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나. 목이 찢어질 듯한 비명,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공간을 감싸는 화기.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흐르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오늘이 되도록 잊지 못해 하루를 겨우 버티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자 어둠 속으로 길을 내는 이들이 있다.
다크 투어라는 이름으로
올해는 용산 참사 15주기다. 15년 전, 제대로 된 보상 대책 없는 재개발에 반대해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하던 철거민 5명과 그를 진압하던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7년 서울시가 발간한 용산참사백서 「용산참사, 기억과 성찰」에 따르면 남일당 건물이 속한 용산4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본격적인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입자에게 법적 기준 이상의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았고, 무상임대 또한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강제 퇴거로 생계 수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철거민들은 생존권 투쟁을 위해 2009년 1월 19일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설치했다. 19일 오후 협상이 결렬되자, 20일 새벽부터 경찰특공대의 진압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날, 철거민과 경찰의 대치 과정에서 망루에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법원은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을 화재의 원인으로 판단해 그들에게 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추후 발견된 수사 기록에는 화염병이 터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경찰의 진술이 실려 있었으며,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해 경찰 수사국의 댓글 공작과 청와대의 여론 조작 논란이 이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용산 다크 투어는 참사 13주기를 맞은 2022년부터 빈곤철폐를위한사회연대(빈곤사회연대)가 진행하고 있다. 해당 투어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쫓겨난 이들을 기억하고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다크 투어란 전쟁이나 테러, 인종 말살, 재난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방문해 과거를 되새김하고 기리는 여행을 뜻한다. 빈곤사회연대에서 진행하는 다크 투어는 참사 당일이던 올해 1월 20일 이미 진행됐기에 기자는 영상과 책을 통해 공부한 후 홀로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려 했으나 옆길로 새거나 길을 잃기도 했다. 가방에는 물 한 병과 책 한 권, 교통카드만 챙겼다. 하늘이 파랗고 볕이 따가운 날이었다. 학교 정문에서 501번이나 750번 버스를 타면 신용산역까지 한 번에 간다. 이 여정의 끝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여기, 아직 스러지지 않은 우리네 삶이 있다

신용산역에서 내리자 용산역과 이마트가 보였다. 용산역 광장에는 꽃과 풀이 가득한 공원이 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과 캐리어를 끌고 역으로 향하는 사람을 지나쳐 역 뒤편의 구름다리를 찾았다. 구름다리로 가는 길에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있는 한 남성을 봤다. ‘본 건물은 철거 후 재건축할 예정입니다’라는 거대한 현수막에는 ‘철거’와 ‘재건축’만이 빨간 글씨로 쓰여있었다. 구름다리로 향하는 길, 다리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전자 상가가, 오른쪽에는 서울드래곤시티 호텔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용산역이 보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상가와 반짝이는 호텔이 한눈에 담기는 게 신기했다.

구름다리 왼편을 내려다보자 홈리스 텐트촌이 보였다. 그곳은 무성한 나무들에 가려 밑에서는 볼 수 없지만 다리 위에서라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은박돗자리에 청 테이프를 둘러 지은 집, 집 앞의 나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집 밖에는 각종 물건이 쌓여 있었다. 한참을 서서 보는데 주황색 셔츠를 입은 한 남성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나무판자로 만든 의자 위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그의 뒤로 비닐과 천, 테이프와 끈으로 만들어진 집과 텐트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2000년대 중반 조성된 용산역 홈리스 텐트촌에는 현재까지 많은 홈리스가 거주 중이다. 이들은 근처에 새로운 건물이 생길 때마다 제대로 된 이주 대책 없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시공사는 공사가 임박했을 때에야 텐트를 비우길 요청했고, 텐트촌 주민들은 그때마다 저항했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텐트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의 주거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관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웠다.

서둘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운동장 몇십 개는 들어갈 듯한 거대한 땅덩어리가 보였다. 거대한 땅, 땅, 땅…. 옛 용산정비창 부지였다. 무려 5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공공토지인 용산정비창은 본래 철도차량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2006년 한국철도공사가 부채 해결을 위해 해당 지역을 개발하려 한 후로 다양한 계획이 수립되고 무산되길 반복했다. 2013년 사업 청산으로 개발이 완전히 좌초되는 듯했으나 올해 2월 서울시가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계획(안)’을 마련해 본격적인 사업 추진을 알렸고, 용산정비창을 둘러싼 개발 정쟁이 재개됐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 따윈 알지 못한다는 듯 거대한 침묵만이 그 땅 위에 자리했다. 오랫동안 공사를 멈춘 듯 나무와 풀들이 곳곳에 자랐고, 주황색 깃발과 공사를 알리는 노란 안내문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깔끔하게 구획된 땅도, 풀들이 어지러이 난 땅도 있었다.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그 땅에서 오직 나무들만이 바람에 휘어지기 바빴다. 흰색 펜스는 바깥과 그곳을 경계 짓는 수문장 같았고, 햇빛을 받아 연초록색을 가득 머금고 빛나는 나무들은 어떻게든 그 벽을 넘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땅에서 모두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다른 미래를 상상한다.

