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남태령에서는 트랙터 탄 농민과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운집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내란범 윤석열 체포·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 행진에 나선 농민들이 서울 시내를 목전에 두고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시민 수천 명이 삽시간에 모여든 것이다. 시민들은 도로를 점거한 경찰을 향해 연신 “차 빼라”를 외치는 한편,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도시와 농촌을 잇는 연대의 장을 만들어갔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 남태령에 모인 이들은 윤석열 이후의 세계를 위해 함께하는 동지(同志)가 됐다. 그 길고 추웠던, 그러나 뜨거웠던 밤을 만든 주인공들을 되짚어 본다. 농민들은 왜 한겨울 트랙터 위에 몸을 실어야 했을까. 경찰은 무엇을 위해 트랙터를 멈춰 세웠을까. 시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밤새 남태령을 지켰을까.

농민들이 트랙터에 오른 이유는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틀 뒤인 지난 16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경남과 전남에서 ‘전봉준투쟁단 트랙터대행진’ 출정식을 열었다. 6일간 트랙터 35대와 화물차 50여 대가 동원된 대행진의 시작이었다. 전농 하원오 의장은 “8년 전 박근혜를 끌어내렸던 백남기 정신으로, 130년 전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이름으로 투쟁을 시작한다”며 “이 땅의 농업을 지키기 위해 한 치 물러섬 없이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농민들에게 트랙터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다. 땅을 갈고 비료와 농약을 뿌리는 데 사용되는 트랙터는 한 해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농기계일 뿐만 아니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다. 빚을 내서 트랙터를 사거나 빌리고, 다시 한 해 수입을 빚 갚는 데 쓰면 남는 것이 없다는 곡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서울까지 가는 수일 동안 무리하게 가동된 트랙터가 망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소모되는 기름과 타이어의 값도 무시할 수 없다. 트랙터 상경 투쟁은 농민들에게는 막대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향한 것은 농업을 도외시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였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지난 2023년 정부에 곡물 가격 안정화를 요구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양곡법)에 임기 첫 거부권을 행사했다. 양곡법은 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생존을 위협받던 농민들에게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었으나, 정부는 이를 ‘포퓰리즘’으로 일축하며 분노를 샀다. 윤석열의 직무가 정지된 뒤인 지난 19일, 한덕수 권한대행마저 양곡법 등 4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자 농민들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트랙터 행진에 나선 농민들은 민주주의 수호와 함께 국가가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지 농민 집단의 이익만이 아닌 한국의 식량 안보, 지역 균형과 직결되는 문제기도 하다. 21일 출정식에서 전농 김영호 전 의장은 “1894년 동학혁명군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과부가 결혼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외쳤다”며 “우리 사회의 대개혁을 위해 투쟁하자”고 목소리 높였다.

경찰이 트랙터를 막아선 명분은
21일은 트랙터 행진의 마지막 날로, 본래 계획은 12시경 서울 시내에 진입해 한남동 윤석열 관저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수원에서 출발해 순조롭게 이동하던 농민들은 12시경 남태령에서 경찰이 세운 차벽에 가로막혔다. 버스 여러 대를 동원해 왕복 8차선 도로를 전면 차단한 경찰에 의해 인근을 오가는 모든 공공버스가 우회·회차하는 등 심각한 불편이 빚어졌다.
경찰이 트랙터 진입을 제한하며 내세운 명분은 ‘교통체증 및 교통불편’이었다. 농민들은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행진을 강제로 가로막으며 교통체증을 일으킨 책임은 경찰에 있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전농 권혁주 사무총장은 “합법적으로 집회 신고를 했으며 여기까지 평화롭게 행진해 왔으니 막을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트랙터의 도로주행을 금지할 근거는 없으며, 지난 닷새 동안 농민들은 교통 불편 없이 평화로운 행진을 이어왔다. 오히려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고 도로를 무단으로 점거한 경찰이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경찰의 진짜 목적은 교통체증을 농민들의 탓으로 돌려 투쟁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실제로 경찰은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거나, 물리적 충돌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트랙터 유리를 부수고 농민을 끌어내는 등 폭력을 행사했고, 민주노총 깃발을 든 노조원 2명을 강제 연행하기도 했다. 현장에는 경찰 버스 수 대가 이중, 삼중으로 차벽을 세운 가운데 방패를 든 경찰 수백 명이 투입되며 폭력 진압에 대한 우려가 일었다.
시민들은 정당한 투쟁을 가로막는 경찰을 향해 “당신들은 농민의 자손이 아니냐”며 분노를 쏟아냈다.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이만한 경찰력이 투입됐으면 안타깝게 희생되는 이는 없었을 것이라며 시민이 아닌 권력자의 안위만을 지키는 경찰을 규탄하기도 했다. 경찰에게 시위 봉쇄를 명한 책임자를 따져 물어야 한다는 요구도 터져 나왔다. 진보당 김재연 대표는 “경찰에게 남태령 고개를 막으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일지 물으며 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 행정안전부 장관이 모두 공석인 상황에서 결국 한덕수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짚었다.

시민들이 남태령을 지킨 마음은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SNS에서 접한 시민들은 순식간에 남태령으로 모여들었다. 경찰이 농민들을 폭력 진압하지 못하도록 막고, 농민들과 함께 경찰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오후 7시경 전농은 “2024년 오늘, 바로 여기 남태령이 우금치”라며 연대를 요청하는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우금치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진압군에 결정적으로 패퇴한 전투가 일어난 장소다. 130년 전의 농민들이 미처 넘어서지 못한 국가권력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시민들의 연대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농민들은 응원봉을 들고 모여든 시민들을 보며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농 권혁주 사무총장은 “농민들이 시민 여러분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께서 우리 농민들을 지키겠다고 늦은 시간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여기 계신 분들께 어서 돌아가시란 말도, 자리를 계속 지켜달란 말도 못 드리겠다”며 미안함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괜찮아”라는 외침으로 화답했다. 투쟁에 앞장선 농민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임을 알기에, 이곳에서 마땅히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예기치 않게 모인 집회였지만, 신청곡을 요청하고 자유발언에 나서는 시민들로 금 활기를 띠었다. 발언대는 트랙터 위에 마련됐다. 한 시민은 “오늘 광화문 집회에서 제가 사랑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봤다”면서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농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발언도 있었다. 양평에서 부업으로 토종 벼를 재배하고 있다고 밝힌 한 시민은 “앞으로도 농업에 대해, 농민이 살기 좋은 사회에 대해 모두가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과 대만 민중의 투쟁에 연대하는 발언도 이어졌다.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시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모두에게 돌리고도 남을 만한 음료와 간식, 배달 음식이 시위 현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배터리 충전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버스를 대절해 보낸 시민들도 있었다. 남태령 인근 사찰인 정각사에서는 시민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했고, 남태령역에서 근무하는 역무원은 첫차보다 이른 시각에 역사를 열어 쉴 곳을 제공했다. 전농에서 송출하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은 시청자가 만 오천 명에 달했다. 경찰이 시민들을 함부로 진압할 수 없도록 목격자를 자처한 사람들 덕이었다.

다시 날이 밝은 지금, 남태령은 새로운 시민들로 채워지고 있다. 남태령에 모인 농민과 도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서로가 서로의 삶에 연루돼 있다고 말한다. 이 만남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던 경찰은 의도치 않게 만남의 주선자가 됐고, 그 만남 속에서 우리는 분명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이 기억은 윤석열 이후의 민주주의를,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사회를 함께 고민하는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