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무나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다
▲부산 영화의 전당

  작년에 부산에서 온 편지(181호)를 기억하시나요. 앞으로도 영화의 축제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내년에도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이만 총총 줄입니다. 2024년, 올해도 어김없이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찾아왔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구절에 답장을 쓰기 위해, 부산에서 오는 편지는 올해도 이렇게 다시 출발합니다. 이번의 부산국제영화제는, 또 그것을 겪고 온 기자의 체험은 어떻게 다를까요.

축제는 준비가 더 힘들어

▲부산 영화의 전당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2일 개막식을 올렸습니다. 10월 11일까지 상영된 224편의 상영작들은 63개국으로부터 날아왔습니다. 작년보다 15편 더 많은 작품 수입니다. 국가보조금이 절반으로 줄었음에도, 집행위원회는 자체 재원을 최대한 조달해 더 풍부한 상영작과 프로그램을 준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제의 시작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일반 예매 과정에서 서버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영화는 긴 버퍼링 끝에 결제가 안 되기도 했고, 결제는 됐지만 예매가 안 된 오류도 확인됐습니다. 영화제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항의와 문의 댓글이 빗발쳤고, 영화제 측은 익일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뒤 환불을 진행했습니다.

  문제는 돈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놓치는 것. 영화제는 예매 시간이 정해져 있고, 경쟁이 치열해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계획 전체가 망가집니다. 2년 전에도 예매권 결제 오류로 인해 2만 석 정도의 예매가 취소된 적이 있는데, 올해도 최소 1,300명의 예매 오류가 생긴 것으로 파악됩니다. 2년 전 사건으로 서버를 증설했는데도 문제가 재발한 셈입니다.

  영화제 측은 환불 외에도 보상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고, 서버 안정화를 위해 타 영화제들과 예매 시스템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전산화된 예매 시스템은 늘 서버 과부화와 디지털 문해력 문제 등의 잡음을 발생시킵니다. 그 잡음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내년에는 관람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기를 바라봅니다.

▲취소표를 애타게 잡는 관객의 손

  영화제에 가기도 전인데 벌써 얼마간의 피로가 앞당겨 찾아옵니다. 사실 영화제를 가기 위해 준비하는 일은 원래 품이 많이 듭니다. 쟁쟁한 예매도 예매지만, 부산에 거점이 없는 사람이라면 미리 기차표와 숙박 시설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첩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기차표는 금세 매진되고 영화제 인근의 숙소는 만실이 되고 맙니다. 여러모로 계획적이지 못한 제게는 영화제를 즐기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들이 고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해마다 영화제로 되돌아오는 것은 영화의 경험이, 특히 영화제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꿈들이 어지러이 뛰노는 축제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습니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역방향의 열차 좌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보면, 끊임없이 일상은 배후로 밀려나고 저는 어디론가 먼 곳으로 끌어당겨집니다. 그렇게 주위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시에 맞은편의 종착지에 마침내 다다르는 이 여정은, 어쩐지 영화의 은유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 역시 세상의 빛으로부터 물러나, 암실 속에서 다른 세상의 빛으로 접속하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다른 시공간을 제안하며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영화제에서는 이런 경험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영화제에서 평소에 수입·배급되지 않는 상영작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지루하지만, 어떤 영화는 기적처럼 찾아와 희열을 선사합니다. 평소에 개방되지 않던 갱도에 구불구불 힘겹게 들어가 우연히 숨은 보석을 찾는 것처럼요.

  그들은 다시 극장에서 개봉되지 않을 확률이 높고, 그 때문에 관객으로서 이런 경험은 무척이나 각별해집니다. 보통 영화는 시간에 대한 승리처럼 느껴지지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말했듯 영화는 특정 시간을 각인해 얼마든지 되감고 멈출 수 있는 매체니까요. 하지만 영화제의 영화는 다른 시간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마치 목정원 작가가 산문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2021)에서 공연 예술을 묘사한 것처럼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같습니다. 훗날 이 영화를 영영 만나볼 수 없을지 모르므로, 관객은 단순히 영화의 관람객이 아니라 이 영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목격자의 위치를 부여받기도 합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다큐멘터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들은 단숨에 인식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극영화 이상의 정동적·인지적 충격을 남기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될 확률은 극영화보다 더 높아지지요.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올해 다큐멘터리들을 더 많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최초로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선보입니다. 경쟁 부문에 오른 10편의 다큐멘터리 중, 관객들의 투표를 받아 선정된 한 작품에 1천만 원의 상금을 시상하는 제도입니다.

