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만 명의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가진 이야기는 5만 개가 훨씬 넘을 것이다. 5만 개가 넘는 이야기를 담으려면 매일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위를 둘러보기 바쁠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놓친 이야기를 아쉬워하고, 끝내 담아낸 이야기를 부서질 듯 끌어안을 것이다. 인구가 약 5만 명인 충북 옥천의 지역 잡지, 〈월간 옥이네〉의 이야기다.
2017년 사회적 기업 고래실이 창간한 〈월간 옥이네〉는 옥천의 사람과 문화, 역사를 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매월 150~180쪽 분량의 잡지를 펴낸다. 잡지가 담는 이야기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자 한 존재가 품은 기나긴 시간이다. 방학한 초등학생부터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북적이는 공설시장의 상인들과 오래도록 마을을 지켜온 보호수까지, 〈월간 옥이네〉의 시선은 어린이와 노인, 옥천과 밀양, 인간과 비인간의 모든 경계를 아우르며 자꾸만 더 먼 곳을 향한다.
오랜 시간 지속된 뿌리 깊은 서울중심주의 속에서 현 언론 지형이 그리는 지역의 모습은 흉악 범죄의 온상 혹은 극심한 자연재해의 피해자가 전부다. 지역에 대한 납작한 재현이 만연한 시대에 지역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을 담는 매체의 존재는 귀하다. 〈월간 옥이네〉는 지역 내 다양한 공동체의 풍경과 지역 사람들의 고유한 생각과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0년부터 4년 연속 한국잡지협회가 선정한 우수콘텐츠 잡지로 뽑혔다. 〈월간 옥이네〉의 박누리 편집장을 만나 지역 잡지를 만드는 일의 고단함과 행복,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자의 태도를 물었다.
〈월간 옥이네〉의 창간 선언은 “역사에 남은 1%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99%를 기록한다”이다. 이때 역사를 만든 이들로 누구를 떠올렸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기록들이 조명하는 건 1%의 사람들이다. 〈월간 옥이네〉의 창간 선언은 서울과 지역의 공간적 대비뿐 아니라 기존의 언론이 집중하지 않던,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한 이야기를 담아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예를 들자면 〈월간 옥이네〉가 취재하는 사람은 오일장에서 장을 보는 주부, 나물을 팔러 나오신 할머니, 귀농한 청년들과 같이 일상을 보내는 이들이다. 이들이 역사를 만드는 99%라고 생각한다.
자치, 자급, 생태, 공간, 공동체, 사람, 문화, 역사를 키워드로 삼아 코너를 나누게 된 과정이나 기준이 궁금하다.
〈월간 옥이네〉가 최대한 담아내려는 가치다.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게 아니라 지역 혹은 농촌 공동체에서 오랜 기간 관계의 기반이 된 키워드다. 자치와 자급, 생태는 아주 오랜 과거에 농촌 사회의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작동 원리가 된 가치였고, 이런 힘들에 기반해 공간과 공동체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게 쭉 쌓여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지기에 키워드로 정했다.

기사 아이템은 어떤 식으로 얻는지 궁금하다. 이웃들과 대화하다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나.
사실 일부러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아이템이 많다. 어느 식당 사장님이 참 열심히 하시더라는 얘기를 듣고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의 고민을 듣다 기사를 쓰기도 한다. 이들의 고민이 단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 돌봄을 해야 하는데 점심을 어쩌면 좋지’와 같이 사회적 측면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를 기사로 쓸 때도 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 사이에서 살면 아이템은 늘 무궁무진한데 지면과 인력의 한계로 다 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줄어드는 수요로 종이 잡지가 갈수록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다. 〈월간 옥이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재정상의 어려움은 없는지, 재원 조달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월간 옥이네〉는 고래실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잡지를 내는 구조인데 이 자체로 돈이 되진 않는다. 인건비나 인쇄비에 비해 구독료 수입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큰 적자 구조로 운영된다. 그래서 다른 단체의 소식지를 만드는 등 외주 사업을 통해 인건비를 벌고, 그 돈으로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지역 경제 차원에서 순환되는 구조도, 공적 지원이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아주 힘든 상태다. 우리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며 지역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조직들이 사람들의 지갑을 쉽게 열 수 없다는 점에서 고민이 많다. 그 일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지역사회 내의 관심이나 재정적 후원, 물적 기반으로 이어지기까지는 품이 많이 드는 것 같다.
