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사적인 이야기가 원치 않는 형태로 유출되는 걸 방지하고자 극에 이름을 밝히고 참가한 모든 관객을 가명을 사용해 표기했으며, 아웃팅을 방지하기 위해 관객의 성별, 나이, 지역 등의 요소를 극의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기자가 임의로 변경했습니다.
※극에서 이야기를 나눠준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떤 성별로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본 기사에서 성별 인칭대명사는 ‘그’로 통일했습니다. 이때의 ‘그’는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그 사람’을 함축해서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트리거 워닝: 극 중 커밍아웃 과정에서 가족이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관련해서 트라우마 혹은 불편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2018)에서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며 목소리 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억압과 혐오 속에 오래 자신을 잃어온 이들이 고통의 굴레를 끊어내는 방법은 당사자의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말함으로써 붕괴된 한 세상의 파편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맞춰 나가는 것이 오늘날 연대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올해 8월, 대전의 여성복합창작팀 오토가 수개월의 연습 기간을 거쳐 올린 연극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는 오랜 시간 우리 사회가 외면해 온 퀴어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 지금과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공간을 만들었다. 관객의 이야기를 배우들이 무대에 재현하는 플레이백 시어터 형태의 연극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를 보고 왔다.
자, 선물을 받으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대전을 거점 삼아 활동하는 한은성 연출과 창작집단 오토는 지난 2021년 관계의 불안과 애착을 다룬 치료적 공연 「마이 민」을 시작으로 여성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출연하는 「진희의 꿈」(2022), 여성 노동자의 삶을 다룬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2023)와 같은 연극을 통해 다양한 소외를 다뤄왔다. 이번 연극의 주제는 퀴어로, 한 연출은 지난 7월 〈월간 옥이네〉와의 인터뷰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고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방해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수자의 삶을 재현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길 바란 것이다.
이번 극에서 오토가 택한 플레이백 시어터라는 형식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플레이백 시어터란 관객의 이야기를 대본 없이 무대에 즉흥으로 형상화하는 극이다. 극은 사전에 전해 받은 퀴어 당사자의 이야기를 최소한의 소품과 배우들의 대사, 몸짓만으로 재탄생시킨다. 극 중 사회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콘덕터(conductor)는 관객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관객은 무대에 마련된 의자에서 다른 관객들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관객과 배우,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공간에선 모든 이가 극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표를 확인하고 들어간 공연장은 작은 운동장 같았다. 한쪽 벽 전체에 커다란 무지갯빛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옆엔 미리 받은 이야기들이 전시돼있었다. 무대에 놓인 의자 양옆으론 여러 빛깔의 천들이 걸려있었다. 객석은 여러 형태와 질감을 가진 의자로 구성돼있었다. 조금 일찍 온 사람들은 자리를 고르거나 벽면 가득한 서로의 이야기를 읽었다.
극이 시작되자 콘덕터와 악사가 등장해 무대의 왼쪽과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콘덕터는 극을 이끌고 관객과 소통하는 사회자, 악사는 장면이 전하는 감정을 소리로 번역하는 이다. 콘덕터는 주위 관객들과 인사할 것을 권하며, 요즘 기분이나 연극을 보러온 이유를 알려주면 배우들이 그 이야기를 무대에서 재현해준다고 말했다. ‘두부’는 연극을 보러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왔다고 밝혔다. 점심을 과식해 아메리카노만 마셨다던 두부의 사연은,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몸짓을 통해 멀리까지 와서 맛있는 밥도 못 먹고 커피 한잔에 의지해 하루를 보낸 안타까운 이야기가 됐다. 두부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웃길지 몰랐다며 깔깔 웃었다.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임에도 네 명의 배우들은 두부보다 더 두부같이 무대를 누볐다.
다음으론 ‘오리’가 말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급하고 불안하다고 밝힌 오리는, 왜 연극을 보러 왔냐는 질문에 “어디서도 튕겨 나가는 기분이라 이곳에 오면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질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아까보단 조금 차분해진 배우들의 움직임, 오리의 시선 끝엔 이곳에 잘 왔다는 환영의 메시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 나는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을 알리듯 콘덕터는 가져온 편지를 열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연수’의 이야기였다. 같은 반 친구 ‘해수’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좋아하게 된 연수. 직감적으로 우정이 아님을 알지만 연수의 부모님은 퀴어에 부정적이다.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엄마와의 관계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연수를 잠식하고, 그 끝에 연수는 해수에 대한 마음을 모두 상상으로만 남기길 택한다. 내가 아주 많이 너를 사랑했다고. 네 눈을 볼 자신이 없어 도망치면서도 그 말은 해야겠다고.
편지 낭송이 끝나자 재기발랄한 고등학생 둘이 나타났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서로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던 둘은 함께 웃는다. 여기까진 현실이지만, 극은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이 세계는 연수의 상상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연수는 해수의 몸을 꽉 안고 너를 좋아한다고 거침없이 외칠 수 있다. 끝내 둘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배우들이 오색빛깔 천을 몸에 휘감으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끝난 후 소감을 나눌 분을 구하는 콘덕터의 말에 연수는 자진해 나갔다.
