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울려오는 메아리처럼, 시인의 목소리는 느지막이 찾아왔다. 지난 3월 12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연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발간위)’는 박목월의 미발표 유작 166편의 공개를 알렸다. 시인이 남긴 80권의 노트에 실린 시들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식은 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유작 공개는 어떤 자취를 거쳐왔고, 되돌아온 시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안겨줄까.
시인 박목월의 초상

우리는 박목월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가장 널리 알려진 박목월의 모습은 아마 청록파 시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의 이미지일 것이다. 박목월은 1939년 『문장』에 시인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지만, 곧 일제에 의해 『문장』이 폐간된 후 긴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해방 이후인 1946년이 돼서야 박목월은 동료 시인인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냈다.
박목월은 이 시집으로 우리말의 높은 시적 성취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그네」, 「청노루」 등 자연을 섬세하게 그린 시들은 그가 고향인 경주에서 외따로이 보낸 긴 집필 시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시대에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활동을 이어간 김동리 등과 달리, 박목월은 경주에서 젊음을 보내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시로 옮겨 담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박목월은 이때의 초상이다.
그러나 박목월이 자연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전쟁 이후, 중기에 접어든 박목월의 작품 세계는 생활을 소재로 했다. 이 무렵 시에서는 현실적인 걱정이 들끓는 바깥의 도시와 그에 대비되는 따스한 가정이 주로 그려졌다. 또 후기 박목월은 존재의 근원과 영적인 세계를 탐구한 시를 쓰며 원숙한 세계관을 완성해갔다.
이렇듯 박목월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갔지만, 그의 작품은 하나의 결로 묶이기도 한다. 발간위에 참여한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는 박목월이 “영원성에 대한 관심을 내내 이어갔다”고 읽어낸다. 박목월은 늘 영원을 좇았고, 그 형상은 초기에 자연, 중기에 가정, 말기에 신앙으로 변주된 것이다. 동시에 방 교수는 “영원과 대비해 생활에 묶여있는 자기 존재를 응시하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난다고도 말했다. 시인 자신이 「사월 상순」에 ‘누구나 인간은 반쯤 다른 세계의 물결 소리를 들으며 산다’고 썼듯, 박목월은 이상과 현실에 모두 귀를 기울여 시를 썼다.
이번에 공개된 유작 속 박목월은 우리가 알던 박목월 그대로일까, 혹은 새로울까. 발표된 시들에는 기존의 박목월과 구분되는 면모들이 보이기도 했다. 공개작 중 하나인 「슈샨보오이」는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구두닦이 소년을 그려낸다. 박목월의 시는 참여적이기보다는 서정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그 역시 한편으로 당대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이전에는 드물었던 장시(長詩)와 긴 연작들이 발견됐다는 점 역시 하나의 특징이다.
하지만 여전히 큰 맥락에서 박목월의 고유한 시적 세계관은 이어진다. 방민호 교수는 “영원성에 대한 관심, 존재의 일시성에 대한 응시는 이번에 공개된 작품들에도 나타난다”고 평하면서도, “이러한 면모가 이전에는 찾아보지 못했던 다른 맥락과 방식들로 새롭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 특별함을 짚었다. 이번 미발표 유작 공개가 시인의 세계를 한 뼘 더 확장한 것이다.
시인의 목소리를 가다듬기까지
새로운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발간위의 시작은 작년 4월, 단국대 우정권 교수(자유교양대학)의 우연한 발걸음이었다. 우 교수는 박목월의 장남인 박동규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와 오랜 인연을 거쳐왔다. 박 교수가 우 교수의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석사 시절에 박동규 선생님과 자유롭게 소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생님 댁에도 자주 가게 됐다”고 회상했다.