〈월간 옥이네〉는 옥천에 뿌리를 두고 옥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잡지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울어진 현 언론 지형에서 지역의 목소리를 꿋꿋이 담아내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보거나 듣지 않으면 그 존재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못 한다. 한국 사회에서 오랜 시간 지역이라는 곳이 그래왔다. 인터뷰하다 종종 청소년들이 지역 주민인 자신을 패배자라고 느낄 때 마음이 아프다. 어르신들 역시도 ‘나는 조그마한 시골에서 배운 것도 없이 평생을 살아온 사람인데’와 같은 인식을 갖고 계신다.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권력이, 내가 쥔 펜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한다.
한편으론 이들의 이야기를 잘 기록하는 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적 방법 같다고 느낀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모여 지역 매체의 형태로 출간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현재의 불균형한 한국 사회에 균열을 내고 조금씩 변화시키는 작은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것 같다.
여기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데, 이곳에 사는 이들조차 매일 보고 듣는 게 서울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지역의 특색이 무엇인지를 지역 차원에서 얘기하지 않고 서울의 눈으로 바라보면 지역은 개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지역을 서울과 똑같이 만들려고 획일화를 강요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사람들의 삶과 지역 생태, 지구 환경을 서슴없이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거나 심각한 자연재해를 입었을 때만 지역이 뉴스에 나온다. 그 안에서 지역은 불쌍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곳, 흉악 범죄가 일어나 살기 어려운 곳으로 그려진다. 그게 아니라면 힐링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대상화된다. 언론뿐만 아니라 귀농·귀촌 프로그램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역을 소비한다. 그런 정보 값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농촌에 오직 소비하기 위해 온다. 농촌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마주한 현실은 토착민과의 갈등을 낳기도 한다. 농촌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배워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소비와 낭만의 공간으로만 비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 농촌이 힐링의 공간이 될 수는 있으나 그런 이미지를 계속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현재의 주류 언론들은 지역의 얘기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지금껏 서울과 경기권 언론들이 한국 사회에서 몸집을 불렸다면, 이젠 지역의 이야기를 하는 언론이 주민들 스스로 내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간 옥이네〉는 옥천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참사와 같은 굵직한 이야기도 담는다. 그렇다면 지역 저널리즘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일단은 지역 내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동일한 사회 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동소이한 경우가 많다. 세부적 측면은 다를지라도, 문제의 핵심은 결국 같은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도 옥천 출향민분 중 유족이 계셨고, 워낙 한국 사회에서 큰 참사였다 보니 내가 유족이거나 안산에 살고 있는지를 떠나서 모두가 겪은 상처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같은 시기에 함께 겪은 문제나 상처를 계속 이야기하고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치유를 얻고 사회적 회복으로 갈 수 있기에 우리 공동체 안의 문제를 계속 돌아봤으면 좋겠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무얼 했는지, 여전히 울부짖고 있는 유족분들이 어떤 마음인지 이야기를 들으며 멀리 있는 아픔이 아니라 나의 아픔임을 느꼈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지역의 또 다른 아픔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꼭 세월호와 관련 있지 않더라도 우리 농촌의, 농민의, 결혼 이주 여성의, 어린이와 청소년의, 노인의 삶은 어떤지 연결되는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밀양* 역시 옥천 같은 농촌 지역에서는 더더욱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옥천을 지나는 변전소를 크게 짓는다고 하면 밀양의 부조리한 사건이 우리의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아픔이 한국 사회 어느 지역에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전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 아닌가.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이야기가 사실 내 이야기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당장 우리도 겪을 수 있고, 어쩌면 겪어온 일들에 대해, 공동체뿐 아니라 자치와 자급을 침해하고 훼손하는 일들에 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여러 겹의 맥락이 뒤엉킨 이야기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밀양 행정대집행: 10여 년 전 한국전력공사가 밀양에 초고압 송전탑을 건설하는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폭압적인 공권력을 행사한 일을 말한다.
〈월간 옥이네〉는 청소년 바우처 사업이나 동물보호 조례 제안 등 활자를 넘어 지역 공동체 내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지역 저널리즘과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기자가 됐다. 그러나 변화를 만들려면 기사가 다양한 움직임으로 연결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100개의 기사를 쓰면 그중 두세 개는 변화를 일으킨다. 문제는 나머지 90개다. 변화는 당연히 쉽게 오지 않고, 그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힘을 보태면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건데 그걸 견디기 힘들었다. 밖에서 판을 만들고 뭔가를 기획해 사람들하고 진행하면 속도가 더 붙지 않을까 생각했다.
