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내가 할게, ‘집안일’은 누가 할래?

하찮음의 맞물림을 깨고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대우하기
가사노동 생산 가치

  바깥일: 집 밖에서 하는 경제적·사회적 활동
  집안일: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

  표준국어대사전 상 바깥일과 집안일의 정의는 위와 같다. 집 안의 일은 무엇이길래 경제적·사회적 활동이 아닌 ‘여러 가지 일’로 규정돼 있을까? 집안일, 즉 가사노동은 어째서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인 활동이 아닐까?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장을 살피며, 가사노동을 차별적으로 다뤄온 사회적 맥락을 돌아봤다.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대우받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일도 아닌 집안일

  집은 주로 일터와 구분되는 휴식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정말 집에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일과 집은 분리돼 있다는 막연한 인식과 달리, 집은 끝없는 일이 요구되는 현장이다. 5인 가구에서 살다 한 달 전 자취를 시작한 20대 여성 A씨는 처음 제대로 마주한 집안의 노동에 대해 “숨만 쉬어도 쌓이는 게 집안일이란 걸 피부로 깨달았다”고 표현했다. 자취 전 A씨의 생활을 지탱하는 가사노동은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주로 도맡았다. 당시엔 집 안에 일이 있다는 것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A씨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중요하고 명백한 사실이 있다. 집 안팎에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집 안의 일을 해내야 한다. 

  누구나의 삶에 필수적인 가사노동은 집 ‘바깥’ 유급 노동의 잔여로 여겨지기 일쑤다. 3년 전 직장을 그만둔 50대 남성 B씨는 20년 넘게 맞벌이 부부로 생활하다 현재 집안일을 도맡고 있다. B씨는 

“하루 종일 애들 밥 챙기고, 설거지하고, 장 보고 하면 다른 거 할 시간이 없다”고 가사노동의 고됨을 털어놓으면서도 “돈을 못 벌고 이러고 있는 게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다”며 가사노동을 유급 노동보다 못한 것으로 바라봤다. 또한 B씨는 20년 동안 아내가 집안일을 더 많이 했던 것에 대해 “그땐 내가 돈을 더 많이 버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급 노동으로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기여하는 바가 정해지면 남는 몫만큼 가사노동이 분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시각이 드러난다.

가사노동 생산 가치

  그러나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매우 크다. 시장 밖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상승하는 배경하에 그 가치를 측정하라는 국제연합의 권고에 따라, 2023년 통계청은 무급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했다. 그 결과 가사노동 가치 총액은 490조 9천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5.5%에 달했다. 그러니 흔히 생각되는 인과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가사노동에 다른 유급 노동과 같은 지위가 부여되지 않은 게 아니라, 가사노동을 가치 있는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사노동은 삶을 돌보고 꾸려나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제시한 

‘그림자 노동’은 유급 노동을 위한 재생산과 재충전의 역할이 강제된 노동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가사노동은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으로, 늘상 당연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져 왔다. 즉 시장에서 돈을 받고 교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중요성과 생산성이 곧잘 간과됐다. 가사노동이 우리의 삶과 경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바를 무시할 때, 가사노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이러한 인식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깎아내린다.

돈 받고 일해도 노동자가 될 수 없는 가사노동자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동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가사노동자는 가사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사노동자는 오랜 기간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고,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1920~30년대에 주로 일본인 가정의 집안일을 맡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남의집살이 여성’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계약관계를 통해 임금을 받으면서도 사회적 차원에서 그 노동력과 생산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19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가정의 인력으로 투입됐다. 이들 또한 ‘식모’, ‘파출부’, ‘아줌마’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명명은 가사노동자를 폄훼해 온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국제노동자기구(ILO)가 2011년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가사노동자협약)’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Domestic Workers’를 번역한 ‘가사노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가사노동자협약은 가사노동자의 노동3권 및 최소한의 근로조건과 최저임금 보장,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 정책 수립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현재 35개국이 협약을 비준하고 자국의 법제도를 제·개정해 노동권을 보장했지만, 한국의 경우 협약 채택에 찬성했을 뿐 국내 비준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가사노동자가 법적으로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시작한 건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근로기준법이 생긴 지 68년만인 2021년,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가사근로자법)’이 제정되며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이 처음으로 인정됐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보장하는 법이지만, 그동안 가사노동자는 근로기준법 제11조의 ‘가사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으로 인해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자는 오래도록 가사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왔지만,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가사근로자법은 처음으로 가사노동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 줄곧 비공식 영역으로 다뤄져 온 가사노동을 공식화했다는 의의가 있다. 법에 따라 가사노동자는 최저임금과 유급휴가, 4대 보험 가입 등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가사근로자법은 근로기준법과 별개로 제정된 특별법이기 때문에,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완전한 사회적 보호망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근로기준법 제11조에 가사 사용인을 배제하는 조항은 여전히 남아 있고, 가사근로자는 별도의 개념으로 분류돼 있다. 따라서 특별법의 규정에 따른 가사근로자는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휴게 시간과 연장 근로 제한을 보장받지 못한다.

