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럼비야 일어나라

끝나지 않은 강정마을의 투쟁 속에서 우리가 지켜낼 평화는

  제주 남쪽에는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강정마을이 있다. 물 강(江)에 물가 정(汀)을 쓰는 강정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해 서귀포시의 식수를 담당했다. 강정 해안 전체를 둘러싼 길이 1.2km, 너비 250m의 거대한 너럭바위 ‘구럼비’는 마을의 자랑이었다. 『서귀포시 지명 유래집』(1999)에 따르면 구럼비라는 이름은 주위에 구럼비낭, 즉 까마귀쪽나무가 많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고 해안에 있던 아홉 개의 암자를 따 구암비라 불리던 게 변형됐다고도 한다. 구럼비 바위는 오랜 시간 삶터이자 일터로 주민공동체를 수호했다.

  그러나 2007년 구럼비 해안이 해군기지 부지로 선정되며 강정마을의 평화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강압적으로 진행된 행정 집행은 마을 공동체를 분열시켰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상처 입었다. 한 가족이 보상을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졌고, 바위를 지키겠다고 울부짖던 이들이 차례로 용역에 끌려갔다. 전국에서 건네 온 연대의 손길과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럼비는 2012년 발파됐다. 그러나 구럼비의 아픔을 잊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는 목소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럼비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주를 넘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끝내 싸우기를 다짐한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우리 강정을 지켜 줍서

▲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 타임라인 ©빈채현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 지리적 요충지인 제주 해역 부근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해군기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주변국과의 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주위에 매장된 풍부한 해양자원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논의됐다. 당시 국방부는 제주의 화순과 위미를 해군기지 부지로 추진했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2006년 당선된 김태환 제주지사가 해군과의 논의 재개를 선언하고 해군기지 건설사업을 서두르며 본격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제대로 된 도민 의견 수렴과 환경영향평가 없이 국방부와 정부의 주도 아래 졸속으로 진행돼 제주 사회 각계각층의 분노를 불렀다. 그럼에도 해군과 정부, 제주시는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우며 해군기지 로드맵을 마련했다.

  그러던 중 2007년 4월 윤태정 마을회장과 일부 주민이 강정마을 비공개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김태환 제주지사도 찬성 비율이 높게 나타난 강정 주민 여론조사를 근거로 들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수용했다. 국방부와 해군이 손을 잡고 본격적인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들어가자 강정마을에선 강정해군기지유치반대위원회(반대위)가 출범했다. 새로 선출된 마을회장을 필두로 실시된 재투표에선 대다수 주민이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정부는 재투표 결과에 주목하기보다 제주 해군기지가 관광미항임을 강조하며 해군기지 건설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내세웠다. 국무총리실은 2008년 진행된 크루즈 선박 공동 활용 예비타당성 조사와 연구용역을 토대로 강정에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을 개발할 것을 약속했고 2009년 1월엔 국방·군사시설사업 실시 계획이 승인됐다.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란 해군의 함정과 민간 크루즈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군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지역 관광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진다.

  제주도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설치 과정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부대시설 설치와 지역 주민의 관광미항 내 편의시설 사용 등을 대가로 정부와 협약을 맺었고, 이후 이 사실이 드러나며 또 한 번 크게 질타받았다. 민간 시설 조성에 투자될 예산이 적다는 것과 크루즈 입항을 위한 경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함께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부와 해군이 제시한 계획엔 군사기지에 대한 거부감을 관광미항을 통해 완화하려는 시도가 무색할 정도로 불명확한 부분이 많았다. 불확실성에 자신의 미래를 기댈 수 없었던 주민들은 직접 구럼비와 강정을 지키기 위해 피켓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앞엔 용역과 경찰을 앞세운 해군과 정부가 있었다.

  강정을 향한 국가폭력은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2010년 1월 제주 해군기지 기공식 행사를 저지하는 주민과 활동가 50여 명이 강제 연행된 게 시작이었다. 2011년 1월엔 해군과 시공사인 삼성물산과 대림산업이 사전 고지 없이 굴착기를 동원해 구럼비 파괴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 4월 강정마을회는 대도민 호소문을 발표하며 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촉구했다. 무자비한 공사 강행과 지속된 국가폭력의 온상이 드러나며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고, 전국 44개 시민단체가 모여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를 결성했다. 세계 곳곳에서 강정을 향한 연대의 손길이 도착했다. 그러나 넉 달 후 8월, 경찰은 집회 전면 금지를 통보하고 주민들이 세운 망루를 강제로 철거했다.

