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 10년간의 기억의 여정,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잊지 못할 가시밭길이었다. 그날 우리는 왜 그렇게 아파야 했는가, 그날을 기억하는 행위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종합보고서를 토대로 긴 세월 간 풀리지 않고 쌓여버린 의문들을 따라가 봤다.
왜 우리는 그날 더 아파야 했는가

2014년 4월 16일 8시 49분 18초, 진도 인근 해상을 지나던 여객선 세월호의 선체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며 세월호 참사의 비극은 시작됐다. 비극의 불씨가 대규모 참극으로 커지기까지 현장엔 수많은 책임자가 존재했다. 이준석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선내에 대기하라는 지시 방송으로 침몰하는 선내에 승객들을 고립시킨 채 가장 먼저 탈출했고, 해경 123정은 현장 상황을 파악한 후에도 추가 구조 세력을 지원하지 않고 탈출 승객만을 구조하면서 선내 승객들이 수장되는 걸 방관했다.
현장 바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상자 현황 파악과 후속 조치 지시 등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와 17시 40분에야 본부장이 복귀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은 구조 활동에 미력도 보태지 못했다. 즉각적인 구조 명령 없이 정부 보고만을 외쳤던 해양안전부와 상황 확인 이후에도 침묵했던 정부 각처, 상황을 파악하고도 중대본에 도착하기까지 7시간을 낭비한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되기는커녕 참사의 중대한 패착이 됐다.
그보다 근본적인 책임들은 참사 시작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에서 들여온 나미노우에호가 여객선 세월호로 증개축되는 과정에서 무게 중심이 높아지고, 배가 기울어졌을 때 다시 원래대로 일어서는 성질인 선박 복원성이 감소한 데에는 청해진해운의 책임이 명백하다. 참사 당일 적정 화물량을 초과한 2,214톤의 화물이 고박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세월호에 실린 것도, 배의 침수를 막기 위해 닫아둠으로써 실내 공간을 격리하는 것이 원칙인 수밀문과 맨홀이 열린 상태로 운행된 것도 참사를 발생시킨 분명한 원인이 됐다. 세월호가 사람을 싣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로 운영되는 것을 방기한 수많은 책임자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하나라도 더 살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책임자들이 범했던 실책과 잘못들이 모여 30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해당 참사는 개인의 잘못이나 재해로만 치부할 수 없고, 오랜 시간 누적돼 온 국가의 부실한 시스템들이 중첩돼 비롯된 것이었다. 때문에, 국가가 국민을 무참한 죽음으로 내모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던 사람들은 국가를 향해 난잡하게 쌓인 의문과 충격에 대한 마땅한 해명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가는 왜 우리가 그날 그토록 아파야 했는지 묻는 국민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았다.
정부는 참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대신 책임 회피를 택했다. 대통령령으로 정한 위기관리지침을 ‘재난 대응은 안전행정부(현 행정안전부)가 총괄하며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수정하면서 책임에서 도망쳤고, 그 빈자리를 선장과 선원, 그리고 해운회사에 대한 비난으로 채웠다.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해진해운 실소유자인 유병언 수사와 관련된 지시를 네 번이나 내렸고, 선장과 선원, 청해진해운 등 민간 책임자들의 행위를 ‘살인 행위’라고 집중적으로 질타했다. 이로 인해 검찰과 언론도 선장과 선원의 비상식적 행동, 유언의 행적 등에 집중했다. 근본적인 사고 원인이나 대처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은 뒷전으로 밀렸다.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는 형사처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 많은 실책을 범한 정부 책임자 중 형사처벌이 이뤄진 건 징역 3년을 받은 김경일 전 해경 123정장이 유일했다. 작년 11월에는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과 최상환 전 해경 차장, 김수현 전 서해해경청장, 이춘재 전 해경 경비안전국장 등 9명의 해경 지휘부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에두른 책임 회피를 넘어 자생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도 발견됐다. 참사 직후 정부 측에서 실시한 5번의 조사가 청와대의 자료 제출 거부 등으로 신뢰를 얻지 못하자, 2015년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구성되며 진실 찾기 시도가 이뤄졌다. 그러나 특조위는 정부와 여당의 반대에 부딪혀 수사권이나 기소권도 없는 상태에서 조사를 이어가야 했고, 결국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한 채 다음 해 9월 강제 종료됐다. 2020년 5월에 이르러선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에 의해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부 고위인사들이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던 혐의로 기소됐다. 특조위에서 대통령의 7시간 공백을 조사하는 안건을 의결하려 하자 특조위 국장 임용 절차 중단, 공무원 17명 파견 중단, 부위원장 교체 방안 검토 등의 훼방을 놓았다는 것이다. 검찰의 일관된 주장에도 해당 건은 현재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상태다.