  심지어 가사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노동자가 특별법 규정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가사근로자법은 정부 인증 가사서비스 기관에 직접 고용된 가사노동자만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 간의 계약으로 가사노동이 이뤄지거나 정부 인증을 받지 않은 기업에 고용된 경우, 가사노동자는 여전히 법적 보호의 바깥에 놓여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정부 인증 가사서비스 제공 기관은 전체 약 3,400여 곳 중 3%에 해당하는 109곳에 그쳤다. 해당 기관이 직접 고용한 가사관리사는 약 1,800명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추산되는 전체 가사근로자의 1.7%에 불과하다. 

  가사근로자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대다수의 가사노동자는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취약한 근로 환경에 놓여있다. 가사노동이 비공식경제에 머물면서 이 영역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연히 관련 통계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광역시 비정규직지원센터는 이를 지적하며 2022년 「가사노동자 고용 및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가사노동자가 대부분 ▲시간제 ▲호출제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 다양한 비정규직 고용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히며 가사근로자법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지적한다. 

‘하찮은’ 일, ‘하찮은’ 누군가

  가정 내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과 노동시장 내 유급 가사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건 무관하지 않다. 가사노동을 가치 있는 노동으로 바라보지 않는 인식은 오랜 기간 가사노동을 여성이 당연하게 감당하는 일로 여겨온 역사 속에서 형성됐다. 이화여대 백경흔 강사(여성학과)는 “가사노동이 여성이면 누구나 하는 사적인 일로 사소하게 여겨지는 문제는 우연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공모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을 가정에 대한 여성의 자발적인 사랑에 내포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갖는 경제적 가치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본과 특권을 축적해 왔다는 설명이다.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진행되며 공적영역의 임금노동에 비해 사적영역의 무급노동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그 가치가 폄하됐다. 비가시화된 무급 가사노동을 기반으로 ‘바깥’에서 일하며 생계 노동을 하는 남성이라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공고화된 것이다. 아내를 지칭하는 ‘집사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성별분업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사노동은 유급 노동의 그림자에 가려지고, 가사노동을 일방적이고 당연하게 부담해 온 여성들은 생계를 위한 그들의 노력과 기여에도 불구하고 남성 생계부양자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사적영역에서 가사노동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 그렇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영역에서도 가사노동을 ‘하찮은’ 일로 제도화한다. 노동시장에서 가사노동은 공식적 직무 훈련과정이나 승진·승급의 자격조건도 없는 저임금 단순노동으로 취급된다. 백경흔 강사는 이를 “이미 가사노동에 관한 숙련이 상당히 쌓여있을 법한 기혼 유자녀 여성의 전문성에 무임승차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가사노동은 분명 작업 지식이 필요한 숙련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성별화된 전문성에 기대 여성의 본성에 따라오는 단순한 노동으로 평가절하된다는 것이다.

