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로 적은 편지

조해진, 『빛과 멜로디』, 문학동네, 2024.
▲『빛과 멜로디』(2024) 표지ⓒ문학동네

※본 기사는 소설 「빛의 호위」와 『빛과 멜로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3년, 조해진 작가의 손에서 태초의 스노볼 하나가 빚어졌다. 태엽을 감으면 짧은 시간 동안 눈이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조그만 스노볼. 이야기가 끝나도 자꾸 다시 태엽을 감아보게 되는, 책을 덮고도 눈을 감고 눈이 소복이 쌓인 세상을 그려보게 만드는 단편소설 「빛의 호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2024년, 작가는 같은 세계관에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담아 『빛과 멜로디』란 두 번째 스노볼을 선보였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또다시 ‘승준’과 ‘은’의 시간을 상상하게 만들었을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스노볼을 다시 만들었을까.

▲『빛과 멜로디』(2024) 표지ⓒ문학동네

  단편소설 「빛의 호위」는 주인공 승준의 미숙하고 서툴렀던 호의가 어떻게 은의 삶을 호위하는 구원이 됐는지 짧고 나직하게 노래했다. 부모도 오지 않는 작고 어두운 방에서 죽음만을 상상하던 어린 은에겐 태엽을 끝까지 감으면 1분 30초가량 눈이 내리고 노래가 나오던 스노볼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러나 승준이 아버지의 반자동 필름 카메라를 훔쳐 은에게 선물하면서, 은은 세상 곳곳의 빛을 좇는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작품은 그로부터 23년이 흘러 유망한 분쟁 지역 사진가가 된 은과 그런 은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터뷰 기자 승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반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분쟁 지역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후에야 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 승준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깨닫고 심란해한다. 그러나 은은 자신이 블로그에 묵혀뒀던 편지를 보여주며 감사를 표한다. 작고 어린 선의가 눈덩이처럼 불어 누군가를 살리고,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호의의 순환 속에서 작가는 “태엽이 멈추고 눈이 그친 뒤에도 어떤 멜로디는 계속해서 그 세계에 남아 울려퍼지기도 한다”는 걸 독자들이 기억하게 만들었다.

  『빛과 멜로디』는 「빛의 호위」를 조각내 이야기의 뼈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다리를 잃은 이후의 삶을 사는 은과 가정이 생긴 승준의 삶을 보다 곰곰이 담아낸다. 승준과 은의 삶엔 둘 이상의 더 많은 존재들이 함께 얽혀 돌아가고 있다. 은이 영국인 ‘애나’의 지원으로 레스보스섬 난민캠프에 홀로 남겨져 있던 ‘살마’를 도와주고, 승준이 러시아 침공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의 임산부 ‘나스차’를 인터뷰하면서 나스차의 삶은 승준, 승준의 아내 ‘민영’ 그리고 은과 은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연결된다. 이로 인해 소설 속 발화자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영국, 한국 등 곳곳의 기억을 가진 인물들로 끊임없이 교체되고, 각자의 기억과 영향 관계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다.

  사람을 살리는 사진이라니,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어. 사진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이전에 매번 나를 먼저 살게 했지.

  그러나 그들은 모종의 죄책감과 부채감 속에서 자신의 다정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단 점에서 공통된다. 은은 살마를 만난 이후 자신의 사진이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편집한 것에 불과한 사각형의 파일 하나, 혹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단 회의에 빠지고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승준은 거창할 것 없는 자신의 호의가 은의 왼쪽 다리를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은처럼 적극적으로 타인을 위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간다. 나스차는 출산할 아이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떠나오면서, 민영은 딸 ‘지유’를 기르면서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좌절한다. 모두는 각자의 “순도 높은 간절함”을 지키기 위해 고투하면서도, 그 고투가 사려 깊을수록 진심과 위선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결하지 못한 마음을 질책한다.

  이는 ‘나’의 선의가 ‘너’ 하나에게 닿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편해질 수 없는, 복잡하고도 아픈 다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정한 마음은 본디 아픔에서 비롯되기에, 이 소설을 비로소 다정한 소설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아픔으로 타인의 아픔을 읽어내고, 다정함의 근원과 발현 모두 의심하면서도 끝내 타인에게 손을 뻗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연대가 겹치면서, 『빛과 멜로디』는 이전 소설에서부터 이어져 온 무결하지 못한 선의의 소중함을 더욱 간절히 역설한다.

  겨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2023년 가을부터 2024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서 연재됐던 『빛과 멜로디』의 원형이 되는 소설의 제목은 ‘빛의 영원’이었다. 11년 전의 마음을 이어받아 다시 적힌 소설은 언제나 ‘영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편소설을 집필할 시기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장편소설을 집필할 시기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끝없는 무정의 세상에서, 작가는 한 번 태엽을 감았던 스노볼을 다시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육박하는 현실에서 감각하고 있는 이 허무와 무력감은 영원할 것이기에.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영원은 ‘빛’의 속성이자 가능성이었다. 누군가는 위태로운 다정함에서 비롯된 호의를 받게 될 거란 것을, 그리고 그 호의를 이어받은 또 다른 호의가 뻗어가는 과정 역시 영원하다는 것을 지치지 않고 말해야 했다.

  은은 승준의 요청에 따라 지유를 위한 편지를 쓴다. 승준은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하고 다정한 은의 목소리를 딸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지만, 은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걸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결국 은은 승준에게 편지를 썼던 최초의 순간처럼 아주 작은 다정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작성한다. 한 송이의 눈처럼 유약하고 조그만 마음이 담긴 편지는 마치 눈물로 젖은 편지 같기도 하지만, 은의 마음은 증발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이어진다.

  누군가의 눈송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눈송이로 이어지는 영원의 과정 속에서, 작가가 두 번째로 만든 스노볼의 세상에서 눈은 그치지 않는다. 태엽을 감아줄 수많은 손들 사이에서, 세상을 감싸 안을 흰 점들은 펑펑 언제까지고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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