특조위를 뒤이어 출범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의 1년 4개월과 사참위의 3년 6개월 역시 침몰의 직접적 원인을 충분히 규명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그 배경에는 어김없이 비협조적인 정부가 존재했다. 사참위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은 68만 건에 달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 중 겨우 2천여 건만을 제공했고, 해군은 한 건의 자료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처럼 진실을 다지는 밑작업이 부재한 상태에서 국가의 재난 안전 관리 체계는 얼마나 보완됐을까. 표면적으로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해경 현장 구조 능력 개선, 컨트롤타워 시스템 도입, 안전 교육 강화, 중대본부장의 국무총리로의 격상 등 굵직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정서가 광장의 촛불로 모여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면서 참사의 책임은 국가에 있음을 다 함께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뀐 시스템과 새로이 수립된 정부에도 모두가 바라는 안전한 사회는 요원했다.
〈CBS 노컷뉴스〉와 시민단체 4.16연대가 사참위 권고 이행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22년 9월 사참위가 공식 활동을 종료하며 내놨던 세월호 관련 권고사항 54건 중 현재까지 이행된 항목은 8.3%에 불과했다. 사참위의 권고사항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이행돼야 하고, 매년 국회에 이행 내역이 보고돼야 하나, 전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 권고사항이었던 대통령 사과의 경우, 2017년 8월 16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부를 대표해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간접적·포괄적 사과가 전부였고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 이마저도 행하지 않았다. 지금껏 정부의 구체적인 반성조차 획득하지 못한 실정이다.
진실과 반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보완은 미래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는 반쪽짜리 변화였고, 이는 세월이 흐르며 몇 번이고 분명하게 드러났다. 2022년 10월에 발생했던 이태원 참사에선 컨트롤타워 역할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의 뒤늦은 대처가 목격됐고, 1조 5천억 원을 들여 구축해 둔 재난안전통신망은 재난 상황에서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이날의 실책들은 159명의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었다. 2023년 7월 오송 참사에서도 정부는 안일한 대응을 보였다. 이날의 실책들은 14명의 희생자를 기어코 다시 만들었다.

올해 4월, 여론조사 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3.6%가 세월호의 진상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어떤 부분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문항에는 응답자의 39.8%가 ‘세월호의 직접적인 침몰 원인 규명’을, 32.3%가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 행적 및 보고 과정 의혹 규명’을 언급했다. 10년의 공방과 기다림의 끝에 국민들이 얻은 것은 여전한 물음표였다. 10년 전보다 세상이 안전해진 것 같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76.7%를 차지했고,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지 묻는 질문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응답 비율이 77.4%를 차지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흘러온 세월이 무색하게, 국민들의 경각심과 불신에 발맞추지 않은 국가는 참사를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었다.
왜 우리는 그날 더 아파야 했는가. 오랜 세월 완결되지 못하고 부유하던 물음표는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 여기저기에 붙어 우리를 할퀴는 갈고리가 됐다.
왜 우리는 그날의 슬픔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는가
예고 없이 닥쳐온 거대한 상실은 전 국민에게 슬픔을 넘어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고, 애도하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참사가 참사로 읽히는 대신 정치로 읽히던 시간이었다. 해명 요구와 질책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정부가 벌인 여론전이 문제였다.
세월호 구조 작업이 한참 이뤄지던 시기, 정부는 실종자 가족들을 참사 피해자로서 지켜주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는 책임자가 없어 허위 정보의 늪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 했던 실종자 가족들이 극도의 불안과 분노를 느끼자, 사복 차림의 정보관들이 실종자 가족인 척 숨어들어 대화를 엿듣고 상부에 보고하기 시작했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정말 실종자 가족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로 현장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국가에 대한 불신은 높아졌다.
