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자는 없다

차우형(자유전공학부 졸업)
함께 살아남아서, 언젠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cwh9211@snu.ac.kr

  왜 기자 하려고 그래요? 강사는 기자를 지망하는 수강생들에게 질문했다. 답변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강사는 덧붙였다.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우리 망했거든요. 강사는 현역 기자였다.

  저널리즘 스쿨을 수강한 적 있었다. 며칠간 저널리즘 전문가와 언론 업계 종사자의 강의가 이어졌다. 강의 주제는 달랐지만, 강의를 여는 말은 비슷했다. 언론 업계가 불황이다. 언론 산업은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었다. 저널리즘이 위기에 빠졌다. 강사 절반은 수강생들에게 진로를 재고해 보라는 말을 했다. 진담이었는지 농담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수강생들에게는 편히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언론 업계에 관심 없는 주변 친구들이 내게 하는 말은 크게 두 종류다. 과거와 달리 언론 업계는 썩었기에, 기자가 돼봤자 네 생각처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은 못 한다. 혹은, 너는 ‘기레기’가 되지 말고 꼭 좋은 기자가 되기를 바란다. 어느 쪽이든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소위 ‘기레기’와 구별되는, 저널리즘을 대변하는 ‘진짜’ 기자가 따로 있다는 것. 친구들에게 기억에 남는 ‘진짜’ 언론인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른다고 답한다. 가끔 손석희가 언급되지만, 손석희는 아나운서다. 최근 나온 좋은 기획 기사를 언급하면 친구들의 반응은 똑같다. 나는 뉴스에 관심 없어서 몰라. 아무리 좋은 기사를 남긴 기자라도, 친구들에게는 ‘기레기’가 대다수인 집단의 일원에 불과하다. 도대체 ‘진짜’ 기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과거에는 많은 기자가 자신이 저널리즘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기자들 대부분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스스로 의미를 설명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편집 책임자였던 맥스웰 킹이 20여 년 전에 한 이야기다. 당시 한국을 기준으로, 기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자와 언론사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과거 기자라고 해서 오늘날 기자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과거에는 언론사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에게 뉴스를 제작하고 전파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뉴스를 전하는 매체는 언론사의 소유였다. 저널리즘의 중요한 부분인 뉴스의 공급은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의 전유물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오늘날 주된 매체인 인터넷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제는 언론사에 소속되지 않아도 저널리즘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다. 언론사는 자신의 저널리즘적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언론사가 매체 독점 능력을 잃어버린 순간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언론 업계는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세월호 참사나 코로나19 발발 등 여러 순간에 걸쳐 언론 업계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언론 업계가 계속해서 가치를 증명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언젠가는 언론사가 필요하다는 통념 자체가 흔들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언론사의 위기에는 자업자득적 측면이 있다. 시민들이 언론사의 위기를 남의 일로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언론 업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언론사의 위기는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언론사의 위기를 단순히 ‘진짜’ 기자가 사라진 문제로 정의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진짜’ 기자가 사라졌다는 문제의식은 과거에 ‘진짜’ 기자가 존재했다는 생각을 암시한다. 그러나 언론사의 위기가 저널리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진짜’ 기자의 존재 가능성에 의문을 던진다. 저널리즘은 정보의 평등을 추구한다. 언론사가 매체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른 사회 구성원이 매체를 이용해 정보를 공급할 기회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언론사의 이해관계와 저널리즘의 지향점은 동일하지 않다. 기자와 언론사는 저널리즘을 추구할 뿐, 저널리즘을 대표할 수는 없다.

  과거에 전성기를 누려본 언론사와 달리, 저널리즘은 늘 위기였다. 권력은 늘 저널리즘을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과거에는 폭력으로 저널리즘을 억압했다면, 오늘날에는 은밀하게 저널리즘을 길들일 뿐이다. 제도 수정이나 인사 개입은 물론이고, 트럼프처럼 가짜 뉴스를 강렬하게 주장해 저널리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기도 한다. 또,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는 저널리즘도 경제적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언론사는 광고주의 눈치를 봐야 했고, 기자들은 수익과 직결되는 조회수를 위해 선정적이고 과장된 뉴스도 망설임 없이 써야 했다.

  저널리즘은 한 번도 당연했던 적이 없다. 본래, 진실에 접근할 기회는 불평등하게 주어진다. 상류 계층에 속할수록 진실에 접근할 기회가 늘어난다. 정보 격차는 지식 격차, 나아가 계층 격차로 이어진다. 불평등의 재생산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저널리즘은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정보를 가공하고 전파해, 더 많은 사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는 진실에 접근할 기회의 평등 위에 성립한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고, 민주주의 덕에 주권을 보장받은 시민들의 문제다. 저널리즘 정신에 동의했던 수많은 시민 덕에 저널리즘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저널리즘의 대변자인 ‘진짜’ 기자는 없다. 저널리즘은 우리 모두의 문제지, 기자 혼자 대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기자에 대한 환상은 저널리즘에 대한 책임을 전부 언론인에게 떠넘긴 결과물이다. 저널리즘을 지켜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움직임에 맞서고, 저널리즘 발전을 모색하는 이들의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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