혼인상태 및 맞벌이상태별 가사노동시간 ©빈채현

  오늘날 ‘여성은 집안일만 해야 한다’거나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 굳게 믿는 규범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돌봄은 엄마가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드러내듯, 가사노동을 여성과 당연하게 결부하는 규범은 여전히 공고하다. 권현지 교수(사회학과)는 “여성의 경제활동에는 긍정적이지만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가장 두드러지게 분포해 있는 국가가 한국”이라며 사회에 만연한 모순적 인식을 지적했다.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1999년 이후 성별 가사노동시간의 차이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193시간으로, 남성의 56시간에 비해 3배에 달했다. 혼인상태 및 맞벌이 상태별 가사노동시간을 살펴보면, 맞벌이인 경우나 심지어는 아내의 외벌이인 경우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길다. 경제활동에 관한 전통적 규범은 변했으나, 돌봄에 관한 성별분업 규범은 여전히 남아 여성의 이중 부담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2024) 속 장면 ©넷플릭스

  가사노동을 당연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여성에게 떠맡기는 일은 기술의 발전이나 규범의 제한적 변화에도 짙게 남아 반복된다. 웨스트런던대 교수인 사회학자 헬렌 헤스터는 저서 『애프터워크』(2024)에서 기술의 발전이 가사노동의 시간을 줄이지도, 가정 내 고착돼 있는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지도 못했다고 분석한다. 가전제품의 발달, 스마트 홈 기술 등의 혁명은 가사노동을 ‘하찮은’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하는 규범을 바꾸지 못했다. 같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행했을 때 더 큰 ‘하찮음’을 부여하는 차별적인 맥락도 존재한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2024)에서 남성 출연진은 ‘셰프님’으로 불리지만, 여성 출연진에게는 ‘이모님’, ‘어머님’, ‘아줌마’의 호칭이 따라붙는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더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지만, 여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여전히 ‘이모님’이 된다.

취약함에 취약함을 얹어 떠넘겨버리는 정책

  가정은 모든 사람의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삶의 영역이다. 더불어 가장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젠더와 노동, 자본의 불평등이 얽히는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사노동에 관한 정책은 집 안에서의 개인 생활과 사회적 관계, 심지어는 전지구적 맥락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사근로자법의 시행으로 가사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발걸음을 뗀 지 불과 세 달이 지난 2022년 9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무회의에서 

‘값싼 외국인 육아 도우미’ 도입을 제안했다. 한국에서 돌봄노동자를 고용하려면 월 2~300만 원이 드는 데 비해 싱가포르의 ‘외국인 가사 도우미’는 월 38~76만 원 수준에서 고용할 수 있기에, 출생률 제고를 위해선 외국인 가사 도우미 도입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어 2023년 3월, 조정훈 의원 등 11인은 외국인 가사근로자의 최저임금 적용을 없앤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가사근로자법을 통해 정부 인증을 받은 가사서비스 기관에 고용된 이들에게 최저임금 등을 보장하도록 규정해 놓고, 값싸게 외국 인력을 들여오기 위해 다시 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지금껏 가사노동을 평가절하하고 여성에게 떠맡겨 온 역사를 반복하는 꼴이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논평에서 ‘노동자가 갖는 최소한의 권리인 최저임금제도에서 이주여성 노동자를 배제하고 초저임금 돌봄노동으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은 돌봄노동을 끈끈한 저 밑바닥에 계속해서 두겠다는 정부의 의지’라고 역설하며 성·인종차별적 발상을 비판했다. ‘하찮은’ 가사노동을 ‘하찮은’ 외국인 여성에게 떠넘기며 하찮음의 맞물림을 강화하는 양상이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이용가정 모집 포스터 ©서울시

  시민단체의 반발로 최저임금 적용 배제에 관한 안은 철회됐지만,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을 끝내 추진했다. 그렇게 지난 9월 100명의 가사관리사가 투입됐고, 시행 2주도 지나지 않은 때에 2명이 이탈했다. 이탈 이후 가사관리사의 근무조건으로 논란이 일자, 서울시는 밤 10시 통금이나 외박 금지 규정을 폐지하고 월급제와 월 2회 분할 지급제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백경흔 강사는 “서울시와 고용부가 개입된 정부 사업으로 인식되지만 사실상 관리는 민간 플랫폼 기업이 맡고 있는, 무늬만 공공사업”이라며 “경제적 효율성과 같은 시장가치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하면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가난하고 나이 든 여성으로, 이주여성으로, 더 ‘낮고’ 더 ‘하찮게’ 가사노동을 전가하는 방식은 불평등을 강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취약한 위치로 몰아넣는다. 서울시 사업으로 입국한 가사관리사는 사업장 변경이 자유롭지 않은 E-9 비자를 발급받기 때문에 부당한 근로조건이나 강제 노동에 취약하다. 가사근로자법 제정 이후에도 최저임금 및 노동권을 보장받기 어려운 비공식 노동시장에 놓인 가사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에 대한 보호와 가사노동의 가치 제고가 이뤄지기도 전에 저임금 노동자를 대거 늘리고 있는 것이다. 권현지 교수는 “가사노동이 저임금 노동자들끼리 경쟁하는 영역이 되면서 그 가치가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취약함에 취약함이 중첩되는 모양새다. 