스승의 자택에는 커다란 서재가 있었다. 바로 그 서재에 박목월의 노트가 보관돼 있었다. 석박사 시절에는 그 노트의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작년 4월, 우정권 교수는 우연히 박동규 교수를 만나 노트의 열람을 승낙받았다. 우 교수는 노트 속 글들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우 교수는 노트와 박목월 전집을 대조해보며, 그 안에 방대한 양의 미발표 작품이 담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우 교수는 새롭게 발견한 이 작품들을 어떻게 세상에 내보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우정권 교수는 동료들을 모아 작년 8월 2일 발간위를 발족했다. 마찬가지로 박동규 교수에게 지도 받았던 방민호 교수가 합류했고, 한양대 유성호 교수(국어국문학과)와 단국대 박덕규 교수(문예창작과) 역시 힘을 보탰다. 홍익대 전소영 교수(국어국문학과)도 올해부터 참여했다. 그 외에도 한양대, 중앙대, 단국대의 국문과 대학원생들 또한 이 대규모의 작업에 함께했다.

발간위원들이 선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발간위는 우선 시인의 기록을 모두 활자 텍스트로 옮겼다. 이부터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연필로 직접 적은 친필이었고, 한자는 시인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독의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친필이 주는 아우라가 있었다”고 우정권 교수는 말했다. “이 아우라를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 발간위의 뜻이었다.
시인의 작업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도록, 발간위는 텍스트뿐 아니라 노트의 이미지 자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활자화에 이어 노트 전체를 스캔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노트가 오래된 탓에 알아보기 쉽지 않아, 번거로운 공정을 거쳐야 깔끔한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3개월이 지난 뒤, 마침내 시인의 기록은 고스란히 이미지로 남았다.
그 후 발간위는 주제·완성도·적합성 등을 고려해 전체 318편 중 세상에 발표할 작품을 골라냈다. 첫 번째 선별 기준은 완성 여부였다. “한 행 쓰다가 이어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는 어쩔 수 없이 제외했다”고 우정권 교수는 설명했다. 기존의 시와 거의 동일한 작품 역시 제외 대상이었다. 다만 기존 작품의 초기 버전에 해당하는 시들은 포함했다. “우리가 아는 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변했는지 볼 수 있으니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이 우 교수의 설명이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290여 편이 추려졌다. 그 뒤에는 4명의 발간위 위원들이 작품성을 기준으로 교차 검증을 했다. 우정권 교수에 따르면 주관적 판단을 우려해 연구자들은 신중히 수차례의 검토와 토론을 거쳤다. 그렇게 마침내 모인 166편은 위원들에 따라 주제별로 분류됐다. 대장정이 마무리된 후, 우 교수는 지난 1월 9일 위원들끼리 기념 촬영을 했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우리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 뿌듯했다”는 소회를 덧붙이기도 했다.
문학사 속에서의 유작 발굴

진열된 시인의 노트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예술가들의 미발표 유작이 사후에 공개됐다는 소식은 종종 들려온다. 공교롭게도 박목월의 미발표 유작이 발표된 무렵, 소설 『백년의 고독』(1967)으로 널리 알려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미발표 유작 『8월에 만나요』가 공개됐다. 유작 공개의 사례로는 작년에 사후 100주기를 맞이한 프란츠 카프카 역시 유명하다. 카프카는 사후에 원고를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친우였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문학적 성취를 알리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한국 문학사에선 이번 박목월의 경우처럼 이 정도 대규모의 유작이 발표된 사례가 매우 드물다. 해방 이후 전쟁과 사회 격변기가 이어지며 작품이 보존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많은 작가가 월북하거나 반대로 월남해오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료들이 유실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나마 전해지는 유작 공개의 사례 중 시의 경우에는 윤동주가 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지인이었던 정병욱과 강처중이 각각 보존한 작품을 사후에 묶어낸 유고작이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직접 건네준 필사본 시집을, 강처중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와 도쿄 유학 시절에 쓴 시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해방 이후까지 윤동주의 유산을 보존해 온 덕에, 1948년 윤동주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의 경우는 무명의 작가가 유고 시집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경우로, 박목월의 사례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저명한 기존 시인의 작품이 이처럼 많이 발굴된 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방민호 교수는 시인 박목월의 새로운 작품들이 “주제나 소재 면에서 다채롭고 촘촘하게 기존 작품 세계에 대해 새로이 망을 짤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제껏 참여시에 조금씩 밀려났던, 김소월로부터 박목월에게로 이어지는 서정시의 계보를 다시 쓸 기회”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새로운 평가를 불러일으키는 만큼, 유작 공개에는 부담도 따른다. 이를 증명하듯, 박동규 교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작품을 공개하지 않았다. 우정권 교수는 “박동규 선생님도 문학 연구자인 만큼, 아버지의 작품을 여는 순간 그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 교수는 “시인 본인이 공개하지 않은 데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텐데 아버지의 뜻에 누를 끼칠지 모른다고 근심하셨다”고 박 교수의 주저를 설명했다.
