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로 날려버린 오이디푸스 비극

– 연극 「안타 오이디푸스」(2024) –

※작중 대사를 인용한 부분은 이탤릭체로 구분했습니다.

  이미 막을 내린 극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독자에게 얼마나 잔인한 선택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본 연극을 보고 나오는 순간부터 줄곧 생각했다. 그때 그 순간에 감각했던 모든 걸 잊어버리기 전에 오이디의 노래를 재창해야만 한다고. 그 목소리는 뒤늦은 메아리처럼 어긋나고 턱없이 부족한 성량인 채로 떠돌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다다라서는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노래가 끝난 줄도 모른 채 감각을 음미하던 오이디의 뒷모습처럼 우리의 오감이 극이 끝나고도 이어질 수 있길 바라며 오감을 남긴다. 비록 극을 보지 못했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감각해주기를.

이제, 당신을 위한 극이 시작됩니다

  매표소에서 주류 반입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듣고 맥주 한 병을 든 채 극장에 들어섰다. 주량이 약한 편이라 술을 들고 극장 안에 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으로 느껴졌다. 열렬히 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극장이 신전이 된 지는 꽤 오래됐고, 그곳에 들어선 관객들에게 심호흡할 준비는 필수가 됐다. 신전 안의 신성한 공기를 한 모금도 빼놓지 않고 흡입하고 가겠다는 그 당찬 심호흡. 평소 극장의 충실한 신도였던 나는 맥주병의 묵직한 무게에 정신이 팔려 심호흡을 깜박하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날의 극은 신도가 아닌 같이 춤추고 놀 동료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석을 찾아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올려다봐야 하는 신전 대신 관객석과 경계가 없는 편평한 무대가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의 소파와 야구장 금이 전부였다. 이런 조촐한 무대의 모양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나 그에 파생된 여러 상징적 오이디푸스들의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안타 오이디푸스」의 안타가 정말 야구의 안타를 말하는 건가 보다….

  정시가 되고, 무대가 곧 시작됨을 알리는 무대 스태프의 사전 안내가 울려 퍼졌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바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본 공연은 관람 중 화장실에 가고 싶거나 이동을 원할 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고, 관객석 뒤편에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있었다. 사전에 공지했던 대로 접근성 자막도 준비돼 있었고, 안내 말미에는 공연 중 나는 가장 큰 소리와 작은 소리, 가장 시각 자극이 심한 조명과 가장 어두운 조명 상태를 차례로 체험하는 시간도 가졌다. 일반적인 연극에서 경험하는 소리 자극이나 빛 자극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상냥함이 눈길을 끌었다. 당신이 누구건 당신을 위하는 극을 만들겠다는 최소한의 배려가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몸에 힘을 빼고 맥주를 들이켰다. 조금 흐트러진 마음으로 봐도, 조금 이완된 자세로 봐도 괜찮다는 신호를 받은 기분이었다. 신전은 당연히 아니고, 거대한 야구장도 아니고, 공터에 임시로 그려진 야구장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을 기다렸다. 밝은 시작을 위한 찰나의 암전이 두려움 없이 편안했다.

무너진 신전 속 뒤틀린 신탁

사진 설명 시작. 커튼이 쳐있어 간단해 보이는 배경 앞에 은빛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오이디, 이오, 칵터. 극 초반, 오이디 일행이 막막한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고 있는 장면이다. 칵터는 몸이 약해 힘없이 앉아 있고, 오이디는 이오를 꼭 안고 눈을 감고 있다. 이오는 이들을 이끄는 대안 어머니로서 흐트러짐 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융카우드에서 살고 있는 오이디 일행 ©류사라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 인공지능 T의 등장으로 인류가 구축한 모든 문명과 종교가 파괴되고, 저항하거나 절망하느라 수많은 사람이 죽고 만다. 지구를 버려야 할 정도로 혼란하고 지난했던 시기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주인공 오이디와 이오, 칵터, 그리고 레온은 쓰레기장 행성인 융카우드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수명의 단축으로 인해 부모에게 길러질 시간을 가지지 못해서, 서로가 서로의 처음이자 유일한 가족이 된다. 그러나 오이디만은 무책임하게 자신을 버리고 죽으러 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시시때때로 괴로워한다.

  어느 날,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했던 T가 홀연 오이디 앞에 등장해 예언을 남긴다. 그 예언의 내용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듯 다음과 같다.