  2012년 3월 7일, 구럼비가 산산조각 났다. 해군은 대규모의 공권력을 동원해 구럼비를 발파했고 이후 10일간 반대하는 주민과 활동가 60여 명이 체포되거나 연행됐다. 발파 작업을 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강정포구로 급히 이동했으나, 경찰은 이미 구럼비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한 상태였다. 화약 앞에서 오랜 바위는 힘없이 쪼개졌고 주민들은 강정과 구럼비를 지켜달라며 서럽게 울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구럼비로 향하던 이들은 경찰에게 저지당하고, 나를 먼저 죽이라던 이들은 바위로 올라가 인간 방패를 만들었다가 해군에게 끌려 나왔다. 주민과 활동가가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 해군은 화약을 설치해 몇 차례의 폭파를 감행했으며 공사 중간에 내려온 제주지사의 공사 보류 및 재검증 요구 역시 무시하고 해군기지 건설에 속도를 냈다.

  이후 해군기지가 완공되기까지 공권력은 주민들을 감시하고 연행하기 바빴다. 경찰과의 충돌로 주민들이 다치고 농성 천막이 철거됐다. 주민들은 공사를 방해했단 혐의로 기소됐고 시공사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2015년 1월 있었던 행정대집행에선 천여 명의 경찰과 용역이 주민들과 충돌해 마찰을 빚었다. 2016년 2월 26일, 제주 해군기지가 완공됐다. 입지 선정부터 9년, 공사 착수부터는 6년이 걸렸다. 같은 날 강정마을회는 강정 생명평화문화마을 선포식을 열고 강정을 군사기지가 아닌 ‘생명과 평화의 문화가 넘실거리는 마을’이자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인류의 고향’으로 만들 것임을 선언했다. 그날의 굳센 다짐 뒤로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강정의 주민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평화 행동을 지속하는 중이다. 이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 앞바다

국가가 파괴한 건 무엇이었나

  강정이 잃은 건 구럼비만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신뢰, 오랜 역사의 마을 공동체, 그리고 수많은 비인간 존재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전부다. 2007년 4월 당시 마을회장과 해녀를 중심으로 87명이 참여한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 신청이 결정됐다. 그해 8월 주민들은 당시 마을회장을 해임한 후 강동균 마을회장을 새롭게 선출했다. 이후 임시총회를 열어 해군기지 유치 찬반 재투표를 진행했다. 강정 주민 전체 유권자 1,200명 중 725명이 참여한 재투표에서 주민의 94%가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했으나 제주시와 해군은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갈등했다. 200개가 넘는 자생 단체가 갈라져 한 동네에서 얼굴을 마주하기나 제사를 함께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경찰의 대치 과정에서 사촌을 만나거나 친척과도 편히 얘기할 수 없는 등 수백 년간 지속된 강정의 주민공동체가 붕괴됐다.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 공동대표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점으로 공동체 파괴를 들었다. 고 공동대표는 “정부는 대통령과 해군참모총장, 제주도지사가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공동체 회복·지원사업이 이뤄졌기에 완전한 갈등 해소가 이뤄졌다고 평가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며, “해군의 공식적 사과 없이 이뤄진 공동체 복원사업 때문에 여전히 마을 내에서 반목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에 항의하는 주민들 ©헤드라인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수많은 생명에 대한 학살과 환경 파괴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라산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구럼비는 바위틈으로 용천수가 흐르고 바다와 맞닿아있어 생태적 가치가 크다. 구럼비 해안은 맹꽁이, 제주새뱅이, 붉은발말똥게와 같은 멸종위기종과 성게, 보말, 다금바리, 자리, 전복의 서식지이며, 남방큰돌고래의 이동 경로다. 그러나 해군기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물의 흐름이 바뀌며 산호 군락지가 폐사했고 바다가 오염됐다. 해군은 붉은발말똥게를 약천사와 영산강 하구로 옮기겠다며 대체 서식지를 제안했으나 작고 약한 동물들은 사는 곳이 바뀌면 생존이 어렵다.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강정천 상류로 올라오는 은어들이 줄어들기도 했다. 고권일 공동대표 역시 “이끼와 같은 유기물의 증가로 물이 탁해지고 바위가 미끈거려 안전사고의 위험이 증가했다”며 진입도로 공사가 강정 생태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강정 앞바다에는 한국 해역 전체의 79%에 해당하는 129종의 산호가 분포한 천연기념물 442호 연산호 군락이 있다. 그러나 『코랄블루』(2021)에 따르면, 해군은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이를 암초라 칭하며 문화재청에 보호구역 개발을 가능케 하는 현상변경신청을 제출했다. 이에 강정의 다이버들은 ‘제주해군기지 연산호 TFT’를 꾸려 신규 항로를 만들려던 곳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핵심인 범섬을 가로지르는 항로임을 밝혔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문화재청에 현상변경 이의 신청서를 제출해 크루즈 준설을 막았다. 이처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이 목숨을 위협받거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제주 연산호 군락 ©제주 코랄

