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손 편지가 온기의 마음에 닿을 때

온기우체부 햇살, 구구, 겨울을 만나다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 위치한 온기우편함

  언제 마지막으로 손 편지를 받아봤는가? 어린 시절 짧게 주고 받았던 생일 축하 카드만이 떠오를 수도 있다. 디지털의 발달로 오래도록 마음을 다해 펜으로 직접 글자를 적어 내려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현대사회를 바쁘게 살아가느라 편지를 쓸 여유조차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손 편지가 희소해지면서 마음을 진솔하게 전하는 손 편지만의 정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와중 손 글씨를 가득 담아낸 편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온기를 전하고 있는 온기우체부 햇살, 구구, 겨울을 만나봤다.

온기우편함, 고민에 손 편지를 전해드려요

  길을 걷다 노란 우편함을 본 적이 있는가? 일반적인 빨간 우체통과 달리 샛노란 우체통을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들여다보자. 그곳에 고민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약 한 달 정도 후에 익명의 우체부가 정성스럽게 적은 답장을 받을 수 있다. 바로 온기우편함이다.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 위치한 온기우편함

  비영리 사단법인인 온기우편함은 사회 구성원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우울감을 완화할 수 있도록, 자신의 얘기를 편히 하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되고자 문을 열었다. 2017년 2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온기우편함은 현재 전국 66곳에 설치돼있고, 매월 1,500통의 고민 편지에 공감과 위로를 담은 손 편지 답장을 전하고 있다. 답장을 전해주는 온기우체부는 자원봉사자들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랜선 온기우체부까지 포함해 무려 600여 명에 달한다.

  온기우체부로 모인 이들은 세상 사람들과 따뜻함을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온기우체부로 활동하게 된 겨울은 학창 시절에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끼리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위로를 받았다. 이 선한 영향력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온기우체부로 지원했다. 햇살은 온기우체부로 활동한 경력을 이어 지금은 온기우편함 단체의 직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심리학을 전공한 햇살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햇살은 온기우편함의 직원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온기우체부들과 매주 고민 편지에 답장을 쓴다. 2018년부터 활동하며 현재 한 반의 리더를 맡고 있는 구구는 힘들었던 자기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이를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이들의 마음은 온기라는 단어에 잘 녹아들어 있다. 편지글에는 받는 이를 지칭하는 말이 있기 마련이다. 온기우편함에 고민을 보내 답장을 받는 이들은 모두 온기라고 불린다. 온기우편함을 처음 기획한 조현식 소장이 듣기만 해도 따뜻한 마음이 잘 느껴지는 단어를 고민하며 사전을 한참 찾아 발견한 단어다. 구구는 온기라는 단어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인상”을 갖고 있다며 정감이 물씬 느껴진다고 말했다. 편지를 받은 온기들이 온기우체부들도 온기라고 불러주기도 한다. 겨울은 “살면서 누가 나를 온기라고 불러주겠냐”며 세대나 성별, 직업을 막론한 따스한 지칭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온기우편함 활동과 관련된 명칭엔 대부분 따스함을 품은 온기라는 말이 붙어있다.

소중한 온기님께

  온기우편함에 도착하는 편지들은 전국 곳곳에 설치된 우편함이나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온기우체부들에게 닿는다. 편지들은 모두 제각각의 고민을 담고 있다. 햇살은 매주 편지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스크리닝 작업을 할 때마다 “편지를 쓸 때까지의 상황과 마음을 온전히 알기는 어렵겠지만 그 작은 편지에서도 작성자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느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세상에 같은 고민은 없기에 모든 고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고도 덧붙였다.

