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교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자기소개서 쓰기 참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필이면 무엇을 쓸지 구체적으로 묻기보다 분량만 정해주고 ‘자, 소개해 봐라’ 하는 형식의 자기소개서였거든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글을 써 내려가긴 했는데, 문장을 적을 때마다 덜컹거리며 종종 글쓰기를 멈추곤 했습니다. 나름대로 프로그램 주제와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는데도, 왜 제가 이 프로그램에 뽑혀야만 하는지 글로써 조리 있게 정리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외부 장학금에 지원하기 위해 여러 서류를 작성했을 때도 가슴이 먹먹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장학금 지급 관련 평가에서는 지원자가 지금 얼마나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인지 소명해내는 작업이 계속 이어지는데, 왜 제가 이 장학금에 선발돼야만 하는지, 왜 다른 사람보다 제게 더 장학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주길 바라는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도 면접을 보면서도 답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명백하게 푸념하는 글입니다.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서울대저널〉의 독자분들께요. 커버장이 돼서는 칼럼에 푸념만 늘어놓고 있다니 편집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 구구절절하고 한숨 섞인 신세타령이 저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번 183호의 커버도 결국 증명하는 일로 귀결됐다고 생각합니다. ‘생활물가’라는 대주제가 정해지고, 솔직히 처음에는 제가 맡은 기사를 쓰는 걸 얕잡아 봤습니다. 길가의 아무나 한 명을 붙잡고 ‘요새 밖에서 사 먹는 밥 한끼가 너무 비싸지 않냐’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가 때문에 삶이 힘들다’는 결론을 기사에 적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꽤 길더군요. 결론을 얼마간 단정지은 상태에서 접근했던 것이 문제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웬만큼 돈을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요.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워도, 모든 것이 비싸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요. 누군가는 물가 지표가 매우 객관적이고, 물가 상승률을 살펴보면 실제로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국의 인플레이션이 심하지 않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그런 수치들로 확연히 증명하기 어렵다고 해서 사람들이 체감한 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조차도 돌아보면 이번 기사에서 ‘객관적인 통계’로 고물가 현상을 증명하는 일에만 매몰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체감되는 물가의 심각성을 수치로써 하나씩 증명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고 느꼈던 듯합니다. 그 과정에서 숫자 뒤에 놓인 여러 삶의 굴곡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나 혼란한 마음에서 적어 내린 기사가 여러분께 어떻게 다가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반응하셨을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모쪼록 고개를 끄덕여주셨길 바랍니다. 놓친 부분이 보여서 종종 고개를 갸웃하셨다면, 더욱 열심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증명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곳곳을 살피겠습니다. 이렇게 또 이런저런 다짐들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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