구름다리를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공영주차장 뒤에는 전자 상가가 모여있다. 개중 가장 앞에 있는 선인상가로 들어갔다. 선인 21동 상가는 1층부터 4층까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바깥보다 어두운 조명과 여기저기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천장까지 가득 채워진 상자들 사이로 파란색 명패들이 흔들렸다. 손님은 거의 없고 가게 사이를 오가는 직원들의 말소리만 두런두런 들렸다.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 사이로 간간이 작은 카페들이 보였고 전자제품이 전시된 진열장만이 환하게 빛났다. 용산역 전자 상가는 1987년 청계천 세운상가 상인들을 이주시키려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않은 이주 계획은 상가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충분히 담지 못했고, 용산역 전자 상가에 터를 잡은 상인들 역시 ‘용산은 끝난 것 같다’며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희망한다. 건물에 침투한 도둑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복도 사이를 살금살금 거닐었다. 내려진 셔터 사이에도 불을 밝힌 이들이 아직 있었다. 누군가의 일터이고 꿈이었을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이곳 역시 작년 6월 서울시가 발표한 ‘용산 메타밸리’ 계획에 따라 개발될 예정이기에 언제 어떻게 무엇이 변할지 확실치 않다.

그리고 용산역으로 다시 향하는데 길은커녕 주차장이 나왔다. 맞다. 이 여정의 최대 문제는 기자가 엄청난 길치라는 것이다. 분명 지도를 보고 갔는데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이 나온다. 전자 상가에서 용산역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아서 헤매다 겨우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를 찾았다. 그렇게 들어간 역 내부는 무척 시끄러웠다.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났고 활기찬 표정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역 밖으로 나와 드래곤힐스파 뒤쪽 길을 따라가니 또다시 아까 구름다리 위에서 느꼈던 정적이 흘렀다. 커다란 침묵과 활기찬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오래된 거리와 번쩍거리는 기차역을 오가며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제 그곳으로 간다. 크고 높은 벽을 넘어 드리운 길가의 나무들을 보며 여기가 아까 구름다리 위에서 본 용산정비창의 뒤편이라는 걸 알았다. 맞은편에 있는 흰 아파트에는 담쟁이덩굴이 가득했고 어디선가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는 벽 너머의 땅에서 넘어온 나무가 울창하게 드리웠다. 벽에는 청 테이프 자국이 가득했고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는 초록빛 풀이 났다. 기자가 걷는 길과 용산정비창 사이를 가르는 벽 밑에는 개미만 건널 수 있을 듯한 아주 작은 틈이 있었다. 인간이 넘지 못할 그 틈이 깊고 깊어서 쪼그리고 앉아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봤다. 도로 옆으로 나란히 주차된 차들과 오래된 집들을 차례로 지나다 보면 어느샌가 벽은 멀어져 보이지 않는다.
구옥을 개조해 만든 듯한 가게들 사이에도 군데군데 꽃이 피어있었다. 상자는 고이 접혀 건물 주위에 쌓여 있고 붉은빛 벽돌을 가진 집은 무너진 채 방치돼 있었다. 길 끝의 육교 위로 올라갔다. 대로변을 가로지르는 육교에 올라서니 높디높은 건물들 사이로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였다. 발아래로는 빨간 등을 켠 차들이 앞다투어 도로를 내달렸고, 회색빛 빌딩 사이로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듯한 낮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육교에서 내려와 직진하다보면 공사 현장이 보인다. 재개발사업을 위한 신축공사가 이뤄지는 곳이다. 공사를 위해 따로 마련해둔 보행로를 따라가면 커다란 공터가 나온다. 용산철도고등학교 건너편에는, 신용산교회 앞에는, 잔디로 뒤덮인 널찍한 공터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는 공사 자재를 뒤덮은 파란 천이 나풀거린다. 신호에 걸린 차들이 침묵할 동안 대충 근처에 보이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철거민들이 올라간 망루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용산 센트럴파크가 있다.