  구구는 오프라인 공간의 우편함 설치를 확장해 가면서 “우편함의 위치에 따라 고민의 내용이나 연령대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햇살에 따르면 온기우편함에 편지를 보내는 온기들의 연령대는 매우 다양하지만 20대와 30대가 가장 많은 편이다. 최근에는 어린아이들의 학업 고민이 많아졌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나이대를 가리지 않고 꾸준하다. 새로 설치하는 우편함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설치 위치를 고심한 덕에 고민 편지의 수 또한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고민 편지를 읽고, 온기우체부는 진심을 담아 답장을 쓴다. 우체부 개인에게도 비슷한 고민이나 경험이 있는 경우 해당 편지를 골라 각자 개성을 담아 답장을 작성하지만, 기본적인 작성 원칙은 꼭 준수해야 한다. 먼저 익명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온기 및 온기우체부로 호칭을 통일한다. 또 답장에서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온기우편함에서 전하는 편지는 공감과 위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해봐’ 혹은 ‘하지 마’와 같은 단정적인 말들은 최대한 지양한다.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기에, 경험을 통한 공감을 나누되 나에게 정답일 수 있는 경험이 다른 이에겐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온기우체부는 활동을 시작하는 첫 시간에 제공되는 답장 예시를 통해 작성 원칙을 익힌다. 처음 쓴 답장은 2통까지 운영위원회의 검토를 거친 후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겨울은 처음 편지를 쓸 당시 첫 장을 쓰는 데에만 두세 시간이 걸렸다. 편지를 보낸 온기가 겪는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과, 자신이 쓴 문장이 혹여나 상처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활동을 지속하며 부담보다는 마음을 담는 것에 더 중점을 두기로 했다. 겨울은 “세상 어딘가에 온기님 편이 하나쯤은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구구는 “편지를 받았을 때 기쁘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지를 쓰고 있다.

▲온기우편함 전용 편지 용품

  답장을 받은 온기는 답장의 답장을 다시 남겨주기도 한다. 온기우편함 측에서 답장과 함께 동봉한 카드에는 답장을 써준 온기우체부에게 감사 한 마디를 남겨달라는 안내와 함께 네이버 블로그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첨부돼있다. 블로그 속 ‘온기님 답글 공간’에 남겨진 글들에서는 온기우편함의 모토가 실현되는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에게 손 편지 위로를 전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그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는 모토다. 온기우체부들은 성별, 연령대, 직업 등 그 무엇과도 무관하게 누구에게든 닿을 수 있는 작은 마음이나 위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겨울은 온기님 답글 공간에서 전해 받은 글 중 “답장을 써준 온기우체부에게도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는 글이 감동이었다”며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됐던 말을 다른 이에게도 전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애틋했다”고 회상했다. 편지를 읽으면서 한참을 울었고 힘들 때마다 다시 펼쳐 보겠다는 말들, 짧게 썼는데도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는 말들을 보며 온기우체부들은 전해줬던 마음을 따스하게 돌려받는다.

함께 위로받는 온기우체부

  온기우체부들은 매주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온기 공간에 모여 함께 답장을 쓰고 편지를 발송한다. 편지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전 한 주 동안 감사했던 순간들을 공유하는 시간도 있다. 온기우체부들은 감사 나눔을 위해서라도 일상을 보내며 고마운 일들을 계속 찾아내곤 한다. 햇살에겐 이 시간이 “솔직함이 따뜻한 지지와 위로로 돌아오는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시간”이다. 겨울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하며 “힘든 일이 있어도 감사했던 일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고,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고 전했다. 꾸준한 온기우체부 활동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소소한 감사 표현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습관이 됐다.

  온기우체부들의 다양한 감사 인사는 서로의 마음을 넓히기도 한다. 겨울은 “당연하게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타인의 배려로 인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모임을 진행하는 리더를 맡고 있는 구구는 감사 나눔 시간에 더해 온기우체부들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친밀감을 위해 노력 중이다.

  감사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이 답장할 편지를 고른 온기우체부들은 1시간 30분 가량 개별적으로 답장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진다. 온기우편함에 들어오는 고민들은 다양하기에 현재 온기우체부 자신의 고민과 비슷한 편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편지를 모두 작성하면 각자 어떤 고민 편지에 대해 어떻게 답장을 적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겨울은 다른 온기우체부가 쓴 답장을 들으면서 본인까지 위로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6년 넘게 온기우체부로 편지를 쓰고 있는 구구는 “편지를 오래 쓰다 보면 항상 비슷한 내용의 답장을 쓰는 게 아닌지, 이 편지가 정말 도움이 될지 걱정이 커지는 시기가 온다”며 그럴 때마다 다른 온기우체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 접근법과 방향을 새로이 배운다고 말했다.

  온기우체부는 답장을 직접 받는 당사자는 아니지만, 편지에 담긴 온기를 간접적으로 나눠 받으며 다시금 진심의 힘을 확인한다. 편지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햇살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온기를 만난 경우 “결국 그 상황을 겪었던 과거의 나에게 쓰고 싶었던 말을 쓰게 된다”며 함께 위로받고 있다고 말했다.

