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고르고 함께 살자고

  지난여름, 운이 좋게도 베를린에 한 달 정도 머무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느 관광객처럼 명소를 둘러보고, 여러 박물관에 되는대로 발걸음을 옮겨보고, 배웠던 독일어 표현을 어색하게 써보고, 마트에서 재료를 사 직접 요리를 해 먹어보고…. 돌아보니 잊히지 않는 일투성이지만, 이상하게도 제게는 기숙사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호수의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건 제가 그 호수에서 처음으로 물에 떠보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원래 물속에서 발을 쉽게 떼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그리 불안했는지, 수심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발이 충분히 닿는 실내 수영장에서조차 몸에 힘을 잔뜩 주기만 해서 구명조끼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가늠하기도 어렵고, 언제 발에 나뭇가지가 차일지 모르는 낯선 베를린의 호수에서 물에 붕 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게는 아등바등하다 물에 둥둥 떠오르게 된 순간이, 시야에 들어온 나뭇잎과 구름을 마주한 때가, 귀가 물에 잠겨 바깥의 소음이 먹먹하게 들렸던 길고도 짧은 시간이, 그러니 그간 집중해 본 적 없던 제 호흡에 오롯이 귀 기울일 수 있었던 몇 분 동안이 아주 선연히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 물 위에 떠 있으려면, 생각을 멈추고 힘을 완전히 빼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으려다가도 무언가 불안해 힘을 주려는 순간 몸은 가라앉고 맙니다. 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몸에 약간이라도 힘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물을 먹게 되기도 합니다.

  숨을 고르고 아주 잘 호흡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내 목소리가, 내 아픔이, 때론 내 존재까지 모조리 삭제되고, 노동의 자리가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그 가치가 무시되며, 이전처럼 살 수는 없다고 외치는 이들이 발붙일 땅을 뺏기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힘이 지극한 현실의 네모난 틀에 갇히고, 결국은 모든 게 내 탓이 돼버리는 시대에서 자꾸만 숨이 벅차옵니다. 그럴수록 잔뜩 긴장한 몸에 힘을 빼고 숨을 잘 고르고 제 호흡에 집중하며, 다시 숨을 터야 함을 떠올립니다. 밥을 챙겨 먹고 잠을 자고, 힘들 땐 손을 내밀어 함께하는 이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함을 되새깁니다.

숨 가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모두가 숨 돌릴 구멍을 찾고자 한 마음들이 이번 호에 모였습니다. 어떤 선택을 내려도 불안하고, 어디서든 쉽게 초조해지고, 어려움 답답함 속상함 두려움 어지러움을 잔뜩 끌어안고 홀로 살아가는 이들의 초상을 들여다보고 함께 미래를 바라봤습니다. 그래, 결국 서로 손 잡고 숨 쉬고 싶은 바람을 187호에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숨을 고르고 함께 삽시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187호의 미련

Next Post

어지러운 세상에 떳떳한 글을 써낸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