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기억한다

  언젠간 그런 구절을 읽었다. 세상에 목소리 낼 수 없는 존재는 없다고. 들으려 하지 않음이, 섣부른 판단과 무심한 단정이 누군가를 너무 쉽게 목소리 없는 존재로 만든다고. 그러니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하기보다 자꾸 무어라도 들으려 해야 한다고. 그의 목소리가 금방 알아듣기 힘들거나 음성언어 외의 다른 형태로 표현되거나 혹은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달돼도 다만 듣는 자의 위치에서 계속 귀를 기울이자고.

  그래서 지난겨울 첫 수습 기사를 쓰면서는 내내 소를 봤다. 반짝이는 눈을, 쫑긋거리는 귀를, 우리 집 식탁과 비슷한 색인 그의 털을. 사람들의 함성으로 둘러싸인 경기장에서 그는 내내 외롭고 힘들어 보였다. 누군가 돈을 걸었으니 잘 좀 하라고 소리치면 너는 신나서 방방 뛰긴커녕 등을 보이며 뒷걸음질 쳤지. 그런 널 보며 마음이 아팠음에도 못내 경기장을 뜨지 못한 이유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상대에게 힘껏 달려드는 너의 모습과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기장을 도는 네게서 나는 어떤 목소리를 길어낼 수 있을까. 부딪히고 넘어지고 온 힘 다해 박치기하다가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르던 너를 보고, 저 가쁜 숨소리가 너의 목소리일까하며 나는 끝내 완성되지 못할 추측을 했다. 그래서 너의 목소리를 들었냐 하면, 사실 그건 잘 모르겠다.

  올여름엔 제주에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강정마을에 갔다. 구럼비가 사라지고 방파제가 된 그곳에 올라 오래 바다를 봤다. 발끝을 빼꼼 드니 저 벽 너머 해군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갯강구가 기어다니는 돌길 밑으론 구럼비의 흔적 없이 매서운 파도만 쳤다. 하늘이 푸르렀는데도 바다는 어쩐지 성이 난 듯 보였고 그곳에서 나는 몇 달 전 본 소의 눈을 떠올렸다. 네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도 못한 것 같은데, 이젠 바위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근데 이미 사라진 바위야. 흔적도 없이. 깨끗이. 

  파도가 몰아친다. 바다 밑에 용궁이 있다던 옛이야기를 기억해. 혹시 이 바다의 용왕도 화가 많이 났을까. 아니면 죽임당한 물살이와 산호를 껴안고 꺼이꺼이 울었을까. 우는 용왕을 상상하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버럭버럭 화를 내고 저기 옥황상제한테 말해서 천둥 번개라도 치면 좋겠다. 이렇게 서럽고 서러운 일이 있었는데도 왜 아무도 제대로 벌을 받지 않은 거야. 왜 누구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은 거야.

  까맣고 커다란 바위 밑에는 거대한 산호 마을이 있다는데. 해군기지가 생기며 물의 흐름이 바뀌고 갈수록 해양 쓰레기가 늘어 몸살을 앓고 있대. 이러다 또 사라지면 어쩌지. 아직 이름을 다 외우지 못했는데, 목소리는커녕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산호 사이를 헤엄치는 물살이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에 나는 아직 가진 것이 적은데. 기쁨보다는 두려움을 담아, 산호가 아름답고 바위가 단단하다는 그 마을을 상상하려고 자꾸 읊조린다.

  분홍바다맨드라미, 큰수지맨드라미, 밤수지맨드라미, 연수지맨드라미, 검붉은수지맨드라미, 자색수지맨드라미, 황금수지맨드라미, 둥근컵산호, 둔한진총산호, 직립진총산호, 꽃총산호, 빨강별총산호, 빛단풍돌산호, 거품돌산호, 해송, 긴가지해송, 호리병말미잘, 큰산호말미잘, 그리고 갯민숭달팽이와 산호 사이를 헤엄치는 수많은 물살이들.

  그러니까, 나는 너를, 기억한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다고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 너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비록 이 다짐이 너무 진부하게 들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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