고래 싸움에 제주 등 터진다

  해군기지 건설을 제주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섣부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엔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처한 위치 등 복잡한 맥락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여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시작된 제주 해군기지 논의는 김대중 정부를 거치며 본격화됐고, 노무현 정부 때 강정마을 유치가 확정돼 이명박 정부 때 건설이 확정됐다. 평화활동가 정욱식은 저서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가짜안보』(2012)에서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우던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해군기지 건설을, 이명박 정부에 와서 보수 세력이 색깔론을 내세우며 정치적·이념적 소재로 전락시켜 갈등을 증폭시켰다고 비판한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국가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기보다 자주적인 무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사업은 그 연장선에 놓인 국책사업이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이 갈등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연대의 손길이 전국 곳곳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보수 정치인과 언론은 강정마을을 ‘종북좌파의 해방구’라 부르며 색깔론을 펼쳤고, 공안대책회의를 열며 강정의 투쟁을 이념 다툼으로 정리했다. 특히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의 개념은 해군기지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하고자 이명박 정부 들어 제시됐으나, 이는 군항을 가리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당초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선 ‘15만 톤 크루즈 2척이 동시 접안’ 할 수 있어야 했으나, 2011년 9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정마을에 들어선 크루즈터미널

  국제적 흐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정부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이유로 향후 해양분쟁 발발에 대비한 제주 해역 해상교통로 확보를 들었다.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해군기지가 건설된 후 미국 해군함과 주한미군이 들어오며 제주 해군기지가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겠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주둔군 지위협정(SOFA) 규정에 따라 제주 해군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 고권일 공동대표는 “제주는 대륙의 해양 진출을 차단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섬이기에 미국이 제주를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쓰려고 한다”며 이것이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동맹의 목표라고 지적했다. 해군기지가 중국을 견제하는 미군기지로 사용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의 것이 된다.

  이미 세계 곳곳엔 미국의 태평양 지역 군사화에 대한 야심을 보여주는 선례가 존재한다. 진주만을 미국의 해군기지로 내준 하와이는 물론, 1990년대 미국 공군기지 이전지로 결정된 일본 오키나와 북부 헤코노 마을에선 지금도 건설을 막기 위한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고권일 공동대표는 “제주를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은 전쟁 억지에 국한되지만, 미·중 갈등에 따라 치러야 하는 전쟁 비용과 인명 살상 등 상반되는 손해와 국력 소모가 너무 크다”며 “제주를 전쟁기지화 할 게 아니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 지구적 평화 협상과 공존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같은 편이라 믿었던 우리마저

  투쟁이 길어지며 함께 싸우던 이들이 갈라지는 것 역시 또 다른 아픔이 됐다.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과 육지에서 연대를 위해 온 지킴이들은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투쟁의 두 축이었다. 이들은 구럼비와 강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협력하며 상생했다. 물론 이중 직접적인 당사자에 해당하는 주민들의 의견이 우선시됐으나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는 점에서 서로를 동지로 인식했으며 일부 지킴이들은 강정마을로 주소지로 옮겨 정착했다.

  2012년 구럼비 발파 이전까지는 이를 저지하겠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함께 행동했지만, 구럼비가 사라지고 해군기지 건설 공사가 진행되며 마을 주민들과 지킴이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속 투쟁을 외치던 지킴이들의 목소리는 당장 삶의 터전이 위태로운 주민들의 것과 완전히 포개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돌들의 춤』(2023)에 기록된 지킴이들의 회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2014년 원희룡 당시 도지사의 방문을 기점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긴 투쟁에 지친 주민들은 찬반을 넘어 화합의 차원에서 도지사와 대화하길 원했으나, 도지사와의 만남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일부 지킴이들의 반대 피케팅은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후 2018년 국제관함식에서 일부 주민들이 지킴이들을 외부 세력이라 칭하며 입장이 확연히 갈렸다. 이상 활동가는 『돌들의 춤』에서 당시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이끌던 주민들조차 ‘관함식 유지 찬반투표를 하는 마을회관에 지킴이들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 얘기를 들은 한 친구가 울면서 나갔다고 회상했다. 

  2019년 1월 이뤄진 강정마을 향약 개정은 지킴이 배제를 위한 노골적 움직임 중 하나였다. 강정마을 주민의 조건이 거주기간 5년에서 10년으로 변경되며 반대 투쟁이 시작된 후 강정에 정착한 일부 지킴이들이 주민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돌들의 춤』에서 딸기 활동가는 ‘이제 악에 받친 지킴이들이 저만큼 앞서가 있고, 반대 주민들은 어디에 서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 같다며 주민을 앞세워 전개되던 지난 시간과는 투쟁의 양상이 변화했다고 짚었다.

