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 위에 세월을 기록하기까지

  흰 종이, 깜빡이는 커서.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데, 한 세월이 지나가 버립니다. 기사는 첫 줄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하죠. 그 첫 줄을 시작하는 게 참 어렵기만 합니다. 한 자, 한 단어, 한 문장에서 시작해 비로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풀어내기까지 시리도록 하얀 빈칸, 빈칸, 또 빈칸을 견뎌야만 합니다. 글을 쓰며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뭐라도 써보라며 형형히 눈을 빛내는 흰 종이 앞에서 언제나, 가장 오래도록 좌절하게 되나 봅니다.

  185호를 만들면서는 의미 있는 말들이 적히기만을 기다리는 그 종이들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세월호 10주기 특집호를 마땅히 발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1년 전의 패기는 제 경솔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금세 막막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리도 어려운 작업을, 부끄럽게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긴 꼴이 됐습니다. 흰 종이를 앞에 놓고 고민하는, 때론 아파하는 기자들에게 좋다, 잘한다, 할 수 있다 따위의 무책임한 말만 늘어놨습니다. 이 와중에도 185호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들은 턱 턱 채워져 갔습니다. 각자가 기록하고 싶었던 날들을 오늘 이 자리에 데려오면서, 앞서 기록한 이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자꾸만 쌓여가는 말들이 저는 못내 애틋했습니다.

  우리가 185호에 불러낸 날들은 오래도록 빈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재현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에, 세월이 기록되지 않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지우개질에 어떤 기억은 기억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억돼야만 한다는 이들의 투쟁에 빚을 졌다는 마음으로, 다가올 10년에는 더 이상 애써 적은 기록이 삭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는 빈칸으로 남는 사건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했습니다.

  10년의 세월을 기록한다는 건 그런 작업이었습니다. 뭉텅이 져 버려진, 이리저리 뒤섞인, 누군가가 훼손한 기억을 다시 헤집는 일. 제대로 봐 달라고 목이 쉬게 외치는 일. 1980년의 광주를, 2009년 용산의 파란 망루를, 2022년의 이태원을, 자꾸만 내몰리는 소수자들을, 스러진 수천의 목숨을 기록한다는 것 또한 그러했습니다. 흰 종이 위에 세월을 기록하기까지, 무지를 반성하고 고통을 마주하며 부족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185호를 마치며 다시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듭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역시나 희고도 흰 종이입니다. 이번에도 수많은 부끄러움과 고통이 첫 줄을 적어내려는 손길을 막아설 게 분명합니다. 또 누군가는 온몸으로 그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오늘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그 기록을 다시는 허무하게 빼앗기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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