  신설된 제도에 걸맞게, 올 영화제에도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들이 많았습니다. 꿈만 같은 경험들이지만 꿈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때로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침실 같은 영화관을 나오면, 저 안에서 생생했던 촉감이 거짓말처럼 차츰 흩어지고 귀환해야 할 현실이 금세 육박하기 때문입니다. 아침 빛이 꿈꾸던 순간과 깨어있는 순간을 칼처럼 가르듯이요.

▲영화제 상영관 스크린

  하지만 정말 좋은 영화는 꿈과 현실이 서로를 간섭하게 만듭니다. 때로 둘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며, 어떤 꿈은 현실보다 더 생생해서 잠들지도 못하게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다큐멘터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상영되는 이 꿈은 사실 누군가, 어딘가 지극한 현실의 재구성이니까요. 그러므로 상영관을 나와서도 상영시간은 지속됩니다.

  꿈 일기를 적는 사람처럼, 영화관의 암전 속에서 손가락의 감촉에 의지해 이리저리 메모를 끄적였습니다. 영화관 바깥에 나와 펼쳐본 노트의 글자들은, 행간을 지키지 않고, 끔찍한 악필이며, 서로 어지러이 덧써지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보지 못한 네 편의 영화에 대해, 저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남긴 기억을 토대로, 이렇게 다시 지연된 오감의 기록을 남깁니다. 소격과 왜곡이 삼중으로 겹친 제 목격담은 잔뜩 구겨졌겠지만, 그 잔금마저 열렬했던 축제의 시간을 말없이 증언하는 또 하나의 지표라고 우겨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영화,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시작부터 수작이라니, 운이 좋았습니다. 벤자민 리 감독의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마츠의 이중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마츠는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유전 질환 보유자로, 살아가는 내내 근육이 퇴화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칩니다. 움직일 수 없던 마츠는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만 지냈습니다.

▲마츠의 어릴 적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가족들은 마츠가 운영한 인터넷 블로그에 부고를 알리는데, 수많은 인터넷 조문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츠가 실은 역할 수행 게임(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이벨린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과 친해지고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요. 그곳에서 사랑을 했고, 많은 관계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는 것을요.

▲자신의 명함을 보고 있는 이벨린(오른쪽)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절반은 마츠의 생전 영상을 재구성하지만, 절반은 게임 속 이벨린의 현실과 연대기를 보여줍니다. 이벨린의 행적과 대화는 모두 서버에 보존돼 있어, 그의 삶은 ‘소스 엔진’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됩니다. 마츠만을 봤던 사람은 절대로 짐작하지 못했을, 이벨린의 다채로운 역할 수행이 이 RPG 속 현실에서 펼쳐집니다.

두 번째 영화, 《마지막 해녀들》

▲《마지막 해녀들》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크레딧 롤이 올라가기 시작하자마자 열렬한 박수가 터졌습니다. 수 킴 감독의 《마지막 해녀들》은 제주도와 거제도의 해녀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해녀라는 직종이 겪어온 변천사를 짚으며, 해녀들의 자긍심 넘치는 일상을 풍부하게 담아냅니다. 90세를 넘긴 할머니 해녀도 지칠 줄 모르고 약속한 듯 바다로 계속 돌아옵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해녀들에게 노동이자 놀이이며, 자유로운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거제도에서 물질을 하는 정민과 소희 해녀는 이른바 ‘MZ’ 해녀로서, 제주 바깥에서도, 또 젊은 사람도 해녀를 할 수 있다는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이 해녀들이 마지막 세대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는 단순히 해녀 인구의 고령화 때문이 아닙니다. 바다에 생태학적인 위기가 육박함에 따라 해녀들의 무대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상승하는 수온 속에서 이전에 보였던 해양 생명체들의 종류와 개체수는 날이 갈수록 급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해녀들》 관객과의 대화. 이금옥 해녀가 직접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있다.