  사회운동에서 당사자성은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당장의 생계와 재산이 달린 문제에 대해 그 장본인보다 더 절박하고 시급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정의 지킴이들은 이 점을 인식하고 오랜 시간 주민들의 뒤편에서 연대하길 택했으나 어느 순간 당사자라는 말은 이들을 배제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지킴이들 사이에서도 주변화된 이들을 향한 혐오가 생겼다. 외국 국적의 활동가는 언어 장벽을 이유로 동등한 소통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고 젊은 여성 활동가는 성추행 피해를 입어도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가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개인의 몸과 마음은 계속 소진됐다. 그레이스 활동가는 투쟁 당시 ‘같이 하는 사람들 안에서 내가 싸우려는 어떤 것의 모습을 보았을 때’ 힘들었다며 가부장제나 소수자를 향한 배제가 내부에서 나타날 때 자유로이 말할 수 없어 불편했다고 말한다.

  이런 힘듦을 얘기할 수 있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처럼 투쟁의 방식과 흐름이 변하며 그간 억눌린 일부 가치들은 회복된다. 지난 20여 년의 시간 동안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많은 부분을 함께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마냥 행복하고 평화롭지는 않았다. 분노하고 슬퍼하고 누군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모두 강정의 투쟁이다. 

끝끝내 평화를 말하겠다고

  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이 시작된 지 2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강정에선 오늘도 일상 평화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아침 7시면 생명 평화 백배를 하고 11시엔 해군기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진행되는 길 위의 미사를 열며, 12시엔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손을 붙잡는 인간띠잇기를 진행한다. 강정의 다이버들은 꾸준히 연산호 군락을 지켜보며 해군기지 준공으로 변한 해양 생태계의 모습을 기록한다. 

▲평화의 백배를 진행하는 사람들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강정에 남았다. 『돌들의 춤』에서 미국 국적의 카레 지킴이는 ‘미국의 군사문화에 미국 사람으로서 반대하는 게 나의 역할’이라며 ‘강정의 상황을 다른 미국인들에게 전달하고 미국인으로서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농사를 짓는 정선녀 지킴이는 ‘내게 농사는 비폭력행동의 한 방법’이라며 ‘땅콩 농사를 지으며 생명과 평화는 사람이 스스로 키워나가고 움직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강정의 지킴이들은 평화를 교육하고, 써클 댄스를 추고, 영화를 제작하며, 농사를 짓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에서 평화를 일구고 있다.

  평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은 강정에 국한되지 않고 제주생명평화대행진과 같이 제주 전역으로 확장됐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의 목표는 제주도의 군사화를 저지하고 평화의 섬으로 남길 바라는 염원을 담는 것이다. 지난 8월 진행된 2024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선 600여 명이 제주의 평화와 제주 제2공항 건설 백지화를 외치며 2박 3일간 약 60km를 걸었다.

  고권일 공동대표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계속 강정마을을 방문하고 이곳으로 이주하며 평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고 공동대표는 “평화 관련 행사를 조직하고 추념식을 주도하는 등 계속 활동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게 투쟁을 이어올 수 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는 4·3의 역사를 지닌 섬이다. 제주에서 평화의 의미는 육지의 것과 마냥 같을 수 없다. 20년 전 국책사업의 이름으로 행해진 제주 해군기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정치적 이념의 문제로 치환돼 제주도민을 상처입혔다. 그리고 오늘날 또다시 국토부는 지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연을 파괴할 가능성이 큰 제주 제2공항 건설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제주 제2공항 건설까지는 아직 환경영향평가와 제주도의회의 동의 과정이 남아 있다. 제주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과거의 아픔을 지켜본 자의 윤리일 것이다.

  구럼비는 사라졌다. 거대한 폭파음과 울부짖음 속에 구럼비가 사라지고, 그곳을 터전 삼던 수많은 비인간이 목숨을 잃고, 화목했던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정치권의 부당한 프레임 씌우기에 강정 주민들은 또다시 나라를 배반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처럼 강자들의 싸움에서 약자들의 목소리는 뭉개지고 이들의 삶은 밀려나기 바쁘다. 

  강정에서 오랜 시간 활동한 오두희 활동가는 『돌들의 춤』에서 ‘주민들은 4·3을 겪은 제주도민으로서 국가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오 활동가는 그럼에도 이들이 굽히지 않고 ‘자연에 대한 파괴를 중단하고 무기로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며 인간성을 파괴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정의의 회복’으로 향할 것이라 썼다. 강정의 평화는 제주의 평화이며, 제주의 평화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다. 현재까지 이어진 부정의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강정의 투쟁이 모두의 투쟁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우리는 또 다른 구럼비를 지켜야 한다. 나의 평화가 너의 평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외칠 수 있다. 구럼비야 일어나라. 우리 언제까지고 너와 함께하리라.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사랑하는 너에게, 이 이야기의 제목을 기다리며

Next Post

학내 노동 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