  T 너는 너의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와 같은 희생양을 낳는다.

  여기서 관객들은 틀림없이 매우 익숙한 오이디푸스 신화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온전히 신화와 겹쳐보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작중 오이디의 성별이 여성이란 점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기본 흐름도,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아들-아버지의 구도를 중요한 조건으로 취급하고 있으나 오이디는 존재에서부터 그 조건을 파격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 T가 신화와 종교를 대체하고 있다는 SF 배경 역시도 신화가 파멸된 세계관에 신화를 도로 끌어들이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를 신탁의 전승으로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를 변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작품의 기본 설정들은 그 경계를 한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안타만이 계속될지라도, 그라운드만을 맴돌지라도

  T로부터 원치 않게 전해 받은 예언과 죽어서도 자신을 속박하는 아버지가 야구공이 돼 날아왔을 때, 오이디는 피하지 않고 야구방망이를 들어 올린다. 아랫세대를 버리고 죽어버린 윗세대도, 윗세대를 죽여버린 T도 모두 방망이로 때려 없애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수시로 아버지의 환영을 볼 정도로 여리고, T의 말마따나 어리석은 존재였으므로 방망이질이 시원스럽지 못하고 미숙하다. T의 본체인 데이터센터를 불태우다가 되려 T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말 그대로, 헛스윙은 아니지만 안타에 지나지 않는 선택인 것이다.

사진 설명 시작. T를 붙잡은 오이디 일행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무당이 입을 법한 의례 의상을 입고 있는 T는 인공지능이지만 평범한 인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를 뒤에서 결박한 레온. 칵터는 T의 뒷면에 적힌 일련번호를 읽고 있다. 이 일련번호로 오이디 일행은 T의 본체인 데이터센터를 불태우러 떠나게 된다. 사진 설명 끝.
▲T를 붙잡은 오이디 일행 ©류사라

  안타를 치고 1루를 밟은 오이디의 방망이는 그의 대안 가족인 이오, 칵터, 레온에게로 넘어간다. 그렇지만 시원하게 홈런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모두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간신히 공을 넘길 뿐이다. 칵터의 지혜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말장난이 T를 죽이지만, 그들은 정작 T가 남긴 신탁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다. 이오는 흔들리는 오이디를 사랑과 수용의 태도로 감싸지만, 결정적인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각자의 안타 한 방 속에서 더딘 발걸음을 옮기는 오이디는 그야말로 비장한 영웅의 면모보다는 겁 많고 가족의 품이 필요한 자식의 면모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오이디 당차고 물러설 곳 없는 나의 연인이, 당차고 물러설 곳 없이 나를 감내해요. 수치스러워요. (사이) 이오.

  이오 응.

  오이디 내 엄마가 되지 마. (사이) 네가 말했던 그 많은 곳들, 그곳으로 가봐. 온 우주를 누비며 더 많은 것을 싫어하고 사랑해 봐. 그리고서 날 보는 거야. 돌아오고 싶다면 말이야. 이오, 그전까진 내 이름을 잊고 내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묘비도 세우지 마.

  결국 오이디는 칵터와 레온과 길을 달리하고, 유사 어머니였던 이오를 떠나보낸다. 아등거리며 쳤던 안타들이 결국 야구장 금을 따라 빙빙 돌게 만들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는듯이, 서럽게 운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자신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를 희생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오와 레온, 칵터의 사랑이 오이디의 눈물에 반박한다. 그들은 오이디에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마음이라든가 예감이라든가 믿음에서 오는 낯선 감각이라고. 야구장을 돌면서 규칙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뛰지 않은 까닭은 함께 야구 경기를 이어가고 있는 서로를 위해서였다고. 그 발걸음을 내디딜 때의 속도와 마음은 누군가가 정해줄 수 없는 거라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가 끝나고도 오이디는 한참을 앉아 있는다.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들리고, 맡아지고, 맛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을 감각하기 위해. 그 낯선 감각들을 깨웠을 때 오이디는 순응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극복하는 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애초부터 많은 것이 파격돼 있던 신탁은 부서진다. 안타만이 계속될지라도, 그라운드만을 맴돌지라도.

프로들의 아마추어리즘 대잔치

  극의 흡인력은 압도적이다. 낯선 설정도, 개성 강한 무대 소품도 잊어버리고 대사 하나하나에 흡입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유려하게 흘러가던 극에 제동을 거는 장치들이 삽입되면서 관객들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머무르기도, 곁가지 친 여러 생각 속에서 헤매게 되기도 한다.

