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영원한 기억이 되고

연극 「나는 광주에 없었다」, 2024.05.15.-2024.05.1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연극은 하나의 약속이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무대의 우리는 누구인지, 이 소품은 무엇인지는 실제라기보단 가상을 위한 합의이고 약속이다. 올해 5월, ‘지금부터 이곳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이며 관객 여러분은 그때의 광주 시민들입니다’하며 새끼손가락을 건넨 연극이 있었다. 5월의 광주에서 ‘이머시브 시어터’라 불리는 관객 참여형 연극 「나는 광주에 없었다」를 보고 왔다. 

옛 전남도청 옆, 높고 커다랗고 네모난 극장

  광주에 간 것은 일 년 만이었다. 매해 5월에 광주에 갔으니 꼬박 일 년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자취들을 따라가는 빽빽한 기행 일정표를 들고 길을 나섰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연극 표 한 장만을 든 채였다. 연극 「나는 광주에 없었다」. 이 연극이 올라오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 앞에 있다. 광주에 오면 늘 전일빌딩의 가장 높은 층 테라스에 올라가 구 도청 건물과 그 앞 민주광장을 오래 구경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도청이 복원 공사에 한창이었고 또 비바람이 거셌던 탓에 서둘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들어갔다. ‘극의 중간 자주 몸을 움직여야 하니 들고 온 짐은 물품보관소에 맡기라’는 안내를 들으며, 좌석이랄 게 없는 넓은 네모 모양의 극장 배치도를 보며,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이 연극을 기다렸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확하게 재현해 나가는 드라마인 이 극은 1980년 5월 광주 산수동 주택가의 어느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이내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한 전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 현장으로 이동한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잔혹하게 무기를 휘두르고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관객이 앉아있는 곳은 그저 무대의 가장자리 어딘가일 뿐 객석이 아니어서, 몽둥이에 맞은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은 곧바로 눈앞이었다. 

▲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놀랄 새 없이 이야기는 진행되고 관객들은 서서히 무대의 안쪽으로 가야한다. 시위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함께 불러야 하고 구호를 같이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들과 관객들은 금방 섞여든다. 교련복을 입고 시위에 온 고등학생 남자애들과 어깨동무한 채 금남로를 걷기도 하고, 주먹밥을 한 소쿠리 담아온 아주머니 한 명과 손을 붙잡고 도청으로 뛰기도 했다. 무대 가장자리, 나름 객석을 대체해 관객이 앉으라고 놓인 줄 알았던 우유 박스들은 시위가 한창일 때 관객들이 얼른 들고 뛰어가 계엄군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로 죄 쌓아버렸다.  

  새삼 극장이 매우 높은 층고의 공간임을 깨달은 것은 헬기의 조준사격이 시작됐을 때였다. 귓가를 매섭게 때리는 헬기 소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지자 높은 천장 끝에서부터 쏴지던 사나운 조명들이 산란했고 큰 긴장과 공포만이 느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무기들로 쏴댔을까? 이곳은 위험하니 피하라며 배우들이 무대의 가장자리로 다시 관객들을 밀 때, 뒤돌아본 자리엔 넘어진 배우의 아파하는 얼굴이 있었을 때, 모든 게 너무 가깝고 선명해서 아득하기만 했을 때, 어떤 기억은 언어를 잃은 채 몸에서 몸으로 전달해야만 했겠구나 싶었을 때. 이 높고 어두운 극장은 슬픔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머시브 시어터, 단 한 번의 필연적인 우연을 초대하는 일

  관객이 그저 무대 위 펼쳐지는 장면들을 감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공연 형식인 이머시브 시어터는 극을 정교하게 통제하고 기획하는 것보다도 관객이라는 주체가 가져오는 우연함에서 극의 성취를 기대해야 하므로, 항상 성공적인 관극 경험을 제공하긴 어렵다. 극의 흐름 상 필요한 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생각보다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연극 역시 대규모의 관객을 이동하게 하거나 소리 내 행동하게 하는 과정들이 조금 덜컹거리기는 했고, 그저 시위 구호를 외치고,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게 하는 것을 넘어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장면이 시작됐을 땐 우려부터 앞섰다. 잠시 소강에 접어든 시위 현장을 갈무리하며 무대 한가운데까지 자리를 펴고 관객과 배우가 소탈하게 둘러앉았을 때, ‘목포댁’ 역할을 맡은 황영희 배우가 분주히 걸음을 옮기며 전하고 싶은 사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대뜸 팬이라고 말하거나 상황에 몰입해 어색한 연기를 시도한 관객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에 이야기로부터 쫓겨난 느낌도 들었다. 