연수 엄마한테 내가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말했어요. 엄마랑 시장에 가는 길에, 되게 자연스럽게. 엄마가 울렁거린대요. 그건 정신병이래요. 더 말하고 싶지 않대요. 원래 안 좋아한다는 건 알았는데 직접 듣는 건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울면서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며 시를 써요. 그런지 몇 년 됐어요. 그래도 눈물이 안 멈추면 해수 눈망울을 떠올려요. 해수는 눈이 반짝여서 참 예쁘거든요. 그 반짝이는 눈을 보면 나도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해수 눈이 예쁜데 오늘 배우님들 눈도 참 예뻐서. 그래서….
연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연수가 직접 지은 이 이야기의 제목은 ‘한여름의 햇살’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쁜 해수, 연수와 반짝이는 눈을 오래 맞추는 해수, 현실이 빼앗은 이야기가 무대에 떠올랐다.
콘덕터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러드릴까요?
연수 전 제 본명인 ‘연수’요.
※극 내에선 본명을 사용했으나 기사에선 이 또한 가명으로 표기했음을 알립니다.
콘덕터 지금부터 연수 님을 위해 단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드릴 텐데 어떤 장면을 가장 보고 싶으세요?
연수 해수보다도 엄마가…… 엄마가 내 존재만으로…… 나 자체로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콘덕터 이 이야기에 이름을 붙이면 뭐가 좋을까요?
연수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온 우주가 외면하더라도…… 너를 사랑해.
한 문장 안에 미처 옮기지 못한 침묵이 있었다. 누군가는 코를 훌쩍였고, 누군가는 휴지를 뽑기 바빴으며, 또 다른 이는 함께 온 연인의 손을 꽉 쥐었다. 하나의 단어 뒤에 또 다른 단어가 나오기까지 느낀 것들을 도무지 지면에 옮길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쓴다. 단 한 명의 것일 수 없는 한숨과 훌쩍임. 연수는 긴 시간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너무 오래전에 목에 거대한 씨가 걸린 아이처럼. 원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소리 내어 말하긴 힘들다는 듯이. 그 순간 무대에 초대된 모두는 연수가 돼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그 영원과도 같은 순간을 깬 건 새로운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콘덕터의 목소리였다.
콘덕터 ‘온 우주가 외면하더라도 너를 사랑해’ 사랑을 마구 퍼부어 주세요!
배우1 엄마! 나 사실 여자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해.
배우2 그럼 연수는 사랑할 사람이 많겠네! 평생 사랑하면서 살 수 있겠네! 엄마는 근데 마냥 좋진 않아.
배우1 왜?
배우2 아직은 세상이 퀴어란 이유만으로 많이 밀어내고 배척하니까 네가 받을 상처가 걱정돼.
무대 위 연수와 엄마는 서로를 껴안고 방방 뛴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 감동적이지만 너무 빤한 이야기가 아닌지, 이렇게 쉽게 아름다워도 될지 고민하다 연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며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램프 속 지니를 누구보다 기다렸을 작은 아이. 감히 평가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저 먹먹했다. 이 무대가 연수에게 준 선물. 그에게 힘을 줄 장면들. 때로는 그런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지 않나. 이 무대는 무엇보다 이야기를 나눠준 이의 삶을 최선을 다해 구현할 뿐이기에.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게
다음 편지에 담긴 이야기의 제목은 ‘나는 연애는 안 해봤고 사랑만 해봤다’였다. 자신의 삶을 다 바치지 않는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밝힌 필자는, 여자친구들과 생사의 길을 함께해 온몸이 너덜거릴 때쯤이면 다들 자신을 떠났다고 밝혔다. 여러 번의 이별이 그에게 남긴 건 커다란 공허와 우울이었다. 콘덕터가 글을 읽을 동안 배우들은 천을 집었다. 어두운색 천, 밝은색 천, 분홍색 천, 노란색 천. 필자로 분한 배우가 내 사랑이 뭘 남겼냐며 좌절하는 사이 무대 가운데 놓인 의자엔 오색빛깔 천이 차곡차곡 쌓였다. 네게 사랑을 배웠어, 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었어, 너와 연인이어서 행복했어, 온 마음 다해 사랑한 네가 있어서. 천으로 수북이 덮인 의자가 말한다. 이래도 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이런 장면을 보면서는, 나의 많고 많은 퀴어 친구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거다. 언니랑 사귄 후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던 A, 여자도 남자도 좋아서 선택의 폭이 넓다며 기뻐하던 B, 중학생 때 커밍아웃을 하고 자신은 아직 사랑보다는 우정이라며 나를 다독이던 C,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사랑하는 게 참 좋다던 D. 이름 없는 존재라 명명하기엔 당장 내 주위에도 숨을 쉬고 땅을 딛고 살아가는, 웃기고 슬프고 서럽고 화나고 이따금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퀴어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매체에서의 퀴어 재현은 아직 퀴어 정체성만 내세워 그가 가진 다른 모습을 지우거나,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없어 좌절하는 극단적 상황을 그리기 위한 소재로 퀴어가 쓰이는 등 한계를 지닌다. 이를 벗어나려면 현실 속 퀴어들의 삶을 한 겹씩 열어볼 수밖에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연극이란 제의를 통해 역사의 일부로 복원되는 이곳에선 어떤 이야기든 힘을 부여받는다.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기억들까지도. 