  동시에 올해부터 시작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오염수 방류 역시 제주 바다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맞서, 제주도와 거제도 해녀는 연대해 규탄 집회를 벌이기도 하고, 제주도 특유의 문화인 큰굿을 열기도 합니다. 장순덕 해녀는 제네바의 국제연합에 가서 연설문을 읽고 오기도 합니다. 이렇듯 영화는 해녀들이 고유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떻게 정치화되는지 흥미롭게 포착합니다.

세 번째 영화, 《블랙 박스 다이어리》

  현재 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이 된 이토 사오리의 긴 싸움은 2015년에 시작됐습니다. 원치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정치부 기자로 발령 예정이었던 사오리는 TBS 야마구치 국장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습니다. 사오리는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지만, 상위 권력의 개입으로 피의자는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오리는 2017년 스스로 성폭행 피해자임을 공개하고 재수사를 촉구했습니다. 사오리의 싸움은 다중적이었습니다. 상대에게 적법한 처벌을 요청하는 법적 공방. 그 상대를 감싸는 권력 구조와 현행법과의 투쟁. 또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와의 마찰.

▲《블랙 박스 다이어리》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사오리는 범죄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를 가릴 데 없이 모아야 했습니다. 진실을 흡인하고 은폐하는 일본 사회의 블랙박스를 개방하기 위해, 사오리는 자신만의 블랙박스를 구축합니다. 이를 나타내듯 영화의 형식은 CCTV 영상, 인터뷰 영상, 짧은 푸티지, 기록용 촬영, 내레이션 등 다양한 파편들의 절박한 짜깁기로 이뤄집니다. 사오리는 기자이자 피해자로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진실을 구축하는 동시에 그 피해자의 경험을 온전히 직면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기-영화는 사오리의 서사적 진실뿐 아니라 감정적 진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오리는 이 기록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해 조심스레 공개합니다. 그들을 포옹하는 따스한 담요이자 그들이 참고할 치열한 선례로서.

네 번째 영화, 《몽골말 죽이기》

  마지막으로 극영화를 하나 소개하려 합니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이나’는 위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해마다 심해지는 기후 위기에 목초지는 사라지고, 자본에 포섭된 초원은 관광지로 변해갑니다.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타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시내 유치원에 가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사이나의 유목민 정체성은 이런 시대적 압박에 의해 서서히 붕괴합니다. 사이나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는 기마술은 공연이나 승마 체험 등 특수한 오락의 영역으로 전락합니다.

▲《몽골말 죽이기》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극영화라고는 하지만, 실상 다큐멘터리와 다름없습니다. 쟝샤오쉐엔 감독의 친구인 사이나가 직접 영화의 사이나 역을 맡았으며, 사이나는 실제로 내몽골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몽골식 기마 공연은 세세한 고증을 마쳐 영화에서 생생히 재현됩니다. 영화는 기후위기와 자본주의라는, 우리가 모두 당면한 시국이 내몽골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여줍니다.

부산역에서

▲붐비는 부산역 풍경

  어느덧 사흘 간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에 와있습니다. 붐비는 인파 속 과연 몇 명이나 저처럼 영화제를 위해 부산을 찾아왔을까요.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CGV 센텀시티, 영화의 전당 등 관객들로 붐벼 앉을 틈 하나 없던 풍경이 겹쳐 보입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축제에 찾아온다는 것이 때로는 놀랍습니다.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보는 일만으로 채워진 체험만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해결해야 했던 부실하거나 만족스러웠던 각각의 끼니들. 값싼 숙소에서 나오면, 따스한 아침볕을 껴입고 수영역 로터리를 분주히 걷던 사람들. 영화와 영화 사이 뜨는 시간에 허겁지겁 밀린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찾아다니던 카페들. 밤이 되면 부산으로 내려온 친구들과 술도 마셨고, 많은 대화들이 떠돌았고, 해운대의 순한 물살에 발도 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광명역을 향하는 KTX에서 이번에는 순방향 좌석에 앉아 갑니다. 잠시나마 등졌던 익숙한 시공간을 향해 시속 330km의 속력으로 귀환합니다. 할 일들을 해야 할 시간. 백지 같은 워드 프로세서를 열고, 내가 문을 열고 엿보고 왔던 꿈들을 글자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내년에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영화제가 열린다면, 우리는 약속을 잡지 않아도 내년 부산에서 마주치게 되겠죠. 그때 또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흥분으로, 서로가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 증언해요. 그렇다면 이만 줄이겠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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