결국 몇 번의 항의에도 현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4월 20일 실종자 가족들은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대통령비서실과 정보기관은 이들을 보호 대상이 아닌 반정부 세력과 연계할 수 있는 정치적 위험 대상으로 바라봤다. 당시 경찰청 지휘부는 청와대 방문 시도를 불법 집회로 간주했고, 경찰청장은 “국론 분열을 노린 좌파 단체의 반정부 행위”를 엄하게 다루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참사 피해자를 대면하는 첫 단추에서부터, 정부의 시선은 한참 어긋나 있었다.
어긋난 시선으로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는 정부에 책임을 묻는 여론이 거세졌을 때 더 심각해졌다. 청와대는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보도에 외압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친정부 성향의 보수단체를 통해 여론 개입을 시도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2014년 2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현 한국경제인협회)를 압박해 33개 친정부 성향 단체에 69억 원을 지원하게 했고, 해당 단체들은 세월호 유가족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공격했다. 사참위 조사 자료에 따르면,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을 시작했을 때 보수단체에서는 유가족의 행위를 ‘무리한 요구’ 혹은 ‘선동세력’이란 표현으로 폄하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월호 참사 구조 작업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다이빙벨》(2014)이 상영됐을 때는 악성 댓글 공세와 상영 금지 시위를 벌였다.

정치인들도 세월호 혐오표현을 발화하며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에 대한 인식 왜곡에 적극 가세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많은 세월호 혐오표현이 생산되고 소비됐지만, 사참위의 「재난 피해자 명예훼손 등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 최종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해당 발언의 발화 주체에 따라 그 영향력과 확산력은 달라졌다.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강하고 발화에 자신감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권, 즉 정부의 발화에서 등장한 혐오표현들은 혐오의 사회적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들의 발화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참사의 경중보다 정치적 득실과 연결되는 양상을 보였다. 박근혜 전 정부 책임론이 거세게 불거진 참사 일주일 뒤의 시점에는 참사를 정치 수단에 비유하는 표현이나 ‘종북 빨갱이’ 등의 표현이 다수 등장했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 갈등이 심화되던 2014년 7~8월과 박 전 정부의 특조위 방해 관련 수사가 진행된 2018년 1월에도 정치권에서 비슷한 언행이 반복됐다. 이들 발언은 주로 미래통합당 계열의 보수 정당에서 등장했다. 그때마다 참사는 얼룩졌고, 국민들은 점차로 지쳐갔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남발된 혐오의 목소리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잔인한 방식으로 훼손했다. 하지만 더욱 잔인하게 훼손된 건 보호받아 마땅했던 희생자와 유가족들이었다. 국민대 홍주현 교수(미디어광고학과)와 나은경 교수(미디어광고학과)의 「세월호 사건 보도의 피해자 비난 경향 연구」(2015)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는 크게 ‘행동하는 피해자’와 ‘지각하는 피해자’란 두 위계로 나뉘어 논의됐다. 그리고 이 양분된 양상의 논의는 피해자에 대한 가치 판단을 조장했다. ‘행동하는 피해자’들은 진보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집합적 행동을 이어갔고, 단식과 무력시위 등 합법성이 낮은 행위들을 병행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선 상황을 인지할 뿐 행동하지 않는 ‘지각하는 피해자’들의 반대편에 ‘행동하는 피해자’를 위치시키며 그들이 선량하고 무결한 피해자와 대비되는, 일명 ‘피해자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임을 강조했다. 홍 교수는 이 과정에서 ‘행동하는 피해자’들이 “사건 사고의 피해자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됐다고 설명했다. ‘행동하는 피해자’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참사의 슬픔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혐오의 굴레 속에서 계속 새로운 고통을 받아야 했다. 참사 8주기 기준, 〈JTBC〉에서 세월호 유가족 73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81%는 아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다름이 아닌 유가족을 향한 비난, 2차 가해로 밝혀졌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SBS〉 데이터 저널리즘팀이 지난 10년간 13개 주요 매체에 달린 세월호 관련 댓글 330만 건을 분석한 결과 약 31%가 악성 댓글에 해당했다. 게다가 참사 5주기를 전후로 점점 더 격하고, 진한 정치색을 드러내는 댓글들이 늘어나면서 피해자 혐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혐오와 비난으로 인한 이들의 아픔이 선례로 남아 다시는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는 과정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참사가 발생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전략으로서 자리 잡아버렸다는 점이다. 홍주현 교수는 이태원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이 “정부에 사건 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사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왜 우리는 그날의 슬픔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는가. 정치적 계산이 이리저리 덧대진 10년 속에서 우리는 태초의 슬픔을 고이 간직하고자 하는 시간마저 하나의 거대한 슬픔으로 간직하게 됐다.