  가장 강력한 제동장치는 극의 막간을 활용한 맥락 없는 스탠드업 코미디다. 이때 등장하는 정장을 입은 남성 A는 극의 등장인물도 극에서 언급되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열심히 무대를 세팅 중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극의 흐름을 비트는 말을 남발한다.

사진 설명 시작. 아무것도 없는 무대 위에 남성 A가 걸어나오고 있다. 앞에는 마이크 스탠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A는 무언가를 생각 중인 듯, 땅을 응시하며 걸어나오는 중이다. 사진 설명 끝.
▲스탠드업 코미디 중인 남성 A ©류사라

  A 여기 오신 분들 머릿속에는 많은 의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지? 상업 뮤지컬인가? 노래 은근히 좋은데? 안티 오이디푸스 아니었어? 아니 안타? 안티가 아니라 안타? 오타 아니야? 지금 이놈은 또 뭐고? (사이) 이런 질문들에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더 많은 질문을 하러 나왔습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메타적이라 극의 안팎을 넘나든다. 왜 연극의 감정은 과잉돼 있는지, 예술가는 왜 부모를 말하지 못해 안달인지, 부모도 자식도 왜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하는 순간 무대가 암전되고, A는 맥없이 자리를 뜬다. 혹은, 마이크 없이 무대 중앙에 섰다가 뒤늦게 깨닫고 마이크를 다시 가져오는 순간 무대가 꺼져 말 한 마디 해보지 못하고 무대를 떠나기도 한다. 그는 그 짧은 막간에도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사소한 실수를 연발하고, 접근성 자막을 힐끗 쳐다보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스태프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이렇듯 어딘가 어설픈 A의 등장을 비롯해 극에 난 의도적인 구멍들은 무대에 감돌고 있던 엄숙함과 위엄을 파격한다. 그 엄숙함과 위엄은 작품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화에서 비롯됨과 동시에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거대한 의례인 연극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엄중함이 무너지고 수시로 갈피를 찾는 관객들 앞에는, 결국 미숙하고 초라한 오이디가 아른거린다. 어딘지 어긋나고 서투른 연극 속 어딘지 어긋나고 서투른 오이디.

  프로들이 만들어놓은 아마추어리즘 한마당 안에서 그가 치는 안타가 더 기특하고 더 소중해진다.

가자 가자, 신탁 밖으로

  무대 한편에는 회색 미러볼 하나가 달려 있다. 융카우드에서 바라본, 푸른 빛을 잃어버린 작은 지구가 극 내내 외롭게 매달려 있다. 이오는 오이디를 떠나기 전, 그 미러볼을 쓰다듬는다. 자신들을 쓰레기 더미로 내몬 지구 사람들을 쓰다듬듯, 지구를 회색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오이디를 위로하듯. 그러자 미러볼에 촘촘하게 박혀 있던 스팽글의 결이 바뀌면서 미러볼은 금세 푸른색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푸른빛을 사방으로 반사한다. 즉, 중요한 건 실제 지구의 색이 아니라 그 지구의 색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시선에 달려 있다.

  가자 가자 신탁 밖으로

  개가 개를 먹는다는 비관 바깥으로 가자

  신을 먹으러

  신을 먹으러 가 보자

  수치가 수치에서 나를 구할 것이다

  오이디와 친구들은 계속해서 노래한다. 그들의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신탁 밖으로 가자는 말은 마치 신전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신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수치가 수치에서 나를 구할 것이란 말은 인공지능 T가 무한으로 계산하는 수치를 의미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극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지구의 푸른빛을 받게 되면 그 노래 가사가 다르게 들려온다. 위치가 어디든 신탁은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수치스러운 우리 존재들이 서로의 수치를 알고 감싸안을 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무대가 끝나고 하나씩 신전 밖으로 나가는 관객들의 걸음은 얼떨떨하다. 신전에서 벗어나도 오이디가 신탁에서는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만 같이, 각자의 그라운드를 걸어 나간다. 그럼에도 그 걸음을 걷는 속도와 방법, 표정은 어딘지 들뜨고 한결 자유로워 보였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불콰하게 취한 채로 다 비운 맥주병을 든 채 밤거리에 발을 내디뎠다. 무대 위 오이디의 마음으로, 무대 바깥의 오이디들이 하나둘 경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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