▲ 관객을 포함해 극장의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그러다 한 관객이 손을 들어 자신은 1980년 5월, 광주에 실제로 있었다는 말로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딸이 몰래 이 극을 예매했다면서, 트라우마 때문에 당시의 광주를 재현한 상황을 다시 보는 것을 주저하며 극장에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대해, 자신이 보고 겪은 선명한 죽음들에 대해, 그때의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에 대해 오래 얘기했다. 연극은 바로 이런 순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겪어보지 않은 것을 함께 겪어내기 위한 연극에, 역사와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는 제각기의 삶들이 걸어들어오기를. 관객은 각자의 삶을 데리고 극장 안에 들어오니까. 객석 같은 건 없애고 모두가 무대에 한가운데 앉아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관객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몇몇 배우들은 관객과 함께 울었다. 황영희 배우는 연기를 거두고 아주 정중한 말씨로 귀한 증언을 들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 극장 안 사람들의 우연한 조우가 비로소 이야기를 완성해갔다.

▲ 관객과 배우 할 것 없이 무대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야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실재했던 비극과 고통을 예술이 전하고자 할 땐 매우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고려가 요구된다. 어떠한 미적 형식으로도 재현될 수 없는 상실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광주를 재현하는 이야기를 꾸미고, 극장이 광장인 것처럼 관객까지도 연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만일지도 몰랐다. 최루탄을 피해 계엄군을 피해 무대의 모서리로 숨다가도 최루탄에선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고 계엄군을 맡은 배우가 관객에게 무기를 휘두르지는 않았으므로, 통증 한 번 겪지 않은 나의 몸이 만져질 때마다 그날을 함께 겪어보자는 의도는 어떤 순간에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허구의 이야기는 언제 재현의 불가능성과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때 그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밝힌 한 관객이 이 극으로 촉발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이 극이 얼마나 실제와 가깝고 사실을 추구하는지는 조금 덜 중요해졌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현실이 있다.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실감이 있고, 그 모양새는 다양할 것이다. 아무리 허구라고 할지라도 그로부터 발견되고 상기되는 것들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잘 가꿔진 가상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진실을, 진심을 향해갈 수 있다. 

  한정현의 소설 「과학 하는 마음 -관광하는 모던 걸에 대하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오직 리얼의 문제만을 생각하면 나아감이란 없습니다.’ 이머시브 시어터를 통해 「나는 광주에 없었다」가 달성하고자 한 바는 당시 광주에 대한 정교하게 진짜 같은 체험보다는, 함께 기억하고 애도할 이들을 간절히 호출하는 데에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 극은 그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도 오래 감춰지고 왜곡됐던 진실을 길어내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고, 평화적인 시위대를 학살했던 주체가 국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국가폭력의 역사를 환기하기도 한다. 기억과 연대의 의미,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가치, 높은 수준의 공동체 의식을 전달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모두 5·18민주화운동이 남긴 유산이다. 

▲ 무고한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극의 막바지는 그때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어떤 한 개인의 역사로 다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 가장 마지막의 작업은 위무이고 애도다. 극의 가장 처음 광장에 나간 오빠를 기다리던 어린아이가 무대에 다시 등장하고, 시간은 흐른다. 한 번이라도 꿈에 나타나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던 소녀의 삶은 오빠의 얼굴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며 담담히 슬퍼하는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흐른다. 그동안 무대에는 당시 시신을 안치했던 상무관의 풍경을 그리는 듯 관들이 놓여있다가, 높은 천장을 향해 고요히 올라간다. 한참을 올라간다. 남겨진 사람의 인생이 지나가는 동안 그저 고요히. 

▲ 시신을 수습한 관이 무대 위로 떠오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을 본 5월 15일은 늦은 밤까지 비바람이 거세 커튼콜은 극장 건물 실내에서 간단히 진행됐지만, 원래의 커튼콜은 극장 앞 너른 뜰에서 풍물패가 풍물을 치고 관객과 배우 너나 할 것 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랬다. 18일의 맑은 낮에 공연을 본 한 친구는 그게 꼭 살풀이 같았다 전해줬다. 마지막 항쟁지였던 도청 앞 광장을 바로 옆에 둔 이 극장 앞뜰에는, 그렇게 지나간 세월을 세며 앞으로의 세월을 가늠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의지가 남겨졌다.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희곡은 이렇게 끝난다. ‘영과 혼이 함께 논다. 달빛. 막.’ 이정연 열사의 일기처럼 ‘우리가 사랑했던 것, 외로움 당했던 것, 헛됨은 없다.’ 한없고 서글픈 그날 광주, 그곳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서 보고 싶었던 간절함으로 빚은 이 연극에도 한 치의 헛됨은 없었다. 사랑했던 것, 외로웠던 것, 사무치고 애달팠던 것, 선연히 분노했던 것, 정의로 타올랐던 것, 무엇 하나 헛됨 없이 기억하기 위해 모두가 연극을 했다. 

  삶으로 돌아간 관객들은 미래를 관객으로 두고 연극을 하자. 연극은 하나의 약속이니까. 깨지지 않는 약속을 했으니까. 우리가 민주 시민이라는 약속. 옳은 것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던 이들이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고 친구였다는 약속. 그러니 각자의 삶에서 약속을 지키는 연극을 이어가자. 애도를 잇고 기억을 지키기 위한 모든 의지들로 이뤄진 연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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