▲온기 공간 ⓒ온기우편함

  온기우편함은 답장을 전하는 온기우체부의 마음에도 지지를 보내기 위해 여러 행사를 기획한다. 매년 연말파티가 열리고, 온기우체부들의 고민에 답장하는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햇살은 단체 행사의 가장 큰 의미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따스하게 바꾸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온기가 가득하길 바라며

  온기우체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온기 직원들의 노력도 눈에 띈다. 온기 직원들은 고민 편지 수거 및 분류, 온기 공간 관리 등 온기우편함 활동의 전반을 살핀다. 온기 직원의 주요 업무는 편지 분류 작업으로,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답장을 전달할 수 있는 주소가 명확히 적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말 한마디가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위험군 편지를 분류한다. 온기 공간에는 날짜 기준으로 분류한 편지들을 두고, 온라인으로 답장을 작성하는 랜선 활동의 경우 반별로 비슷한 고민 내용이 몰리지 않게 신경 써서 배분한다. 햇살은 온기 직원으로서 “온기와 온기우체부의 따뜻한 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역할임을 염두에 두고 일한다”고 말했다. 온기와 온기우체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온기 공간의 내부 인테리어와 배경음악까지도 세심히 고민한다는 햇살은 “소소한 부분이지만 온기우편함이기에 사실 중요한 일들”이라고 말한다. 작은 것들이 모여서 공간을, 선행활동을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인 따스한 마음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회에서는 살아가며 지나치는 수많은 이들의 영향으로 비로소 한 사람이 만들어진다. 온기우체부들은 그 한 순간에 온기가 따스한 부분으로 자리할 수 있길 바란다. 답장을 받은 온기들 또한 온기를 전해 받음으로써 느끼는 따스한 마음들을 다시 표현해준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편지 작성 원칙을 돌아보거나 계속해서 다듬게 만들고, 더 많은 새로운 기획으로도 이어진다. 햇살은 “수많은 온기와 온기우체부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함께하는 마음들이 모여 온기우편함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며 감사를 표했다.

  온기우편함이 랜선 온기우체부를 운영하는 것은 더 많은 온기들에게 위로가 담긴 답장을 전하기 위함이다. 랜선 온기우체부의 탄생으로 이제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은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봉사를 할 수 있게 됐다. 랜선 온기우체부들은 수정에 수정을 거치며 온기 공간에 모여 편지를 쓰는 것보다 배의 시간을 쓰기도 한다. 답장을 쓸 때 시간뿐만 아니라 마음을 쓰는 것을 아는 햇살은 서로의 지지를 전하기 위해 랜선 온기우체부 기수별로 대면 모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2022년 여름부터 온기레터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온기레터는 온기우편함에 도착한 고민 편지 중 공개 동의를 받은 편지를 엮어 발행하는 뉴스레터다. 매주 목요일마다 익명의 고민과 손 편지 답장을 메일로 받아볼 수 있다. 햇살은 “고민을 직접 글로 쓰고 보낸다는 게 어려운 일임을 안다”며 “그 단계까지 가지 않아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뉴스레터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온기우체국 팝업 ⓒ온기우편함

  더불어 지난 해 7월 29일부터 8월 13일까지 여의도 CGV에서 ‘온기우체국’ 팝업스토어도 열렸다. 기획 단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왔고, 팝업스토어 한 켠에서 여러 고민 편지를 남기고 갔다. 팝업스토어 현장에서 온기우체부들은 고민 편지를 쓰는 순간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편지를 접수받으며 대화도 나눴다. 온기 공간과 같이 공간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내부 인테리어를 나무 소재로 맞추고 은은한 조명과 책상 배치를 통해 안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렇듯 공간감을 고려하며 세심하게 담은 따스한 마음을 사람들은 실제로 느끼고 있었고, 온기우체부들은 그에 대한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봉사의 가치를 다시금 느꼈다고 말한다. 구구는 “디지털화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만 주어진다면 아날로그 글쓰기 활동을 다들 즐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말 못할 고민이 있을 때 언제든지 편하게 다가가는 우편함으로 자리하고 싶다는 온기우편함. 겨울은 “살면서 힘들거나 지칠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온기우편함에 들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따스함은 또 다른 따스함을 불러온다. 지금 이런저런 고민들을 안고 있다면 한번 손으로 써내려가 보는 건 어떨까.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온기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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