왜 우리는 상흔 위에 자꾸만 상처를 내야 하는가
언론은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부터 10주기를 맞이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기억을 건축하는 일을 도맡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국민들은 건축 자재부터 설계까지 모든 단계를 의심하고 재확인해야 했고, 급기야 언론으로부터의 기억 형성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어째서 언론은 참사란 깊은 상처를 감싸주지 못하고 상처를 덧입히는 칼날이 됐는가.
2014년 11월 ‘방송기자연합회 저널리즘 특별위원회’에서 펴낸 보고서 「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에선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의 문제점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사실 확인이 부족한 받아쓰기식 보도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선정적인 보도 ▲권력 편향적 보도 ▲본질 희석식 보도 ▲기사화하지 않은 누락된 보도 혹은 의미가 축소된 보도가 그것이다.

해당 자료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최악의 오보로 지목한 부분은 사실관계 확인 없이 보도된 전원구조 속보였다. 전원구조 속보는 참사 당일 오전 11시 1분에 처음 전달됐다. 〈MBN〉이 11시 1분 7초에 뉴스 속보로 “단원고 측 ‘학생 모두 구조’”라는 자막을 내보냈고, 뒤이어 〈MBC〉가 11시 1분 26초에 뉴스 속보로 “안산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내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MBN〉은 “일단은 증언과 각 곳에서 나온 말이 다른데 이 보도가 정확한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언급한 것과 달리 〈MBC〉는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 338명 전원이 구조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는 거 다시 한번 전해드립니다”라며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다른 방송사와 신문사들도 줄줄이 전원구조 속보를 내보내며 모두에게 충격을 줬고, 구조 혼선을 야기했다.
그러나 전원구조 속보가 최초의 오보였던 것은 아니다. 2016년 9월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입수해 최초로 공개했던 특조위 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연합뉴스〉 측에서 오전 9시 55분 승객 120명이 구조됐다고 내보낸 오보와 10시 17분 승객 190명이 구조됐다고 내보낸 오보가 앞서 존재했다. 선내에서 승객들에게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는 보도 역시 〈연합뉴스〉 측에서 10시 8분에 내보냈으나 명백한 오보였다. 해당 내용들은 타 방송국들이 차례로 받아 써 보도했고, 그날에 대한 모두의 기억을 혼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보도 책임자 8명은 이후 유가족들로부터 고소당했으나 검찰 수사에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취재 대상이었던 피해자들과 보도 대상이었던 국민 양측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긴, 참사 현장에서의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이었던 보도도 있었다. 충남대 임연희 연구자(언론정보학과)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텔레비전 뉴스의 보도행태」(2014)에 따르면, 2014년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지상파 3사의 저녁 메인뉴스를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이 구조와 현장 피해 상황에 대한 보도였다. 그러나 인원수 파악과 같이 현장 중심의 사실 전달은 소홀히 한 채로, 단편적이고 흥미 위주의 선정적 보도가 주를 이뤘다. 이 과정에서 부모와 오빠를 잃은 6살 어린이의 얼굴을 그대로 노출한다거나 구조된 여학생에게 함께 간 친구가 죽었는지 물어보는 등 잔인하고 집요한 취재가 강행됐고, 재난 보도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홍주현 교수는 이런 선정적 보도가 시청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홍 교수는 “언론이 재난 상황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면 시청자·독자들은 사건을 상상하면서 더 몰입하게 되고, 사건을 실제보다 더 과장해서 인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2001년 미국 〈CNN〉에서 송출한 비행기 두 대가 연이어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는 장면이나 챌린지 호가 발사 후 몇 초 만에 폭파한 장면 등에 빈번히 노출된 시청자들은 그렇지 않은 시청자보다 사건에 대한 더 큰 트라우마가 형성된 것이 확인됐다”며, 세월호의 침몰 과정과 적나라한 피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시청한 국민들이 참사 트라우마로 힘들어한 데에 언론의 책임이 있음을 밝혔다.
