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 (사회 21)
사회학을 공부하고 베이스도 칩니다. 힙스터가 되고 싶지만 요원해보입니다.ylee0302@snu.ac.kr
‘밴드 붐은 왔다!’ 조금 성급한 언명일 수 있지만, 분명히 최근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 체감된다.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위시한 락 페스티벌은 매년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슈퍼밴드》 시리즈,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젼》 등 락을 주제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도 꽤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근 밴드 음악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 밴드들이 뛰어난 실력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잔나비’, ‘실리카겔’, ‘루시’, ‘터치드’, ‘너드커넥션’ 등 여러 밴드가 상당한 연주력과 음악적 완성도를 바탕으로 많은 팬을 모으고 있다. 단순히 대중적이기만 한 음악이 아니라 대중에게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을 설득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을 기쁘게 듣다가도 가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뭐랄까, ‘너무 잘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너무 잘해서 아쉽다니? 사실 여느 때보다 세련된 그들의 음악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내가 너무도 그리워하는 어떤 정동이 있는 것이다. 바로 ‘찌질함’의 정동이다. 아, 물론 어둡고 우울하고 슬픔을 노래하고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음악은 여전히 많다. 이러한 감각은 ‘너바나’의 등장 이후 락이나 인디 신의 한구석에 늘 머물러 있다. 앞서 나열한 밴드들도 이런 감각을 잘 풀어내는 곡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들의 음악은 찌질하지 않다. 다만 정치(精緻)한 애상이거나 비장한 의분(義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찌질함’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것을 그리워하는가?
어떤 정동을 특정한 시대와 집단에 한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지만,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 인디 음악의 계보를 간단히 소개해야겠다. 흔히 한국의 인디 신은 1990년대 중반쯤부터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을 위시한 ‘조선 펑크’, 그리고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이발관’ 등으로 대표되는 모던 록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넘어가며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다 한 음악방송에서 인디 밴드 멤버들이 알몸 노출을 한 사건으로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인디 신이 회복된 것은 ‘장기하와 얼굴들’로 대표되는 2세대 인디 밴드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리고 2010년대 후반쯤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3세대 인디 밴드로 이어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찌질함의 정동은 2세대 인디 밴드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핵이었다.
2세대 인디 밴드들이 공유하는 찌질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상을 고려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의 20대는 소위 ‘88만 원 세대’로서 극심한 경쟁과 불안정성을 감당해야 하는 세대로 여겨졌다. 한편,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폐인’이나 ‘잉여’ 등으로 칭하며 자조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그리고 그 코드는 ‘병맛’이나 ‘B급’ 등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때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는 청년들의 일상을 적확히 표현하면서도 당시 인터넷 문화의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곡으로 여겨져 큰 인기를 끈 것이다. 그들이 속한 레이블 ‘붕가붕가레코드’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고 있었으며(장기하가 속해있던 밴드의 이름 ‘청년실업’은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 ‘붕가붕가레코드’는 2세대 인디 신의 중심이 됐다. 요컨대, 내가 다루려 하는 찌질함의 정동이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청년 세대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경제적 압력과 그들이 향유하던 인터넷 문화가 만나며 형성됐다. 그리고 ‘붕가붕가레코드’ 중심의 인디 밴드들은 해당 정동에 조응함으로써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찌질함의 정동을 뜯어보며 살펴보자. 우선, 이들의 곡에는 전반적으로 패배감과 자기 비하의 정서가 서려 있다. 이러한 가사의 극치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들일 것이다. 《스끼다시 내 인생》은 주변 사람들을 흉보면서도 그들에 비해 자신이 전혀 잘났다고 할 수 없다며 자조한다. 자기 자신을 ‘스끼다시(밑반찬)’, ‘스포츠 신문’, ‘마을버스’처럼 작고 주변적인 존재들에 비유하며 ‘사시미’처럼 중심적인 위치에 들지 못하는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인 취약함을 고발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도덕적 지위를 까 내리기도 한다.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은 《불효자는 놉니다》에서 “월화수목금토일 출근 않”는 화자가 “담뱃값이 똑 떨어지고 커피값이 없어도” 철없이 놀다가 “잔소리 듣고 욕먹어도 이불 펴고 눕”는 불효를 노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비하가 끝없는 우울에의 침잠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키치(kitsch)’가 부정적인 정동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선택되는 것 같다. ‘관악청년포크협의회’, ‘눈뜨고코베인’, ‘브로콜리 너마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술탄 오브 더 디스코’ 등의 작명은 권위 있어 보이거나 유명한 것을 의도적으로 저열하게 모방하는 유머로써 그들의 음악이 가진 부정적인 정서를 승화한다. 이러한 방식의 유머는 당시 인터넷 문화의 ‘잉여’ 혹은 ‘병맛’의 감수성과 조응한다. 한편, 그들의 키치가 단순한 방어기제로 남지 않는 이유는 키치의 에너지가 다른 요소에의 열정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라틴 음악과 ‘콧수염’에 쏟는 열정, ‘술탄 오브 더 디스코’가 디스코 음악과 아랍 컨셉에 쏟는 열정 등이 그렇다. 꼭 키치함 자체에 대한 열정이 아니더라도, 찌질함의 정동을 가진 음악은 열정을 갖는 것 자체가 찌질함의 조건이 되는 대상에 열정을 가지고 마는 찌질한 열정을 함축한다. 그것이 가장 사소하게는 콧수염(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되기도 하며, 가장 숭고하게는 음악이 되기도 한다(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렇다면 나는 왜 찌질함의 정동을 그리워하는가? 아마도 나는 찌질한 열정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들 하는데 죽어도 좋아지지 않는 마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괜히 좋아하게 되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찌질함의 정동을 공유하는 음악을 듣다 보면, 그런 내 마음에 활력이 부어지는 것 같다. 붕가붕가레코드의 ‘붕가붕가’는 개나 고양이 등의 마운팅을 의미한다. 스스로 성욕을 해소하는 그들처럼 음악인들이 스스로의 음악적 지향성을 따르며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그렇다, 우리의 찌질함에는 활력이 있다. 찌질해지더라도 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기꺼이 원하는 활력이다.
다행히도 찌질함의 정동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초록불꽃소년단’은 찌질함의 활력을 청춘과 결부시키는 펑크 밴드다. 그들은 펑크가 “아무도 안 듣는 이딴 노래”일지라도 “다시 태어나도 우리들은 펑크를 노래할 거”라 울부짖는다(《We Don’t Give Up》). 펑크와 청춘에 대한 집착이 묻어나는 그들의 음악은 러닝을 하며 듣기에 너무 좋다. ‘왑띠’의 음악 역시 찌질함의 정동을 만끽하기에 좋다. 첫 EP인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노래》에선 각종 인터넷 밈 뒤에 숨어서 찌질한 열정을 겨우 드러냈다면, 이제는 팝 펑크와 이모 사운드 위에 열등감, 상처, 그리고 열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마음껏 찌질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면, 이들을 주목해 달라. 우리의 찌질함에는 활력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