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에 찬란한 무지개가 드리우다

‘2024 서울대학교 퀴어문화제: 서울대를 퀴어링!’ 열려
ⓒ큐이즈

  지난 27일부터 사흘간 학내 캠퍼스에서 ‘2024 서울대학교 퀴어문화제: 서울대를 퀴어링!(퀴어문화제)’이 열렸다. 퀴어를 대주제로 내건 문화제가 학내에서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자별로 각기 다른 연사가 방문해 관객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퀴어문화제는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ueer In SNU(QIS, 큐이즈),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큐이즈

  첫날엔 황인찬 시인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황인찬 시인은 『사랑을 위한 되풀이』,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등의 시집을 펴내 다수의 수상 경력을 지닌 작가다. 큐이즈 원도 대표는 황인찬 시인을 “계속해서 새롭고 퀴어한 언어를 만들어 온 시인”이라 소개하며 행사의 포문을 열었다.

ⓒ큐이즈

  이날 황인찬 시인은 창작자이면서도 한명의 문학 독자로 마주했던 고민들을 서슴없이 나눴다. 황 시인은 청소년 시절을 “마음을 기울일 퀴어 텍스트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퀴어 독자들을 두고 “내 얘기가 아닌 것들을 읽으면서도 내 것이라 상상하고 과몰입하는 이들”이라 칭하기도 했다. 한편 “청소년 퀴어의 정동이 표현되는 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직접 겪은 아쉬움이 창작의 동기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둘째 날엔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상영회와 GV(Guest Visit)가 열렸다. 《너에게 가는 길》은 각각 게이,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두 엄마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 영화다. 약 90분의 상영 시간 동안 어둑한 강의실에선 이따금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연분홍치마

  이어 영화에 출연한 성소수자 부모모임(부모모임) 비비안 활동가를 비롯해 애니 활동가와 변규리 감독이 자리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게이 아들을 둔 비비안 활동가는 “세상은 내가 변하는 만큼 바뀐다”는 말을 전하며 “과거엔 ‘게이’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기 힘들었지만 영화에 출연하고 GV를 여러 번 나가며 자신이 변했고, 그만큼 세상도 변했으며 앞으로도 변화해갈 것”이라는 진심을 내비쳤다.

  커밍아웃에 대한 솔직하고 현실적인 충고도 이어졌다. 비비안 활동가는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나 자신”이라며 “어떤 답을 들어도 괜찮다는 정서적 준비와 더불어 경제적 독립이 가능할 때 커밍아웃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부모가 자식에 대해 모든 걸 알 필요는 없다”며 부모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굳이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견해도 전했다.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질문엔 “나 자신을 단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답변이 나왔다. 비비안 활동가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단단해진 지금은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변화할 수 있었던 건 “부모모임에서의 활동과 사람들의 지지 덕분”이라며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끼리 연대하고 교류하는 것의 중요성도 덧붙였다.

▲관객들과 대화 중인 변규리 감독, 비비안 활동가, 애니 활동가

  마지막 날엔 김보미 활동가의 강연이 열렸다. 김 활동가는 제58대 총학생회장이었으며 후보 신분일 당시 정책간담회에서 레즈비언이라 커밍아웃한 바 있다. 현재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 활동가는 졸업 후 성소수자 인권단체 ‘다양성을 향한 지속가능한 움직임, 다움’을 창립해 현재도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퀴어문화제에선 김 활동가 재학 당시의 활동들부터 현재 품은 고민까지 들을 수 있었다.

  김보미 활동가는 “재학 당시 연달아 발생했던 교수들의 성폭력 사건이 구조적 문제임을 인지했지만 해결 과정에 학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 성폭력 피해자가 공론화해야만 그제야 논의가 시작될 뿐, 문제를 예방하지는 못하는 상황을 개선할 필요성도 느꼈다. 김 활동가의 문제의식은 서울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발족으로 이어졌다.

  커밍아웃의 계기로는 “학내 성소수자들에게도 목소리가 있고, 학교가 커밍아웃을 해도 안전한 공간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커밍아웃 당시 “사람들이 가진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고 사랑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발언했다며 회고했다.

  학생회장 임기 동안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김보미 활동가는 당시 “큐이즈에서 내건 신입생 환영 현수막이 훼손되는 등 많은 백래시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훼손된 현수막에 귀여운 반창고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등 지혜롭고 유쾌하게 대응했다”며 자부하기도 했다.

  김보미 활동가가 지닌 현재의 고민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이다. 김 활동가는 “지속 가능한 인권운동은 어떻게 가능할지, 뜻이 맞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는 어떻게 찾을지 고민”이라고 밝혔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의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이가 틀어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방법을 묻는 질문엔 “입장이 달라도 동료의식을 가지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어 동료의식에 대해 “한 손으로는 싸워도 나머지 한 손은 서로 붙든 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 비유했다.

▲강연 중인 김보미 활동가

  서울대학교 퀴어문화제는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큐이즈 원도 대표는 행사를 마치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퀴어한 욕망이 춤추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간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발언했다. 다종다양한 욕망을 동력으로 각 분야의 최전선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연사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로가 됐다. 관악에 드리운 무지개가 곳곳으로 퍼져 나갈 미래를 낙관해 본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제64대 총학생회 보궐선거 입후보자 없음으로 무산

Next Post

노란 손 편지가 온기의 마음에 닿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