참사 현장에서 멀어지고 나서도 언론의 실책은 반복됐다. 홍주현 교수는 “사건에 대한 판단은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몫”이므로 언론은 “사건에 대한 충분하고 정확한 재료를 전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 언론은 세월호 참사 이후 참사 현장에서와 비슷한 보도 양상을 보였다. 정부의 외압으로 반정부적인 보도는 많은 부분 축소되거나 누락됐고, 정부에서 책임을 면피하고 참사를 왜곡하는 발언을 했을 때 이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대로 퍼 나르는 행태를 보였다. 청해진해운의 소유주가 구원파라는 종교 집단과 관련이 있다는 등 참사를 둘러싼 현상 중 자극적이지만 부차적인 요소들에 유독 집중했고, 음모론 전달 역시 만연했다. 이로 인해 대중들의 피로감은 쌓여만 갔고, 진상규명이 얼마간 이뤄진 후에도 음모론과 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2014년 9월, 한국기자협회 등 5개 단체는 ‘재난보도준칙’을 마련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지켜지지 않았던 정확한 보도, 윤리적 취재, 무리한 보도 경쟁 자제, 피해자 보호 등이 준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변상욱 전 〈CBS〉 기자는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된 오늘날에도 기자들의 뼈아픈 반성에 비해, 데스크나 경영진을 비롯한 한국 언론의 구조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반성의 내용을 내면화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강령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나오지 않았고, 참사 현장에 갈 때 여전히 기자들은 재난 보도 준칙 준수보다 속보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홍주현 교수 역시 “사건 현장을 어디까지 얼마나 자세하게 전달하고 묘사해야 하는지 평소 고민하고,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재난이 발생하면 언론은 시청자의 알 권리와 피해자의 인권 보호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는데, 보도 윤리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태원 참사 보도에서처럼 다시금 과오가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오늘날의 언론은 세월호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뉴스빅데이터 분석 서비스 빅카인즈에서 세월호 관련 보도를 추출 및 분석한 결과, 지난 10년간 보도량이 꾸준히, 그리고 급격히 줄어들어 올해 4월 1일부터 4월 29일 사이의 보도량은 총 2,193건에 불과했다. 그중 ‘10주기’를 동시 언급한 보도량은 1,648건에 그쳤다. 이들 보도가 가장 주목한 대상은 유가족으로, 총 652건의 보도에서 ‘유가족’을 동시에 언급했다. 그러나 세월호 관련 공식 행사에 대한 주목도는 높지 않았고, 정부의 태도와 자취에 대한 주목도도 부족했다. 진상규명에는 더욱 무관심했다. 오히려 ‘정쟁’을 언급하며 진상규명에 대한 부정적 낙인을 형성하는 보도가 40건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KBS〉는 올해 4월 16일 지상파 중 유일하게 저녁 종합뉴스의 첫머리로 세월호 10주기가 아닌 내용을 다뤘다. 〈KBS〉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불방과도 궤를 같이하는, 공영방송으로서 부끄러워 마땅한 정부 눈치 보기의 결과였다.
왜 우리는 상흔 위에 자꾸만 상처를 내야 하는가.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진실하고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언론을 향해서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다. 변화를 촉구받은 지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언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멀다.
아프기 때문에 기억해야 했고, 기억했기 때문에 아파야 했던 10년이었다. 응답 없는 국가에 거듭 질문하고, 언론의 목소리를 계속 점검해가면서 우리는 그렇게 의지적으로 기억했다. 애도의 끈은 그렇게 굴곡지게, 그러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