노동과 돌봄의 의미를 다시 상상하기

  누군가에게 돌봄을 모두 맡겨버리면 모든 것이 편해질까? 정부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을 저출생 대응 방안으로 내놨으나, 전문가들은 해당 정책이 오히려 양극화를 야기하고 인구 위기를 가속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백경흔 강사는 “성평등 가치와 돌봄의 중요성이 모두 배제된 채 저출생·고령화 대책이 이뤄지는 건 큰 문제”라며 “우리 삶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돌봄이라는 점을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위기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진단했다.

  가사노동은 개인의 삶과 사회 기능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멈출 수 없는 필수노동이고, 인간이 한평생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돌봄노동이며, 가정 내 감정과 인격적 교류가 요구되는 관계노동이다. 이토록 중요한 노동은 왜 늘 나머지의 자리에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집안일’을 하는 걸까. 

  오랫동안 노동시장 내에서 이상적인 노동자는 주로 여성인 누군가에게 가사노동을 맡기고 오래 일할 수 있는 남성으로 규정돼 왔다. 일에 대한 젠더 규범이 변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 유급 노동에 뛰어들었지만, 바람직한 노동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뤄지지 않았다. 백경흔 강사는 장시간 노동 정책이 “돌봄 책임이 있는 사람을 배제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꼬집는다. 돌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다수의 여성이 평등한 노동권을 누리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돌봄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은 노동시장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904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49시간 더 길다. 권현지 교수는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성역할 규범과 더불어 장시간 노동 문화가 여성을 집안으로 밀어 넣는 사회적 힘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했다.

  남녀 모두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밀어 넣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다고 여기는 가사노동에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에서는 돌봄도 노동도 괴로움으로 남는다. 건국대학교 인권센터 신나라 교수는 논문 「고학력 30대 여성의 경력이동: 일과 정체성에 관한 내러티브 탐구」(2021)에서 ‘여성들의 변화된 일 규범을 지지하고 그 실현을 뒷받침하는 제도나 문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가족 양립이 개인 전략에 의존하는 현실’은 가족 형성을 하지 않거나 자신의 경력 열망을 조정하는 선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가사노동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계층과 그럴 수 없는 계층 간 노동 기회와 가족 형성 기회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돌봄 노동 정책을 위한 5R 프레임워크

  돌봄 노동의 가치 인정과 처우 개선 없는 단편적인 접근은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는 기존의 사회구조를 도리어 강화한다. ILO는 지난 6월 제112차 총회에서 돌봄 관련 정책을 구현하기 위한 ‘5R 프레임워크’를 결의안에 포함했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가시화하고 인정(Recognize)하기 ▲무급 돌봄 노동의 부담을 경감(Reduce)하기 ▲돌봄 책임을 사회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재분배(Redistribute)하기 ▲유급 돌봄 노동에 대해 적절히 보상(Reward)하기 ▲돌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Represent)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한국의 정책과 노동 문화가 이에 역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시점이다. 백경흔 강사는 “유급노동 중심의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법과 제도와 문화가 있다면 거부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시민이 돌봄의 권리와 의무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과 돌봄은 모두 삶에 필수적인 영역이다. 둘 중 하나를 위해 하나를 희생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희생이 누군가의 취약함에 기대 이뤄지고 있다면 그 의미를 다시 상상해야 한다.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대우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노동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시장 교환가치는 삶과 사람의 가치를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돌봄에 대한 무시와 차별 위에 세워진 사회는 누구의 삶도 지탱할 수 없다. 무급, 여성, 빈곤, 이주민의 속성에 전가되는 하찮음의 맞물림을 깨고 이 사회를 돌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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