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호에서는 두 편의 영화와 두 편의 책을 소개합니다.

영화 《조커 2: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 2024.

홍인표 기자(han0727@snu.ac.kr)

  조커가 뮤지컬 영화로 돌아왔다. 전작에서 조커가 사회와 어우러지지 못함을 맥락 없는 웃음으로 나타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쉴 새 없이 돌발하는 조커와 할리 퀸의 듀엣 노래가 그 효과를 탁월하게 대체했다. 소외된 두 존재는 음악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흐름을 정지시키고 주위를 소외시킨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친 당신을 미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공유돼 나타나는 정신장애를 뜻하는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조커와 할리 퀸의 연대를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광기는 연대할 수 있나.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나. 아서 플렉의 광기는, 왜소하고 순박한 아서와 광적이고 폭력적인 조커의 분리 불가능한 공존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할리 퀸과 대중은 그 분열된 총체 속에서 나약한 아서는 지우고 조커만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아서는 어떤 사랑을 받든, 어떤 열광을 받든, 이해받기를 거듭 실패한다. 검사 측과 변호사 측 어느 쪽이 승소하든 형벌을 받는 조커. 이 영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비극이다.

영화 《룩백》
오시야마 키요타카, 2024.

이다빈 기자(qlsekdl11@snu.ac.kr)

  단조로운 세상을 익살스러운 만화로 꾸며나가던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는 낯선 세상을 익숙한 만화로 덧칠해서 볼 수밖에 없던 동급생 ‘쿄모토’의 작품을 마주하고 크게 좌절한다. 그 좌절로 인해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기까지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식 날 쿄모토를 운명적으로 조우하면서 후지노는 역설적으로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후지노는 쿄모토의 작화 실력을 시샘하고, 쿄모토는 후지노의 상상력을 동경하며 함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앞서나간 상대의 등을 좇기 위한 마음을 담아 필사적으로.

  관객들은 작품을 보는 내내 서로 등을 보며 시샘하고 동경하는 시간이 사실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랜 시간 함께 의지하는 시간임을 실감한다. 상대의 등이 얼마나 거대한지 보기 바빠 자신의 등으로 상대의 등을 밀어 전진할 수 있게 도와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지도 모르지만, 그 등의 기억이 있어 둘은 혼자서도 펜을 내려놓지 않을 수 있었다. 작고 네모난 한 컷에 꼭 맞아 들어가는 꿈을 짊어지던 두 사람의 등은, 언제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꿈을 향해 질주한다.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주디스 버틀러, 시대의창, 2016.

손원민 기자(dnjsals1203@snu.ac.kr)

  ‘가자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다.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에 대한 비판은 번번이 유대인 혐오라는 말에 가로막히곤 한다. 이처럼 믿기 힘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것이 믿기 힘든 일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찾게 된다. 그 정확한 목소리가 이 책에서 구현된다.

  버틀러는 시온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에 대한 비판이 “반유대적인 것도, 항유대적인 것도 아님”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상에서 함께 살 이들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인간의 조건은 차이를 차이로서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요청하는 정치적 요구로 이어진다. 폭력으로 얼룩진 현실에서 윤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버틀러의 목소리를 빌려 답해본다. 

  “현실 정치력이 없다는 이유로 평화주의를 불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도대체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떠오르는 숨: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
알렉시스 폴린 검스, 접촉면, 2024.

천세민 기자(chunsemin011@snu.ac.kr)

  중립성과 객관성의 환상을 앞세운 과학의 언어 속에서, 인간 사회를 그대로 투사한 채 지어지는 해양 포유류의 이름은 그들의 고유함과 관계 맺음을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해양 포유류에게 보내는 서간문이란 형식을 통해 편협한 기존 언어가 가둬온 이들 존재를 낱낱이 드러내고, 해양 포유류와 흑인 해방 운동이 가지는 연대와 생존의 가능성을 호흡이란 공통된 행위에서 발견한다. 

  1971년 베링해에서 발견된 거대한 해양 포유류는 그를 사냥한 이의 이름이 붙어 ‘스텔러바다소(Steller’s sea cow)’라 불렸다. 그러나 언어는 관계 속에서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다. 굳이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그대의 숨을 기억할 단어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가령, 당신 “피부의 거칠기, 경계의 두터움, 지방의 따뜻함” 그리고 “침묵과 호흡, 더 멀리, 더 깊게 듣기”. 그렇게 우리는 잘못된 이름을 깨부수며 종을 넘어 서로의 친족이 되고야 만다. 비로소 숨을 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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