15년 전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2008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한 서울시 재개발 사업의 선두에 있던 용산4구역 사람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쫓겼다. 세입자들을 내보내려는 용역의 폭력에 경찰과 관공서는 눈을 감았고, 철거민들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그들이 망루에 오른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고 강제진압 과정에서 불이 나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철거민들의 폭력 시위가 용산 참사의 본질’이라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국가는 이 모든 걸 철거민의 탓으로 돌렸다. 참사 후 농성에 참여했던 철거민 25명은 전과자가 됐지만, 진압을 지시한 경찰 지휘부는 아무런 죗값도 물지 않고 승진했다. 철거민들이 감옥에 가고 쫓겨난 공터에서 호떡 장사를 할 동안 남일당 터에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은 『내가 살던 용산』(2010)에서 지금의 개발이 ‘가난한 사람 몰아내고 돈 많은 부자들을 들어앉히는 개발’이라며, ‘국가가 추진하는 개발이란 사회의 가장 약자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용산 참사 희생자 故 이상림 씨의 유가족은 철거 기간 동안 임시 상가를 내달라는 기본적인 요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당시 그들은 언제 다칠지 모르는 매일을 살아간다며 ‘우리 삶을 재개발이 다 바꿨다’고 말했다.
높다란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화염에 휩싸인 망루를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다. 두려움도, 분노도, 슬픔도 아닌 이 마음은 허무함이다. 이렇게나 쉽게 건물을 올리고 부수고 새로 짓고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함. 몇십 층짜리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의 흐름이었다는 게 피부에 와닿았을 때 느껴진 모종의 억울함. 개발 이전에 이곳에 살던 이들이 평생 번 돈을 다 모아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곳은 단지 땅이 아니다. 주민들의 오랜 삶의 터전이자 누군가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수많은 기억의 집합소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키고 이어나갈 것이 무엇인지 그 황량한 땅을 바라보며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곳에 서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상을 그렸다. 헌법 제35조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모든 국민은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지며 국가는 개발을 이유로 누군가를 쫓아낼 권리가 없다.

다시 용산역으로 돌아가는 길, 건물 틈 사이로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이 보였다. 원래 경로에는 포함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2020년 4월 용산의 도시변천사를 기록하고자 개관한 곳이라고 한다. 1층 기억방에는 용산 참사 기억관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글씨로 2016년 발표된 ‘도시환경정비사업에 관한 서울선언’이 적혀있었다. ‘서울시는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사람과 인권을 최우선으로 하여 시민이 삶터와 일터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서울시의 다짐 옆에는 참사를 표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행복한 동네를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을 그린 이상권의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여야 했다」나 진눈깨비 내리는 날 잎이 다 떨어진 나무 밑 벤치에 앉아 고개 숙인 이들을 그린 서수경의 「2010년 1월 9일 저녁」을 보며 끝내 이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동료 시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흐린 겨울 하늘 아래 구부정한 나무에 새잎이 돋아나 조금 덜 추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시관에서 나와 용산역으로 되돌아오는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났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나 보다. 여전히 울려 퍼지는 굴착기 굉음과 흙을 퍼내고 돌을 깨뜨리는 소리에 잠시 멈춰 섰다. 굴착기 뒤의 하얀 벽에는 검은 글씨로 ‘미래도시 용산’이라고 쓰여있었다. 그 미래에는 과연 누가 있는가. 존재를 지우고 선 미래는 도래할 수 있는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발목을 잡고 길게 늘어졌다.
참사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시간을 건너 참사를 기억하고자
참사가 발생한 2009년에 기자는 다섯 살이었다. 네 살 터울인 동생이 막 걸음마를 뗐을 때였고, 그때의 기억은 없다. 용산 참사를 알게 된 건 좀 더 크고 『내가 살던 용산』(2010)이나 『떠날 수 없는 사람들』(2012)과 같은 책을 접하면서였다. 생존자들의 구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그 책들이 용산 참사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재개발, 철거민, 용역, 망루 따위의 단어를 그때 배웠다.
참사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여정은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현재를 덧대어 그들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오늘의 것으로 잇고자 한 하나의 시도였다. 옛 남일당 터에는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15년 전 불에 탄 망루의 흔적도, 그곳에서 싸우던 이들도,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들도.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의해 누군가의 삶이 스러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나 아직 용산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이원호 사무국장은 망루 위에서의 진실과 아래에서의 진실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날 왜 그렇게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 작전을 펼쳤는가? 그 명령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어째서 철거민들은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나? 한국의 도시개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유가족들은 외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비롯해 용산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옛 용산정비창 부지에 공공성을 강화한 공공임대주택과 공공임대상가를 만들어 달라고. 개발을 둘러싼 정쟁의 중심에 있는 저 땅에 이익과 투기에 대한 욕망이 아닌 서민들의 삶터가 자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끝나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故 서경식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서 작가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에 대해 말했다. 강연이 끝나자 누군가 손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 저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 아무리 책을 읽고 영화를 봐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 온전히 알 수 없어요. 이런 제가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서 작가는 그저 “계속 상상해달라”고 했다. 그게 만약 나의 일이었다면, 나의 소중한 사람이 경험한 일이었다면, 얼마나 아프고 또 아파야 할지 떠올리라고 당부했다. 우리가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여 기억을 전승한다면,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조금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오늘 마음에 파란 망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