이 아니면 갈 데가 없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어린 은영은 계속 맞았고 꿈을 접었다. 선택한 적 없는 나의 전부, 그것이 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너무도 참담하다. 은영이 정의하는 집은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곳”이다.

마리나 은영이 다름 아닌 집에서 겪었던 그 모든 일엔 잘못한 어른이 있다. 언제나 더 약한 쪽으로 향하는 폭력의 무참한 방향성을 알면서도 휘두르는 어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른들의 모습은 마주하는 것만으로 괴롭다.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화는 정상 가족에 대한 신화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대부분이 엄마, 아빠, 한두 명의 자식으로 이뤄진 형태에, 무척이나 따뜻하고 소중하고 화목한 것이라는 표상이자 이데올로기다. 가족이라는 것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이 공동체 바깥의 타인은 가족 안으로 함부로 끼어들 수 없고, 그래서 가족이 먹고사는 일, 즉 일과 교육과 생활 전반은 가족이 알아서 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돌봄과 복지를 아주 사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가족 안에서의 폭력, 착취, 불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사실은 허상 같은 가족의 화목함과 따뜻함을 동경하느라 늘 다치면서 자라온 아이들이 「집이 없어」의 아이들이다. 모두가 가정 내에서 화목하리라는 환상이 은폐하는 순간들엔 늘 다친 아이들이 있다.
그러니 어떤 집은 버려야 하고, 또 떠나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잘못한 어른이 용서받을 수는 없다. 미워할 것을 정당하게 미워하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 방법일 때도 있다. 해준과 주완은 집으로 돌아간 은영을 걱정하고, 학교 선생님에게 맞아가면서 은영을 감싸기도 한다. 그렇게 친구들이라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은영은 전부였기에 괴로웠던 집으로부터 조금씩 걸어 나선다.
가정폭력을 겪어온 은영이나 마리가 집으로부터 무사히 멀어질 수 있도록 도운 해준에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잔인하게도, 연락이 끊긴 채 지내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해준의 아버지가 그의 엄마 은주를 학대해 온 가정폭력범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해준은 전혀 몰랐던 이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다름 아닌 은영이다. 해준이 보여준 아버지와의 가족사진 속 은주의 모습에서 은영은 무섭게도 익숙한 가정폭력의 흔적들을 찾아버렸다. 해준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랐다는 죄책감,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자신의 성향이 폭력적인 아버지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런 해준을 구하는 것은 다시 은영이다. 은영은 해준에게 분명히 말해준다. 해준이 아버지의 폭력 없이 아주 안전하게만 자랄 수 있도록 애쓴 은주의 사랑이 중요한 것이라고. 해준은 아버지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해준은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정의를 위해 행동할 줄 아는 한 사람으로 무사히 성장했다.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은 가장 어려운 시절에 해준을 만나 조금씩 삶을 나아지게 만들어가던 은영의 존재 자체다.
해준이 그간 은영을 믿어주고 구해줄 수 있었던 것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던 은주의 사랑에서 무언가 배웠기 때문이었다. 은영이 습관 같은 도벽으로 도둑질을 의심받을 때 해준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어린 자신을 은주가 어떻게 대하고 상황을 해결했었는지를 떠올리며 은영을 돕는다. 은영이 아무리 기숙사를 어질러도 해준이 꿋꿋하게 정리 정돈과 청소를 했던 것 역시 하루 끝 돌아가는 공간이 쾌적할수록 일상이 맑아진다는 것을 은주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쉽게 연쇄되고 전염되는 것은 역시 폭력보다는 사랑이다.
어디서든, 모든 곳에서, 잘 지내기
「집이 없어」는 괴로운 집과는 작별하고 새집을 짓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회복해나가는 모습들에 무엇보다 오래 주목한다. 단박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여전히 똑같은 모양새지만, 자기 자신만은 조금씩 달라져 간다는 감각, 적어도 지금을 잘 지낼 수 있다는 평온을 길어 올리는 모습들이다.

은영은 키가 크고, 화려한 염색모가 잘 어울리는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연기에 재능이 있다. 어린 은영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가 은영의 무대를 외면한 채 계속해서 은영을 학대한 이래로 은영은 연극을 잊었다. 이런 은영이 꿈을 영영 잊어버리기 전에, 은영의 담임선생님과 해준은 은영을 고교 연극제 무대에 설 수 있게 한다. 은영은 연극제에서 멋진 연기를 펼친다. 잘하고 싶었던 것을 잘 해내, 부원들의 감탄과 관객들의 환호로 가득 찬 박수갈채가 이어진다. 좋아했던 것들로부터 환영받는다. 때로 “인생이 너무 길어”도,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고비”가 두렵더라도, 아이들에게 남은 것이 절망만은 아니었으리라. 온전하게 스스로 성취해 낸 자기만의 것이 분명 남았다.
「집이 없어」 속 인물들 한 명 한 명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이 아이들이 어디서든, 어떻게든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남는다. “마리야.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네가 네 집도, 동네도, 같이 살 사람도 고를 수 있어.” 언젠가 마리가 집의 사정을 체념하고 기숙사로의 독립을 단념하자 마리의 고모가 다급히 건넨 말이다. 살아갈 장소도, 함께 살 사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얼마든지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다. 언제든 나의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공동체의 몫이 있다면 그렇게 새로 지은 집이 튼튼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울 것, 연대할 것, 취약하고 어린 사람들은 특히 보호해주는 것일 테다. 목격한 폭력을 못 본 체하지는 않을 것, 어떤 삶을 알게 됐다면 개입할 것. 고유한 나의 삶과 너의 삶이 동등해지길 바라면서.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는 “질서 밖으로 내몰린 존재들은 질서를 뒤집기보다 바깥에 남아 서성이다 서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랑만으로 질서가 무화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꼭 「집이 없어」의 아이들 같다. 「집이 없어」는 결국 ‘집’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질서, 규범, 정상성 안에선 살 수 없어 그 바깥을 서성이던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미워했다가, 믿었다가, 버렸다가, 안쓰러워했다가, 결국은 사랑하면서 새로운 집을 짓는 이야기다. 해준과 은영의 낡은 기숙사. 두 사람이 스스로 찾아내 새로 지은 집. 부디 넓고 튼튼한 집이 되길. 내가 선택한 새로운 가족을 초대할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