우정권 교수는 박동규 교수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더 시간이 흐르면 이 문학의 진가가 아무도 모른 채 파묻힐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 세상에 미처 다 내놓지 못한 목소리를 대신해서 빛을 보게 하는 것이 연구자로서의 사명일지 몰랐다. 오랜 고민 끝에 박 교수가 허락하면서, 박목월의 알려지지 않은 시는 드디어 우리에게 찾아왔다.
시의 날갯짓이 부를 나비효과
이번 작품 공개 이후, “대학원생들 큰일 났다” 혹은 “고3들 큰일 났다” 식의 반쯤 농담 같은 반응들이 잇따랐다. 거장의 시가 추가로 공개된 만큼, 학계 연구와 국어 교육 지형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방민호 교수는 “실제로 학원가에서 제일 큰일 났다고 알고 있다”고 웃으며 동의했다. 선공개된 시인 「슈샨보오이」를 벌써 분석한 강사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들이 이번에 발표된 박목월의 시를 시험지에서 만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BS 교재에서 다뤄지거나 기존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이 접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시험 출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정권 교수는 “「슈샨보오이」처럼 뚜렷하고 명확한 작품들은 주제를 묻는 문제로 이르게 출제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전망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후속 연구가 활발히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번 발표작에 수록되지 않은 시들도 추후 연구를 위해 공개될 가능성이 있다. 방민호 교수는 “관련 연구가 다양한 주제로 활발해지고 학술 대회도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정권 교수 역시 “박목월을 다룬 박사 논문이 많아질 것 같다”고 기대하며 “새로운 연구 주제들이 생겼으니 연구자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달가운 현상일 것”이라고 전했다.

미발표 작품 중 하나인 「마지막 연가」의 첫 장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학생과 연구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이번 작품은 어떻게 다가올까. 발간위는 독특하게도 인쇄의 형태로 작품을 선보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작들은 전자책의 형태로 묶여 플랫폼에서 공개된다는 것이다. 왜 디지털일까? 우정권 교수는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전자책은 별도의 편집 과정을 거친 평범한 본문과 달리, 원본 노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이미지들로 구성돼 있다. 작품이 지닌 고유한 아우라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발간위는 준비한 전자책을 4월 17일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전자책을 구입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크기로, 박목월의 시를 그대로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종이책의 물성 역시 느껴보고 싶은 사람을 위해, 발간위는 박목월의 노트를 그대로 복각한 증정본을 준비했다. 전자책 구매자 중 희망하는 이들은 이 복각본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시를 창작하는 입장에서도 이번 발표는 뜻깊다. 우정권 교수에 따르면 노트에는 “시인이 어떻게 처음부터 행과 연을 구분하면서 작품을 고안했는지”나 “시어를 썼다 지우고 하는 창작의 과정”이 다 드러나 있다. 우 교수는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교본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내비쳤다.
발간 이후에도 많은 경로로 박목월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4월 중에는 경주의 목월문학관에서 특별전시가 있을 예정이며, 5월 이후에는 서울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에서도 관련 전시가 열린다. 그 외에도 발간위는 낭독회와 강연 등 추후의 일정을 바쁘게 준비하고 있다.
우정권 교수는 이번 발표를 통해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시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각박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시의 서정에 깊이 빠져볼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는 희망도 전했다. 박목월은 한평생 섬세한 언어로 이상과 현실에 대한 시선을 옮겨적었다. 그가 「밥상 앞에서」에서 썼듯, 시인은 오랜 침묵을 건너 ‘이만큼 선물을 사 갖고’ 돌아왔다. 이제 그 선물 꾸러미를 정신없이 풀어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