길고양이 보호 조례안을 제안하게 된 것도 길고양이 특집 보도가 출발점이었다. 길고양이 사진을 지면에 담으려 따라다니는 과정에서 밥을 주시는 분들을 만났고 이분들을 서로 연결해 드렸다. 이 만남들을 계기로 ‘옥천 마을고양이 보호협회’가 결성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옥천군 꿈 키움 바우처’ 지원 사업도 우리 지역이 가진 문제를 고민하며 시작됐다. 우리는 농촌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농민들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다고 느꼈다. 고민하다 기본소득을 떠올렸고 마침 지원받을 기회가 생겨서 작은 학교의 학생들과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 실제로 현실에서 뭔가 바뀌니 사람들이 느끼는 게 달랐다. 이게 도내 사업으로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자가 기사로 말해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사회 변화를 추동하고자 지면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글자로 보는 것과 내가 직접 경험하는 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계절을 느끼는 방식이나 하루를 보내는 방식 등 옥천의 고유한 시간성을 어떻게 감각하는지 궁금하다. 날이 가고 계절이 변하는 것들이 어떻게 다가오나.
농촌에서 감각하는 기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특히 지난 10여 년간 가파르게 바뀐 기후를 현장에서 매일 느끼며 농사를 지으신 분들은 최고의 현장 전문가다. 농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운 날에도 밭일하시는 어머님들을 걱정하고, 위협적인 스콜로 비닐하우스나 논밭이 잠기진 않을지 염려하게 됐다. 겨울이 너무 따뜻하면 병해충이 죽지 않을까 봐, 오뉴월에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냉해로 농작물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데 그런 감각들이 생긴 게 이전과 확실히 다른 것 같다.
개인적으론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가령 4월에 피어나는 초록과 한창 더울 때의 초록, 9월로 넘어갈 때의 초록이 다르다. 자연의 색을 구분하는 감각이 바뀐 것 같다. 이건 사실 인간이라면 원래 갖고 있었을 감각들인데 도시에 살았다면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 이 기쁨을 알게 돼 좋다.
농촌에 살면 기후위기가 더욱 피부로 느껴질 것 같다. 이번에 옥천에서도 907 기후정의행진을 추진하던데.
서울에서 907 기후정의행진을 한다. 개인적으로 그간의 기후위기 대응 활동을 쭉 봐왔던 지역 사람으로서 아쉬운 것이 많다. 도시 지역의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들이 얘기하는 기후정의라고 느꼈다. 우리 동네 농민들이야말로 지난 10여 년간 기후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살아온 이들인데, 이런 분들과 지식과 권위를 가진 이들이 연결된다면 그게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운동의 국면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제일 좋은 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같은 날에 함께 쏟아내는 것이다. 마침 우리 동네에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함께 옥천에서 907 기후정의행진을 열려고 준비 중이다.
기후위기 문제의 최전선이 농촌이고 지역인데 정작 이곳에선 결집할 힘이 모이기 어렵다. 외부에서라도 이를 추동하는 자극을 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지역 사람의 입장으론 활동가들이 전국을 순회하다 옥천에도 한 번 들르면 우리 동네에서도 기후 정의라는 의제에 불이 붙을 것 같은데 매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만 하니 지역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
지역 언론인으로 살면 매일 우리 마을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텐데, 소진된다고 느낀 적은 없나, 있다면 어떻게 소진의 상태를 받아들이나.
