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끝내지도 보내지도 못한

한성용 (국어국문 23)
오직 저만이 해야 하는 문학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문학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놓고 싶지 않아서 계속 읽고 조금이라도 쓰려 합니다.

※한강 작가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이탤릭체로 구분했습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들 마음도 없이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내일이 찾아왔지만 어제를 보내지 않았으므로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하룻밤의 꿈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의 환호와 축하가 거대한 물결을 이뤄 퍼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바다 건너 날아온 소식 하나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일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 모든 정황에 앞서, 그와 무관하게도 출렁여 넘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건 국문학도로서 ‘K-문학의 쾌거’를 맞이했다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한국이 비로소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고양감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청소년기 내내 내가 집요하게 사랑하고 치밀하게 파고들었던 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불가결한 일부를 구성하는 존재를 이렇게 모두가 연호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혼자서만 상상해 본 막연한 미래가 이토록 빠르게 현재가 돼 도래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국인’이 아닌, ‘내가 읽어왔고 나를 만들어 온 한강’에 대한 글일 수밖에 없다. ‘국뽕’도 ‘국문과 프라이드’도 없이 이 순간 나의 기쁨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애초에 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곳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갓 문학을 읽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어느 휴일 『소년이 온다』(2014)를 한달음에 읽고 울음을 쏟은 게 화근이었다. 그날 이후 국문과를 지망하게 된 나의 아이돌은 줄곧 한강이었다.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인터뷰와 사진과 글과 음성을 모으고, 팬레터를 써 들고 낭독회에 가고, 그의 새로운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청소년기가 흘렀다. 무엇이 왜 그리 좋았는지, 그 좋음이 어떻게 여전할 수 있는지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래도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첫사랑을 한번 떠올려 보라고 했다. 이건 아직 끝내지도 보내지도 못한 첫사랑이라고. 시간이 흐르며 주변 상황도 나의 취향도 바뀌거나 확장됐지만 읽고 쓰는 일의 처음에는 명실상부 그가 자리했다. 그는 변화와 탈중심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내가 꾸준하게 고집해 온 단 하나의 중심이었다.

  중심으로 간주된 것이 별안간 흔들리는 체험은 한강 소설의 인물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예컨대 『희랍어 시간』(2011)에는 안과 질환으로 시력이 차츰 감퇴해 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와, 실어증이 찾아온 뒤 희랍어를 공부하는 수강생 여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실명과 실어라는 단어가 잃음(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해서 이들의 장애나 질환이 곧장 불행으로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여생이 상실에 맞서는 ‘하나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을 거부한다. 한 사람은 볼 수 없고 다른 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단둘이 남겨진다. 서로 소통하기 위해 둘은 잃어버린 중심을 되찾으려 투쟁하는 대신 부재하는 중심을 메우지 않고도 매만진다. 취약성에 기반한 연결이라는 개념은 이제 낯설지 않지만, 그것이 인간을 껴안는 지극한 사랑의 경지에 이르는 찰나는 거의 기적적이다. ‘생명이 우리에게 있었던’ 일 자체가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듯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물론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는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작가의 말을 의식한 것이다. 그 기도는 ‘이것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같은 단언보다 간곡해서 더 위태롭다. 이 소설을 단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로 보는 독법이 섣부른 탈정치화라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에 한해서라면 나는 담론의 생산성이나 비평적인 가치 같은 것에 냉담하리만치 무관심하다. 설사 무비판적이고 싱거워 보일지라도, 그가 지극한 사랑을 썼다면 나는 그것을 읽어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무슨 부당한 편애냐고 따져 물어도 사실이기에 반박할 길은 없다. 시작부터 치우친 사랑이었기에 애당초 올곧을 수가 없었노라고 시인할 수밖에. ‘조금씩 몸을 뒤채이며 달팽이처럼 전진’하며 소설을 써온 그를, 나는 주로 뒤에서 때론 곁에서 따라왔으니까. 그의 30년 이력으로 따지면 뒤늦고도 짧지만, 나의 20년 생애로 따지면 이르고도 긴 7년 동안 그래왔으니까.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두 번째 소설집을 묶으며 그는 한 사람의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 데 7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고 했다. 테세우스의 배 같은 본질에 대한 논의는 제쳐 두더라도 『소년이 온다』를 읽고서 탈진했던 중학생과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다. 아마 7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들을,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끝나지 않은 오늘의 첫사랑을, 끝끝내 고집할 하나의 중심을, 끝까지 그걸 파고드는 지극함을 곱씹는다. 일상에 치여 한동안 돌보지 못해도 쉽게 잃어버릴 마음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사라지지 않고 잠시 웅크렸다가 늘 그랬듯 적당한 때에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으니까.

  다시 10월 10일의 그 밤, 내 안에서부터 출렁이며 차오르던 파도는 몸 밖까지 넘쳐흘렀다. 포말이 되어 부서졌다. 도저히 걸맞은 이름을 붙일 재간이 없어 나는 그걸 뻐근한 통증에 비겼다. “심장이 썰리는 것 같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는데 그 순간엔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반복하건대 그건 국문학도로서의 통쾌감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족감도 아니었다. 온몸과 마음으로 나는 다만 느끼고 있었다. 적당한 때를 맞아 돌아왔구나. 이번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겠구나. 전혀 몰랐지만 이미 알고도 있었지, 하고. 말마따나 ‘온 나라의 경사’라는 노벨상 수상을, 말하자면 ‘첫사랑이 n번째로 귀환한 사태’로 심각하게 찌그러뜨린 셈이다.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고백이 이런 번듯한 지면을 얻어도 될지 내내 골똘했다. 이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돌이킬 수 없이 사랑해 버린, 흔해 빠진 동시에 유일무이한 이야기라서. 오롯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도 아니고 그러길 기대한 적도 없다만 이것만은 힘주어 적어둔다. 활자와 지면을 통한 독서라는 비효율적인 만남이, 경우에 따라선 그 어떤 대면보다도 강렬한 조우가 된다고.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읽고 외우고 사랑하는 일은, 이 세계를 겪고 배우고 살아가는 일과 언제나 맞물린다고. 그 대상과 내용은 당연하게도 천차만별일 거라고. 그러니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모두에게 기쁨이라면, 그건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각기 다른 모양의 뜻과 마음을 지녀서일 거라고.

  그리하여 그 밤의 소식이 우리 모두의 한강을 자랑스레 부르짖는 떠들썩한 축제의 서막이기보다는, 저마다가 각자의 한강과 만나 나눌 설레지만 조금은 차분한 대화의 계기라면 좋겠다. 전례 없이 넘치는 환희의 물결에 누구보다 흠씬 젖어버린 주제에 나는 질투하듯 그것을 바란다. 여전히 나는 이 첫사랑을 끝낼 줄도 보낼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참고문헌]
한강, 『내 여자의 열매』(개정판), 문학과지성사, 2018, 405면.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386면.
한강, 「작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18, 46면.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329면.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5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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