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시대를 탄핵하라

차별과 배제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자

  지난 14일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마침내 가결됐다. 역사에 역행하는 내란 시도에 맞서 광장으로 결집한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시민이 만들어낸 결과다. 계엄군의 총구도, 매서운 추위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굳은 의지를 막지는 못했다.

  대학생들도 함께 분노하며 행동했다. 수많은 대학에서 시국선언이 발표됐고, 서울대에선 5년 만에 전체학생총회를 열어 퇴진 투쟁을 결의했다. 13일엔 44개 대학 총학생회가 연합해 총궐기 대회를 열고 공동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일렬로 선 총학생회장들은 “대통령의 불법 계엄 선포로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졌다”며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 윤석열을 엄벌”하겠노라 비장히 선언했다.

  국회와 시민을 상대로 내란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 윤석열을 끌어내려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수천 명이 모인 총궐기 자리에 필요한 질문은 그 이상의 것, 대통령이 시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 왜,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공동 시국선언은 계엄의 불법성을 재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주최 측이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집회’라는 기조를 내세운 것과 무관치 않을 테다. 이들은 ‘대학생 본연의 순수한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명분으로 정당과 정치단체 깃발을 반입하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그 결과 총궐기는 헌정 질서 수호와 민주화 열사의 희생을 낭만화하는 수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윤석열 이후의 세상을 말하는 공론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계엄 이전에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정치를 논하지 않는 한,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윤석열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선동하는 반페미니즘 백래시에 편승해 집권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을 정치적 동력으로 삼았다. 동성애가 공산혁명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건폭(건설 폭력배)’, ‘독버섯’이라는 말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이주여성을 최저임금 미만 가사도우미로 고용하는 방안을 저출생 대책이랍시고 내놨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이태원 참사와 채 상병 사건에는 책임 회피로 일관했다. 이것이 12월 3일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민주주의 헌정 질서’의 실체다.

  우리는 계엄 이전의 민주주의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12월 3일 밤에 벌어진 일은 위기의 근본 원인이 아닌, 실패한 민주주의의 증상이고 귀결이기 때문이다. 혐오정치가 윤석열에게 힘을 실어줬고, 국민의힘이 윤석열을 추대했으며, 유권자 절반이 윤석열을 선택했다. 검찰은 윤석열의 수족이 됐고, 언론은 윤석열의 횡포를 눈감아줬으며, 국회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앞에서 무력했다. 윤석열표 ‘자유민주주의’는 노동자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에겐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 정치적 반대자 모두를 반국가 세력으로 돌리는 계엄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주주의 회복’과 ‘헌정 질서 수호’라는 구호에 만족할 수 없다. 지금의 실패가 어디서 비롯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이의 목소리가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됐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내란 수괴를 단죄하는 데서 더 나아가,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탄핵해야 한다.

  지난 7일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광주를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는 시공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의 자리에 올려놨다. 감히 그 상상력을 빌려 말하자면, 이제 윤석열은 민주주의와 법치를 참칭하는 권력이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 하겠다. 성폭력과 여성살해를 방조하고, 장애인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성소수자를 광장 밖으로 추방하는 정치가 윤석열이다. 용주골 성노동자의 보금자리를 허무는 포크레인이 윤석열이고, 동덕여대 학생들을 입막음하는 대학 본부가 윤석열이다.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해고 노동자의 고공농성을 외면하는 한국옵티칼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인간과 비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가 윤석열이다.

  그러니 성급히 투쟁의 깃발을 내리지 말자. 윤석열의 시대는 아직 탄핵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열사들의 이름을 관성적으로 호명하지도 말자. 이 투쟁은 지난 역사의 되풀이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새 시대를 여는 우리의 싸움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구태의연한 질서의 회복을 넘어 차별과 폭력 없는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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