이 일 자체가 내게 잘 맞는다. 에너지를 갉아먹는 면도 분명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듣는 게 재밌어서 정신적인 부분이 충만해진다. 오히려 소진은 다른 데서 온다. 회사가 잡지 제작 외의 다른 일을 계속해야 하니 자잘하게 챙길 것들이 많은데 나와 완전히 맞는 일은 아닌지라 소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몇 달을 취재 현장엔 거의 못 가고 내내 사무실에서 실무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부러 동네 분들을 만날 수 있는 현장 취재를 잡아 균형을 맞추는 편이다.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 청년으로 살아가면서 각각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교차하며 스스로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입장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월간 옥이네〉 같은 경우도 여성을 비롯해 다양한 연령대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표지 그림이나 지면에 실리는 사진, 취재원 역시 편중되지 않도록 노력 중이다. 가령 마을 취재를 가면 이장님의 얘기도 듣지만, 그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회의에서 이야기하는 식이다. 내가 여성이기에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 역시 있겠지만, 꼭 나의 정체성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기자로서 약자의 이야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체성과 크게 관련이 없더라도 농업이나 농촌, 동물권 등 다양한 주제를 담으려고 한다. 육류 사진을 지면에 싣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동물도 ‘마리’가 아닌 ‘명’으로 표기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인터뷰할 때 ‘학생’이나 ‘양’, ‘군’ 등으로 부르지 않고 ‘씨’라고 쓴다. 지면에서만큼은 조금 더 공식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당시에 옥천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그 호는 길벗체*를 사용했다. 최대한 여러 약자의 정체성을 지면을 통해 드러내려 노력하는 중이다.
*길벗체: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여섯 색 무지개가 담긴 영문 서체 길버트체의 한글판으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성별, 장애, 출신 국가, 나이, 성적지향 등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응원을 담아 만들어진 서체다.
어떤 이야기에, 어떤 말을 품은 사람에게 유독 마음이 쓰이나.
지역에 있으면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제일 많이 듣는 게
“내 얘기가 별거 없다”는 말이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짧은 인터뷰를 하더라도 멋진 문장으로 잘 써드리고 싶다. 어떻게 보면 그분들의 삶에 드리는 헌사일 수도 있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게 유일한 기록일 수도 있기에 그런 이야기에 마음이 많이 간다. 또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좋다. 투쟁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무언갈 변화시키려는 이들,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좋다.
기자로서 인터뷰를 요청하다 보면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나’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자에겐 어떤 윤리가 필요할까.
듣는 것 자체가 연대이자 환대라고 생각한다. 듣고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겸손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잘 견지하고 싶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고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다. 위치성이 생긴 순간부터 듣는 자와 말하는 자 사이에 모종의 위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부러 인터뷰이와 내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어필하려 한다. 인터뷰이가 “사는 게 별거 없죠”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나도 비슷하다고 말하는 식이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식의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
예전엔 형편이 어려운 분들의 상황을 르포로 써야 할 때 내가 자극적으로 쓰진 않을지 항상 경계했다. 그게 대중이 열광하는 방식일진 몰라도, 인터뷰이에게 예의가 아닐뿐더러 듣는 사람의 윤리는 더욱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거고, 우리가 동등한 사람이라서, 당신의 문제가 곧 내 문제이기에 내가 듣는 거라고 다만 생각했다. 내 문제이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들을 더 알고 싶다고 마음먹고 물을 때 당신 곁에 서고 싶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느낀다.
기사 하나하나가 구술 기록처럼 느껴진다. 약 한 달 전 공개된 오송 참사 기록집, 『나 지금 가고 있어』(2024)는 어떤 마음으로 임한 작업인지 궁금하다.
오송도 넓게 보면 충청북도고 지역에서 일어났기에 참사 초기부터 주목도가 떨어진 데에 안타까움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오래 회자될 수 있던 이유는 유족분들이 정말 열심히 활동하신 것도 있지만 그 활동들이 잘 기록됐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오송 참사도 비슷한 맥락에서 누군가 기록하고 그걸 함께 나누고 이야기해야 계속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하던 참에 작년 3월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유혜정 센터장을 인터뷰했다. 그때 오송 참사가 곧 1주기인데 관심이 적어서 신경 쓰인다는 얘기를 나누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여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5월 내내 인터뷰를 다녔다.
지역에 살면서 기록 활동을 계속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있기까지는 나의 선택뿐만 아니라 여러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월간 옥이네〉 창간 전엔 〈옥천신문〉에서 오래 일했다. 〈옥천신문〉은 주민들이 애정과 질책을 통해 키워온 신문이다. 그곳에서 일을 배우며 좋은 언론과 지역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잘났다기보다 옥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게 마음의 빚처럼 남았기에 지역에서 내가 힘을 보태야 할 순간이 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어릴 땐 훌륭한 사람, 좋은 어른, 천재 기자와 같은 꿈이 있었다. 그러나 30살이 됐을 때 주위에 엄청 훌륭한 사람들이 없는 걸 보고 어린 시절의 꿈은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좋은 기자도 천재 기자도 아니고, 좋은 어른도 훌륭한 사람도 못 된 것 같아 방황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그냥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향해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배반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