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머리』 표지
“지겨워 지겨워 정말 지겨워”(「무해한 그릇-물 마시는 시」)
어느 날, 우리는 그 ‘어느 날’들에게 예고 없이 공격받는다. 모든 게 참을 수 없이 뒤틀린 것만 같고, 타인은 한없이 지긋지긋한데 나조차 나의 아군이 돼주지 못하는 날들에게. 그럴 때는 내 말도 내 말이 돼주지 않는다. 내 말이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면 나는 뭐라고 어떻게 부르짖지. 박참새 시인의 첫 시집 『정신머리』는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의 박참새가 자기편이 돼주지 않는 말과 삐거덕거리며, 그러나 여전히 함께하며 황망히 싸워나가는 투쟁을 다룬다. ‘깡패 되려고’ 시를 쓰는, 작은 참새의 이야기.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냥 읽어.”(「T.H.에게 남기는 편지」)
박참새 시인의 투쟁은 공격적이다. 그러나 위협적이기보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나’들은 징할 정도로 악을 쓰는데, 그 악이 저항하는 대상들이 전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존재는 ‘나’에게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안전한 생존을 위한답시고 딸을 억압하는 부모(「수지」)고, ‘나’가 미칠 정도로 과하게 이해하려 드는 인간들(「청강」)이면서, “지들은 다 해놓고선” ‘나’에게는 자꾸 글쓰기 금칙을 만드는 문학하는 사람들(「창작수업」)이므로 불시에 ‘나’의 숨통을 조여온다.
“네가 가진 유일한 재료이자 소재인 것으로. 너에게는 말이 있다. 오로지 언어일 뿐인, 너에게만 머무를 뿐인, 그저 그뿐인, 동시에 전부라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때로는 연결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면서 단절을 초래하는 단 하나의 종말이기도 한, 오로지 말.”(「건축」)
그렇지만, 사방에 존재하는 적들이 숨통을 조여올 때조차 ‘나’가 사용하는 저항 수단은 말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만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날카로운 칼이 돼주지도, 가장 단단한 방패가 돼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목이 조여 숨조차 내쉬기 힘든 상태의 ‘나’에게 최악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말이 유일한 무기인 상황을 “저주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얌전히 죽을 바에는 좋든 싫든 말로 세상과 싸워나가기를 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항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이따금 저급해서, 절제되고 다듬어진 언어가 시의 언어라고 믿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박참새는 독자들에게 “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절제도 많이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그건 왜 몰라요?”(「창작수업」)라고 짓궂게 반박한다. 시인에게 있어 시어는 고급스러운 단어, 아름다운 어휘가 아니다. 자신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적확한 비명 소리가 돼주면 그것이 진정한 시어가 된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목에서 끓어나온 가래침처럼 새되고 불안정한 악다구니는, 그리해 날것의 소음이자 마음의 언어로 변모한다.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하는 그 투박하고 공격적인 목소리가 모순적이게도 가장 그를 이해하게 만드는 까닭은, 시인의 온 마음을 넣어 빚은 말의 진실성에 있을 것이다.
“사실로써의 가오와 굶주림의 기개”(「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
그렇다면, 박참새는 어떻게 계속 저항할 수 있을까. 모든 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지쳐 있음에도 계속해서 울부짖을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섣부르게 내려보자면, 좀체 들어내지지 않는 시인된 마음에서 비롯한 믿음을 말할 수 있다.
시 「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에서 시인은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서너 명의 예술가들이 외압에 의해 강제 퇴출당했던 일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시 쓰는 이로서의 자아를 시 전면에 드러낸다. 시의 ‘나’는 “맑은 눈의 광……신도” 같이 온전한 이해를 기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사실로써의 가오와 굶주림의 기개”로 대처하는 신부님의 노련함에 감탄한다. 그렇게 허상의 믿음이 지속되게 만드는 말의 힘을 믿으며, ‘나’는 괴로운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답습하기 급급한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비극에 분노하면서 “이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꾸짖음의 목소리는 분노나 원망에서 멈추지 않고 ‘나’ 그리고 ‘당신’에게 간곡하고도 명료한 부탁을 남긴다.
“말들이 현재를 살생할 수 없도록/그것이 직업이 되지 않도록/굶지 말고/손쓰며 막으십시오”
(「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
이 시는 시인의 여러 믿음을 내포한다. 말의 힘을 믿고, 말이 지닌 한계도 믿고, 그럼에도 말하려고 노력하는 자의 가치를 믿으면서도 그 노력 끝에 생겨날 수 있는 말의 위험성도 믿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지막에 등장하는 당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믿고 있다. 말의 무게를 분명히 인지하고, 그 무게를 감당하면서 글쓰기를 이어갈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는 분명히 시인 자신이 존재한다.
박참새는 자꾸 꿈을 꿈꾼다. 「수지」에서도 「건축」에서도 “마음 편안히, 집에서, 자면서”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무저항의 상태가 아니라 온전히 저항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내가 내 편이 되고, 내 말이 내 말이 돼주기를, 그래서 자유롭게 저항하고 자유롭게 떠들 수 있기를. 『정신머리』의 시들은 그런 면에서 제법 꿈결 같다. 그러나 아직 시인에게는 질러야 할 말이 많이 남아있다. 더 온전히 저항하고 더 온전히 말할 수 있기를, 그 투쟁의 끝에서 자신의 믿음이 승리하는 순간을 목도할 수 있기를. 시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시의 구절이 늘 시인의 마음이 돼주리라 굳게 믿는다.
“///////////////더 써야 돼요/////////////더 쓰고 싶어요//////////제게 시간이 모자라요////////////////”(「사랑의 신-등장인물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