콘덕터와 배우는 이야기가 가진 가치를 끌어내는 일종의 수행자다. 이야기는 당신의 몸을 통과해 끝내 밖으로 나온다. 의미 없을 리 없다. 플레이백 시어터가 만들어진 이래 변치 않는 신념이 있다면, 모든 사람은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길 희망한다는 것이다.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주겠다는 이와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현하겠다는 이가 만날 때 생기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있다. 연극 연출가 가요 무나카타는 『플레이백 시어터의 길』(2022)에서 플레이백 시어터는 개인의 이야기가 지닌 힘을 온전히 믿는다고 썼다. 서사시가 여흥을 주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때 고대 사회를 형성하는 많은 윤리와 토의의 지반이 됐듯, 플레이백 시어터 역시 관객이 사회의 능동적 일원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살아냄을 응원하고 우리가 보는 것을 믿어보자고, 극은 말한다. 각각의 사연에 약간의 변주를 주면서. 퀴어가 병이라고 외면하던 엄마가 우리 딸이 사랑이 많다고 끌어안고, 사랑이 끝난 후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극의 형태로 현재를 통과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로 발산한다. 무엇보다 극장은 그럴 수 있는 공간이며, 연극이란 지극히 그런 예술이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 눈을 맞추고
공연을 보는 내내 가장 놀라웠던 점은 누구도 이곳의 안전함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는 아웃팅을, 나를 향한 위협적인 시선과 혐오 발언을, 그 밖의 모든 위험을 걱정하지 않는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느끼던 긴장은 몇 번에 걸친 이야기에 금방 풀어지고 친밀감을 느낀다. 이는 우연히 형성된 느낌이 아니라 플레이백 시어터의 원칙과도 관련이 있다. 관객의 대사가 극의 재료가 되는 플레이백 시어터는 누구든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수용적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조언과 설득 없이, 비평과 비난 없이, 말한 모양 그대로.

이러한 원칙 위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는 서로의 삶에 자신을 대입하고 수많은 삶의 경험과 정체성 속에서 공동의 경험을 창조한다. 이는 완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닌, 잠시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종의 정서적 연대다. 또한 극 중 과거의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부분이 다시 재현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제의라는 점을 알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과정에서 당시엔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고민하거나 충분히 보듬지 못했던 마음을 다시 챙길 수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보는 이들 역시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며 위로받을 수 있다.
벽 뒤에 전시된 ‘영국 프라이드에서’라는 제목의 사연엔 2019년 영국 프라이드 먼스 사전 행사인 퀴어 피크닉에 간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혼자 어슬렁거리던 편지의 필자는 한 레즈비언 커플의 돗자리에 초대받는다. 레즈비언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빵을 먹고 맥주를 마시던 그는 한 퀴어 할머니의 시 낭독 행사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공연이 끝으로 향할수록 잔잔한 기타 소리와 배우들의 몸짓 뒤로 그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거나 마른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곤 입안에 굴리던 낱말과 문장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꺼내놓는 백발의 할머니. 때론 높고 부드럽게, 때론 한 자 한 자 힘을 주며. 할머니의 몸을 통과한 시는 푸른 잔디밭과 체크무늬 돗자리를 건너 그의 귀에 조심스레 걸터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극장 안에서 그의 시간을 상상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서로의 삶을 살아내고, 이것이 극에 접속하는 순간에만 활성화되는 유일무이한 공동체를 만든다.
극장에 들어갔을 때 공간을 가득 채우던 이랑의 낭랑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가족을 찾아서》에서 이랑은 노래한다. 내 안에 있는 그 노래를,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결국 내가 되고픈 가족을 찾아서. 특유의 단단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곳에서 우리는 혈연과 이성애를 비롯해 기존 사회의 가족 규범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랑을 그릴 수 있었다.
지난 7월, 대법원은 동성 배우자의 피부양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등법원 역시 ‘더 이상 공적 영역에서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은 설 자리가 없음’을 선언했으며, 이는 퀴어를 대상으로 한 사회적 배제와 혐오가 분명한 문제임을 상기한다. 보수적인 동네에서 사랑하기 참 어렵다고 눈물 흘리면서도 끝내 활짝 웃던 그날의 관객들을 기억한다. 무대 위 배우들의 몸짓이 나의 것과 다름없다고 눈시울을 붉히던 이들 모두가 주인공이던 극에서 결코 아무도 혼자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씩씩하게 말해본다. 우리는 그렇게도 서로의 우주가 될 수 있다고. 크나큰 사랑을 담아, 너의 이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